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서 마주친 태극기 부대
봄기운으로 완연한 주말, 강남대로를 걸었다. 가벼운 옷차림에서 봄은 벌써 도착했다. 강남역 주변은 언제나 그러하듯 활기차다. 익숙한 풍경 사이로 ‘이건 뭔가’ 싶다. 태극기 부대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을 증오하는 패널과 펼침막을 들고 있다. ‘4.15 부정 선거’가 단연 눈길을 끈다. 선거 끝난 지가 언제인데? 그들의 정신세계가 궁금하다. 봄, 청년, 강남과 어울리지 않는 생뚱한 풍광이다.
그들은 정말 4.15 총선을 부정 선거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한가. 하필 강남 한복판일까. 자신들 말에 젊은이들이 공감할 것으로 믿나.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잠시 지켜봤다. 10여분이지만 그들도, 행인도 따로였다. 청년세대 누구도 태극기 부대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태극기 부대 또한 청년은 관심 밖이다. 단지, 자신들끼리 떠들며 유튜브 방송을 진행할 뿐이다.
그들은 언제부터 강남역 주변을 무대로 삼았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전후가 아닐까 싶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이후 출몰 횟수는 늘었다고 한다. 광화문 집회에는 전국 단위 태극기 부대가 몰린다.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주변은 관광버스로 가득 찬다. 정부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한풀이 하는 날이다. 반면 강남 집회는 소규모다. 대부분 서울에 사는 이들로 추정된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한창 때는 잘 나갔던 이들이다.
그들이 강남 한복판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우선 유동인구가 많은 밀집지역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수원, 광명 등 수도권 광역 연결망도 고려했다. 강남역 주변은 광역 노선버스가 지난다.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자신들이 접근하기도 맞춤하다. 그래서 경로당에서 무료하게 보내는 대신 뜻 맞는 이들끼리 모인다. 수다 떨고 어울리며 서로 인정하고 위로 받기 위해서다. 지난날을 보상받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에서 모든 사회적 갈등 뒤에는 인정 욕구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을 인정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규정했다. 우리는 서로 인정받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긍정적 자아를 만든다고 한다. 반대로 지속적으로 무시당할 때 분노한다. 분노는 마침내 폭동이나 봉기와 같은 사회적 투쟁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신사의 나라’ 선진국 영국에서 벌어진 ‘영국 폭동’을 그는 인정투쟁이란 틀로 해석했다.
강남 태극기 부대도 이런 시각에서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젊은 날이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에 대한 분노다. 산업화, 민주화 고비마다 주역이었다고 믿어왔다. 박정희와 박근혜에게 투영시키며 노년을 맞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랑스러운 흔적은 몽땅 적폐로 몰렸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꼴통 보수’가 됐다. 심리적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 안에서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인정투쟁은 편향동화와 맞물릴 때 신념이 된다. 보고 싶은 정보만 받아들이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괴물이 된다. 파하드 만주가 쓴 <이기적 진실>에 나온 사례다. 2004년 대선 후보 경쟁에서 선두는 민주당 존 케리 상원의원이었다. 선거 결과 케리는 2% 차이로 공화당 부시에게 패했다. 케리 낙선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주도했다. 케리는 베트남 전쟁 영웅이었다. 그런데 참전 동료들로부터 외면 받고 낙선했다.
왜 일까. 케리는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전 참상을 증언하고, 책도 썼다. 미군이 민간인을 살상한 불편한 진실이다. 참전 용사들은 케리를 거짓말쟁이, 반역자, 지휘 부적격자라고 공격했다. 전국적인 낙선 캠페인은 성공했다. 그들에게 케리는 자신들 과거를 부정하는 악이다. 자신들이 수행한 전쟁이 자랑스러우려면 케리는 부정되어야 한다. 케리 낙선에 나선 이유는 바로 과거를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인정투쟁과 정보 선택은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그들은 케리 주장은 거짓이라며 SNS와 트위터, 페북으로 왜곡된 정보를 공유했다. 공화당 지지자들에겐 호재였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믿고 싶은 정보만 편향적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대선에서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믿고 싶은 정보만 선택하며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강남 태극기 부대도 마찬가지다. 지난 세월을 인정을 받고 싶어서다. 그래서 왜곡된 정보를 진실이라 믿고 열심히 퍼 나르고 있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지만 유튜브를 하며 스스로 만족해 한다. 유튜브 방송이 갈수록 극단화되는 이유다. 그 안에선 투명한 선거 결과조차 부정선거로 둔갑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그랬듯 태극기 부대가 간과한 게 있다. 그럴수록 공감은커녕 비난과 혐오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말 4.15 총선을 부정 선거라고 믿고 있는 걸까. 아무리 인정받고 싶다 해도 객관적 사실마저 부인하는 현실은 생뚱맞다.
임병식 객원논설위원· 서울시립대학 초빙교수 montl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