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의 미학
살아가면서 어떤 취미이든 관심사든 사람이든 더 나아가 사랑이든 간에 무엇에 홀린 듯 열광하며 끌린 적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출발이 자의적이어야 한다. 타의적일 경우 버티는 그 힘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여기, 기타리스트· 피아니스트인 음악가 이정근 씨를 소개하고자 함이다.
슬픔은 날카롭다
그는 조부, 외조부, 아버지, 외삼촌, 숙모님 등이 모두 교직에 계셨던 교육자 집안 태생으로 3형제 중 둘째였다. 그만큼 외부의 시선이 남달랐기에 어려서부터 마음가짐, 몸가짐에 대해 각별한 신경을 쓰며 자라야 했다. 하지만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홀로 된 어머니는 3형제를 반듯하게 키우려고 많은 고생을 하셨다. 설상가상으로 동생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뜻하지 않은 병으로 세상을 등져,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의 죽음을 속울음으로 삭이면서 험한 세상을 건너야 했고, 그 또한 큰 슬픔에 베여야 했다.
아버지의 유산, 예술적 재능
초등학교 시절, 그의 할아버지는 그가 다니던 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다. 기죽지 않는 좋은 점도 있었지만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도 컸다.
할아버지는 “너는 전주 이씨 왕족의 자손이다. 오늘날 교육자 집안의 자손으로서 품위를 잃어선 안 된다.”라며 늘 정신 교육을 시키셨다.
그 시절엔 교장 선생님 사택이 있었는데 그곳 창고에는 부서진 풍금, 피아노 등 많은 악기가 있었다. 그는 그때 장난감 대신 악기를 두드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시간이 참 즐거웠어요. 그때 그 시간이 지금의 저로 이끈 것 같습니다. 물론 어려서부 터 미술을 좋아하기도 했어요. 한때 화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모든 예술적 재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중학교·고등학교 때에는 무척 사교적인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어느 날 우연히 통기타를 접하게 되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기타 연주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고등학교 때에는 통기타 연주가 수준급이 되어 여기저기 초청 연주를 다니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개인 레슨이 목적이었는데 그 선생님이 저를 가르치기 힘들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이미 제 나름대로 재즈 및 실용음악 연주를 제법 했을 때였으니까요. 아마 제가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누구한테 따로 배우지도 않았어요. 스스로 터득한 거죠. 그만큼 예능 쪽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
자유로운 연주자의 꿈을 품다
그는 예능에 푹 빠져 있었다. 서울에 있는 음대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등록금을 가지고 서울에 갔다. 하지만 그는 음대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그는 그 길로 낙원 상가에 가서 악기를 사서 내려왔다. 이론 중심 학교 수업이 아닌 ‘자유로운 연주자’가 꿈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죽지 않을 만큼 맞았고 혼도 많이 났지요. 형은 그 당시 연세대 건축학과를 다니고 있었으니 제가 얼마나 한심했겠어요. 물론 저도 훗날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요...”
엇나간 꿈을 쏘다
그는 젊은 날, 그룹사운드 및 밤무대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무대가 많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니 제가 추구하던 음악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진정한 음악인, 연주 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피아노 연주 및 이론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물론 그 옛날 할아버 지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도 떠올렸지요. ‘너는 예술가가 되어야지 화류계 음악가가 되어선 안 된다’라는 말씀요.”
아내의 응원으로 새 길을 닦다
그는 1986년 아내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두었다.
그가 밤무대 활동을 접을 때 아내의 응원은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먼 훗날 이름 있는 음악인으로 남으려면 지금부터 힘들어도 잘 버텨야 한다.” 라는 말이었다.
그 후 그는 혼자 연구하고 느끼고 터득하여 1997년에는 미국 타코마시 초청 공연을 했고, 1999년에는 중국 연대시 초청 공연과 KBS, MBC TV 방송 출연 등을 했다. 또 재즈 연구소 대표로서 재즈 피아노, 통기타 연주자 및 작곡가, 교육자(군산대 평생교육원 전담교수)로서도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무너지려는 하늘, 기도로 받들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고난이 찾아왔다. 10여 년 전 그의 아내가 신장이 좋지 않다는 통보를 받았던 일이다. 결국은 투석을 해야 한다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강의를 하면서도 아내에 대한 불안과 초조에 휩싸였다. 주변인들에게 내색조차 하지 않으며 견디는 고통은 오로지 그와 아내의 몫이었다.
그는 매주 금요일 철야기도를 하는 성당 성령 기도회의 반주자로 봉사를 하면서 ‘아내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강생을 만나 다시 강의를 해야 했다.
“아내를 살리려 중국까지 갔어요. 신장이식수술 접수까지 했으나 잘 안 됐어요. 결국은 아 들의 신장을 이식하는 것으로써 아내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게 됐지요.”
“수술실 들어가는 아내와 아들을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마음이 이제 이해가 돼요.”
50년 음악인, 외길에서 만난 보람
그는 음악가로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고 가르쳤고 연주를 했다. 늘 준비된 사람으로서 인간관계를 형성해왔고, 보다 나은 교육의 질을 통해 존경받는 스승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가꿔 왔다.
“악보를 전혀 못 보던 분이 악보를 보고 피아노 연주를 할 때, 평생 소원이 피아노 치는 거였는데 1년 후에 드디어 연주의 꿈을 이루었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할 때, 보람을 느꼈죠. 어떤 분은 10년 넘게 저와 음악을 공유하며 행복해합니다.”
의지의 미소를 읽다
외길 50년, 물론 끌림으로 걸어온 시간들이다.
“제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로써 예술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또한 그들의 아픔, 즐거움, 모든 일상을 함께 느끼는 친구 같은 멘토가 되고 싶어요.”
“그냥 지금처럼 건강 유지하면서 강의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피아노와 통기타, 또 작곡 을 통한 연주인, 음악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 행복 했으면 합니다.”
그의 미소를 읽는다. 그의 미소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강의를 통해 지역 문화의 한몫을 담당하고자 하는 수제자들을 배출하고 싶은 의지의 미소이다. 그의 건투를 빈다.
*이정근 재즈 연구소(재즈 피아노, 통기타)-군산시 신설3길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