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노예 양산하는 답정너 교육
어느 학교. 담임 선생님이 반장을 불렀다.
“반장, 너 가서 야자시간 떠드는 애들 이름 좀 적어 와라.”
그러자 반장이 얼굴을 붉히며 바로 대꾸한다.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반장을 선생님이 뽑아 준 것도 아니고, 저를 반장으로 선출해 준 것은 우리 반의 학생들입니다. 반장은 반의 학생들이 공부와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대표성을 가진 위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생님 간첩도 아니고, 저를 뽑아 준 친구들이 졸거나 하면 뒤에 앉아서 몰래 이름 적어서 가져 오라고 하다니요? 부당한 명령 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반장이 있을까? 어딘가 있겠지. 이와 다르게 선생님 말씀 받아서 야자 시간에 이야기 하는 친구뿐만 아니라 졸거나, 교사를 비판하는 친구들 이름까지 모두 적어가는 반장도 있을까? 어딘가 있겠지. 이런 행위를 하는 학생을 ‘반장질’ 한다고 표현한다. 시키는 일만 잘하는 반장의 역할. ‘반장질’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교사는 어떻게 대우를 했나? 앞에서 잘 못된 명령이라고 저항하는 학생에게 또 어떻게 대응할까?
답은 나와 있다. 이런 일을 시키는 교사 수준에 전자의 학생처럼 저항하는 학생은 꾸중을 들을 거다. 후자에 시키는 일을 충실하게 하는 학생은 칭찬 받았겠지. 확대 해석해 보자. 반장에 대한 조금은 과격한 해석이니 이해하시라. 반장질 잘하는 학생이 기성세대가 되어서 장관, 국회의원, 총리, 검사, 판사 등 우리 사회 권력을 갖게 될 경우에 자신들의 월급을 주는 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힘을 주는 누군가만 들여다 볼 개연성이 높다. 생각 없이 누군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시키는 일만 잘하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우리 공교육에서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과는 다르게 학교 내 교육자치나 민주주의, 리더십, 시민성 등이 구현되는지 의문이다. 반장질 잘하는 신노예를 만들어 내는 학벌교육의 한 부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반장질’ 잘 하게 하는 교육은 개인의 소질과 유능함을 개발하며 사회적으로 연대하고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재로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철저히 극소수 지배자의 도구로서 활용된다. 인격의 도야・민주시민・인류공영의 발전, 홍익인간의 가치 등 교육기본법의 기본 이념에 충실한 교육이 아니다. 공교육의 이념이라고 하는 가치는 무한경쟁의 틀 속에 가두어 버리고 철저히 자기 밖에 모르게 한다. 교육의 가치를 실현하는 게 아닌 어떤 힘을 가진 이들이 묻는 말에만 답을 잘하게 하는 훈련 과정이다. 반장질 잘 하는 과정을 훈련받으면서 힘을 가진 이에게 종속되어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된다.
문제풀이식 시험을 통한 과정도 교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시험을 잘 보는 방법인 무엇인지 아는가? 교사의 출제 의도를 먼저 파악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곳에서도 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은 교수님의 말투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빼곡히 기록해서 외우기 바쁘다. 비판적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즘 속어로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답정너’를 양산하는 ‘노예’ 교육과도 같다. 주인으로서 주체로서의 학생의 참여는 존재하지 않는 교육과정이다.
노예그룹은 학교에서 직장으로 그대로 전이된다. 노예는 자기 일을 하지 않는다.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한다. 그 대가로 먹을 것과 잘 곳 등을 제공 받는 게 노예의 정의다. 과거에만 노예가 있었던 게 아니다. 현재 우리사회에도 존재한다. ‘신노예’들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주인으로서 하고 있는지, 하기 싫지만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하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지원 받는 일인지 살필 일이다. 신노예를 양산하는 또 하나의 기재는 스펙이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신어 자료집에 등록되기까지 했는데 원뜻과는 다르게 사람이 가진 ‘사양’이라는 뜻이 일반화 되어 있다. 사양? 원래 사람에게 이런 단어를 붙이지 않는다. 스마트폰이나 냉장고가 어떤 사양인지 고려할 뿐이다.
신노예를 양산하는 교육과 학벌교육, 스펙에 집중하는 한 경쟁에 저항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어렵고,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자신이 노예인지도 모른 채 노예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성찰은 요원한 과제가 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 사회라는 공간에서 긍정적인 삶의 과정이 무엇인지, 직업의 본질 가치가 무엇인지 등 선택의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일이 있다. 삶은 과정이고 매 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모든 것을 좌우기에, 청소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반장질 잘하면서 ‘따르는 게’ 아닌 성찰하면서 선택 하는 과정에 주도적인 ‘참여’를 해야 옳다.
-정건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