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 동양화가의 군산 옛 집터를 돌아보며
<구암동 雨鄕 朴崍賢 동양화가 옛 집터>
최근 군산시 구암동 390번지에 있다는 한국 최고의 여성 동양화가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 1920∼1976년) 씨 옛 집터를 찾아봤다. 가옥은 흔적도 없고 빈터만 초라하게 남아있었다. 대지는 어림잡아 80평정도 되어 보였다. 시청에 가서 토지대장을 확인해본 결과, 실제 면적은 정확히 251평방 메타(76평)이었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동양화백의 부인이기도 한 雨鄕은 1920년 4월 13일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6세 때 부모를 따라 군산으로 이주했었다. 그녀는 군산공립보통학교와 전주공립여자 보통학교를 각각 졸업한 후, 경성사범대를 다니다 일본 도쿄여자미술대학에서 일본화를 전공하고 1944년 졸업했다. 그녀는 재학 중인 1940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 최고상인‘창덕궁상’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었다.
<노점/露店>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과 제5회 국전(작품명: 노점/露店)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해, 여류작가로서는 최정상의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57년에는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받아 출품했고, 서울문리사범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960년엔 중화민국의 타이베이와 홍콩 등지의 초대전에 출품했다.
이어, 그녀는 일본·베트남의 초대전에도 출품했다. 1961년 이후, 그녀는 국전 심사위원과 서울시문화위원을 각각 역임하고 성신여자사범대학 강사가 되었다. 1964년에는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바 있고,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 및 부부전(夫婦展)을 가졌다.
雨鄕은 꽃다운 23살 때 雲甫를 처음 만났다. 그 해인 1943년 12월 17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송석하 박물관장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모친은 이들의 결혼을 강력 반대했고 부친도 병으로 참석치 못했다. 운보는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던 첫 운동회 때 장티푸스에 걸쳐 고열로 후천성 청각 장애인이 됐었다. 그래서 雨鄕 부모는 둘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던 것이다.
<雲甫와 雨鄕의 생전 다정한 모습>
1950년 6월 22일, 雲甫와 雨鄕은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4회 부부전을 개최하던 중 3일후 일어난 한국동란으로 모든 작품을 분실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이 때 雲甫는 피난을 가지 못한 탓에 공산치하에서 악몽 같은 3개월을 보내야만 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까스로 납북(拉北)만은 면했지만, 여동생‘기옥’과 남동생‘기만’은 끝내 납북되고 말았다.
이들은 전쟁으로 경제력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1950년 말 군산 변두리 농촌 구암동으로 내려와, 농장 한 모퉁이의 토방(土房)에서 생활고를 겪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미군부대의 초상화를 그려가며 그럭저럭 허기만은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군정 당시 서울시장을 지냈던 김형민의 지원에 힘입어 단 10여점으로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때 판매한 그림으로 지금의 군산 구암동 터(1952년 10월 1일 김기창 명으로 등기)에 집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이들은 미군부대의 초상화 그림을 중단하고, 남은 돈으로 일본에서 미술재료를 조달한 후, 구암동 집 헛간을 작업실로 개조해 다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雲甫와 雨鄕은 현재 청주 소재 <운보의 집>에 합장돼 있다.
그간 남편 雲甫에 비해 雨鄕의 그림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雨鄕이 한국 최고의 동양화가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7년 12월21일부터 2018년 4월 1일까지 개최된 <신여성 도착하다> 展에서 雨鄕의 작품들이 재평가되어 화제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 전시회 기간 중 10만 이상이 다녀갔었다.(중략)
<이른 아침 달밤, 朴崍賢 작, 연대미상)
그 후 3년여의 세월이 지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에서 지난 추석 연휴 직전(9월 30일) 개막된 雨鄕 박래현의 회고전 <박래현, 삼중통역자>는 지금껏 雲甫에게 가려져 왔던 雨鄕의 예술세계에 대한 편견을 확실하게 씻어 내릴 것으로 기대된다. <삼중통역자>는 일본 유학시절 전통 채색화가로 화업(畫業)을 시작해, 해방 뒤에는 남편 雲甫를 구화로 소통하며 열성적으로 뒷바라지했고, 말년엔 미국 유학 생활을 하며 영어와 한국어를 넘나들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생전 스스로 명명한 말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는 삼중통역자의 삶을 살았던 雨鄕의 삶을 회화, 태피스트리(직물공예), 판화라는 세 장르로 의미를 확장해 탐구하고 있다.
내년 1월 3일까지 속개될 이번 전시는 그간 한국화의 대표 작가 雲甫 김기창의 내조자로만 알려져 왔던 雨鄕 박래현의 초창기부터 말기까지의 작품을 모두 망라해 세심하게 분석하면서, 역사와 생명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특유의 추상 세계로 구축되어 갔음을 유감없이 입증해줄 것이다.
한편, 필자는 이 글을 작성하기에 앞서 청주 소재 <雲甫의 집>을 다녀왔다. 그곳 운보 미술관에는 雨鄕의 작품이 별로 없었다. 그곳 관계자에 의하면, 비록 부부였지만 雨鄕과 雲甫의 작품은 별도 관리되고 있다 한다. 어쩌면 군산시에는 예상외의 호기(好機)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깐 가져봤다.
<雲甫의 집 입구에서 필자>
<雲甫 생가/1980년대 초 건축>
* 다음호에서는 雨鄕의 작품세계를 중점적으로 들여다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