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의 기묘한 죽음 의례
최연성(군산대학교 교수)
나이 들다 보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그러함에도 할 수 있었는데 이래저래 미루다가 못했던 일들은 잘 잊히지 않는다. 그때 일을 반추하노라면 잡사에 매달려 허송세월한 것 같아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나는 1978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캠퍼스에 와보니 차분히 공부할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어수선한 시국은 청년들을 거리로 불렀고, 나도 그런 시류에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민속학연구반’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동아리에 열혈 회원으로 종사했는데, 하는 일은 탈춤 추고, 판소리나 민요를 부르다가 밤이면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는 것이 다였다. 당시 대학가에 유행했던 키워드가 민중이었는데, 이 동아리는 특히 그 문제를 열심히 파고 있었다. 봉산탈춤에, 흥보가에, 그 무슨 운동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1979년에 10.26 대통령 암살사건이 터졌고, 12.12 군사 쿠데타가 그 뒤를 이었다. 술 권하는 사회였고, 흑암의 권세가 판치는 시절이었다.
아무튼 나이 스물 청년은 그 동아리를 계기로 민속학과 문화인류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나름대로 부지런히 공부했다. 민속학은 민중의 삶을 뒤지는 현장 학문인데, 학교생활에, 빠듯한 용돈에 현장답사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으나, 그래도 전국을 부지런히 누볐다.
그때 학업과 주머니 사정으로 끝내 못 간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그 세 곳은 제주도, 진도, 그리고 군산 선유도였다. 제주도는 본풀이라고 하는 서사무가(敍事巫歌) 때문에, 진도는 씻김굿 때문에, 선유도는 초분(草墳) 때문이었다.
초분은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돌이나 통나무 위에 관을 얹어놓고 살이 썩어 없어질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 등으로 덮어두는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을 말한다. 2~3년 후에 이것을 해체하여 남은 뼈를 깨끗이 정리한 다음 정식 매장한다. 고군산군도를 위시한 서남해 도서지방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고군산군도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풍습은 비단 한반도 섬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세계 곳곳에 있는데 풍장(風葬)이라고들 한다.
죽음은 단절이며, 망자는 정겨운 이들을 남겨두고 절망의 골짜기로 내려간다. 누가 그랬나? 죽음은 우주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사라짐은 슬픔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언자 에스겔을 어느 골짜기로 데려가시는데, 그곳에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른 뼈들이 가득했다. 마른 뼈는 바빌론 제국의 포로로 절망에 빠진 유다 민족이요, 풀죽은 민중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뼈에 생기를 불어넣어 위풍당당한 군인으로 재생시켰다. 희망을 준 것이다.
통과의례 중에서 장례가 가장 거창하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속박에서의 해방이라서 그렇다. 해원이고,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자리라서 그렇다.
시인 황동규는 황순원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결코 아버지 못지않다. 황동규는 1982년 그의 대표작 ‘풍장(風葬)’을 지었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70편 연작 장시는 이렇게 시작되는데, 죽거든 군산 가서 통통배 타고 선유도 어디쯤 무인도에서 풍장하여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달라고 노래한다. 풍장은 모진 세월과의 이별이나 자연으로의 귀향이요, 영원으로의 회귀이다.
풍장이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좀 무거운 시라면 그의 출세작 ‘즐거운 편지’는 좀 가볍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허진호 감독은 원래 <8월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즐거운 편지>를 제목으로 쓰려고 했으나, 최진실, 박신양 주연의 영화 <편지>가 그 전 해에 히트하는 바람에 그 제목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이 초원사진관 어디쯤 적혀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고군산군도의 초분은 사라졌다. 기묘한 죽음 의례는 전설로, 또 어느 섬집의 앨범 속에 빛바랜 사진으로나 남았지만, 황동규는 그 어느 상주나 문상객 못지않은 진실함으로 죽음을 성찰했고, 시에 그 섬의 초분을 오롯이 남겼다.
고군산군도에 이것저것 좋은 것 다 들어선다고 하는데, 풍장 시비 하나쯤 세우면 어떨까 싶어서 몇 자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