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선 문단 작가 중에서 채만식(蔡萬植)만큼 다량의 작품을 쏟아낸 인물은 전무했다. 그는 나이 50도 못 채운 짧은 생애 동안 15편의 중·장편 소설과 70여 편의 단편, 30여 편의 희곡·촌극·시나리오와 40여 편의 문학평론, 그리고 140여 편의 수필과 잡문 등, 시(詩)를 제외한 전 장르에서 괄목할만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왕성한 필력으로 보아 다른 작가들처럼 장수했더라면 유작들이 최소 2배 이상은 됐을 것이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입증이라도 하듯, 도서출판 창작과비평사가 지난 1989년 펴낸 <채만식 전집>은 모두 10권으로, 분량이 권당 400∼700쪽에 달한다.
양(量)만이 아니라 질적(質的)인 면에서도 채만식은 동시대 작가 중에서 어느 누구도 추월할 수 없는, 단연 으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타인과 어울리거나 타협하기 힘든 결벽증과 도를 넘는‘신경질적인’성격으로 인해 평생 고독과 싸워야했다. 이것이 그의 왕성한 창작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하물며 자신의 작품 속 부정적 인물에 대한 증오심도 유별났던 그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괴롭혔던 가난조차도 그의 문학창작 열정만은 꺾지 못했다. 그의 신경질적인 성격은 아들을 중시한 그 집안의 막내아들로 성장한데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원고지와 처절한 씨름을 했으나 가난에서만은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무지한 독자들이 풍자와 반어·역설·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의 범상치 않은 칼칼한 문장들을 감히 돈 주고 사 보기가 까다로웠던 탓일까?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다행히 천재작가 채만식이 자신의 문패를 가져 본 적은 딱 한번 있었다.
1948년 6월 장편 <탁류> 3판 인세와〈잘난 사람들〉원고료를 보태 어렵게 전북 익산시 주현동에 처음으로 기와집을 산 것이다. 그러나 1년 2개월 만에 그 소중한 집도 팔아 익산시 마동 296번지 소재 초가집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폐결핵으로 사망(1950년 6월 11일)했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견했던 것일까? 애석하게도 졸지에 그의 대표작〈레디메이드 인생〉에 나오는‘갈 곳 없는 초상집의 개’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가 남긴 작품들이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으나, 정작 그의 삶은 행복보다는 거의 불행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 역시 가난에 허덕이며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평생 추구해 온 식민지 현실과 민족에 대한 소설적 탐험 이면에 그의 가족들은 장작불과 같은 가정 내 갈등과 이산(離散)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혹독했던 고통이 세대를 넘어 친일오명(親日汚名) 등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중앙고보 시절(1919년) 부모의 강요로 고향에 내려와 결혼해야 했던 본처 은선흥(殷善興, 1901∼1993년 10월 21일, 남양주군 공동묘지)씨는 평생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처럼 비운으로 살다 93세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 둘 간의 관계가 너무도 유명해 상세한 기술은 생략하겠다.
특히 둘의 관계가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것은 두 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인 무열(武烈, 1926∼1945)이 20살 때 말라리아로 사망한 이후였다. 둘째 아들은 계열(桂烈, 1928∼2004)이다. 그녀는 나중에 남편과 별거하다시피하면서 어느 고아를 수양딸로 삼아 호적에 올리기도 했다.
그 후, 채만식은 숙명여고 출신인 하숙집 딸 新여성 김시영(金 ? 榮)과 동거해 2남 1녀를 낳았다. 동거 시점은 정확치 않으나 장남(炳焄)이 1942년생, 딸(永實)이 44년생, 차남(永焄)이 47년생임을 감안하면, 3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채만식은 임종 때까지 본처 대신 金 씨와 살았지만, 두 사람 사이 역시 정은 없었다. 채만식이 한국동란 직전 익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김시영은 슬하의 자식들을 버리고 가출해 버린 것이다.
그 후 자식들은 고아원을 전전했고, 백부(채만식의 큰형 明植)가 이들을 찾으려 애를 썼다고 한다. 현재 김시영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들인 병훈과 영훈은 모두 사망했고, 딸 영실(79세)은 출가하여 비구승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실 씨가 어떤 연유로 비구니가 됐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그녀가 채만식 친족들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는 것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2000년 초 군산 채만식문학관 개관식 때 초대를 받아 모습을 드러낸 이후 그녀의 행적은 지금까지 오리무중이다.
우리 이제 일제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경미한 親日문제로 마음 고생하다 간 채만식과 불행했던 그의 가족들에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도 됐다고 생각한다. 심약하기 그지없는 그가 <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경미한 친일전력을 뉘우친 것만으로도 그의 결백증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당시 어느 누가 그 같은 양심선언을 했는가?(중략)
아래 글은 탈고는 됐으나 未발표(2021년 중 공식발표 예정)된 나의 또 다른 장편소설(가칭 가마골 百合)에서 나오는 채만식 관련 내용이다. 같은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서 채만식 같은 훌륭한 작가가 말도 안 되는 친일 프레임에 걸려 곤혹을 치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참 아프다. 조속한 시일 내 그에 대한 오해가 풀려 군산시가 낳은 한국 최고의 작가 채만식과 비참했던 그의 가족들 명예가 다시 회복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다.
<장편 가마골 百合/소설 속 시제는 채만식이 임종하기 전인 1940년대 말임>
“오빠는 소설가 중에 누굴 제일 좋아해요?”
“당시 탁월한 국내 소설가는 많지만, 그들 중에서도 채만식 작가를 제일 좋아하지.”
“어째서요?”
“그가 풍자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자기만의 특유한‘알레고리’를 만
들어 일제경찰의 감시를 속여 가며 항일운동을 한데서 드러나지.”
“어떻게요?”
“예를 들어, 1943년에는 장편 <어머니를 찾아서>를 통해 알레고리적으로 민족수난사를 형상화하려 했으나, 그것이 일제에 의해 검열로 드러나자 <여인전기>를 통해 항일(抗日)을 은연중 표현하기도 했어. 이는 당시 어느 작가에 의해서도 시도된 적이 없는 천재 작가야.”
“그 분이 그렇게 탁월했어요? <탁류>, <태평천하> 등 말만 들었지 아직까진 그 분 작품을 읽어보질 않았거든요.”
“내가 구해다 줄게. 틈틈이 한번 읽어봐요.”
“채만식 소설가도 카프였나요?”
“아니. 임화는 주축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