우향 박래현. 시간의 회상. 종이에 에칭. 61×46cm. 1970~73년. 덕수궁관 소장
지역의 소중한 예술 자산인 우향 박래현을 소개한다. 한국화의 대표 작가 운보 김기창의 내조자로 알려진 박래현은 아내와 어머니로만 기억하기에는 아쉬우며 그녀의 작품이 드러내는 가치는 그 이상이였다.
추상화와 태피스트리 (여러가지 직물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판화를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통해
특유의 추상 세계를 구축하며 작품의 독자성을 나타낸 인물이다. 그녀는 창작 초창기부터 말기까지 역사와 생명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을 세셈하게 분석하면서 작품속에 혼을 불어넣었다.
박래현은 밀양박씨로서 1920년 4월 13일 북한 평안 남도 진남포 지역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우향 이고, 일제 강점기의 여류 동양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가족 관계는 배우자 운보 김기창 (1913~2001년) 화백이며, 슬하에 출생에 따라 김현, 김완, 김선, 김영으로 1남 3녀를 두었다.
우향 박래현 가족사진
박래현은 6세 때 부모를 따라 전북 군산으로 이주하여 ‘군산중앙초등학교’, ‘전주여자고등학교’를 다녔으며 그 다음해에 인물화에 능한 일본인 동양화가 ‘에구치 게이시로’부터 수채화와 동양화에 대해서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37년 ‘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전북 순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2년 만에 사임하였다.
1941년 ‘일본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은 일본화과였지만 동양화의 전반적이 과정을 공부하는 학과였고, 40여명의 학생중 한국인은 그 하나 뿐 이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봉건적 사고가 팽배하여 여려웠으며 일본 유학 기간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그림에만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6.25 전쟁을 피해 군산에 오게 된다. 박래현의 고향이기도 했던 군산은 당시 많은 예술인들이 전쟁을 피해 모여 들었고, 이 부부도 4년 동안 군산에 머물게 된다.
우향은 초기에는 사실묘사를 기초로 한 화조, 인물, 산수 등을 그렸으나 1950대부터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전통적 동양화의 재료를 통해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종합함으로써 감각적인 색채와 대담하고 강렬한 화풍을 이룩하는 등 새로운 한국화의 방향을 시험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녀의 회화 세계는 대체로 4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1940년대)는 일본 화법에 근거를 둔 인물화 작품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이다. 제2기(1950년대)는 김기창과 더불어 동양화의 재료를 가지고 서양 현대 조형이 쌓아 올린 분석적인 방법을 원용하여 대상에 대한 입체적인 형태 해석과 면 분할이라는 반추상적인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제3기(196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상성이 강한 화풍을 이루었다. 제4기(1970년대)는 판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하여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보여 주었다. 대표작으로 ‘부엉이’, ‘노점’, ‘작품 19’, ‘작품 F’ 등이 있다.
우향은 전통적인 표현 방법에서 벗어나 입체파 적인 작품을 연구 하였다. 이는 1900초 시작된 유럽의 입체파 피카소보다 50년이 뒤졌지만 박래현의 미술적 실험 시도는 결국 한국에서는 초창기 입체파의 시작 이였으며, 군산이 그러한 중심에 서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군산에서의 삶은 격동기를 사는 인간의 고뇌와 미술인으로써 창작 열정을 표출했던 곳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 정리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