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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수산업 외길, 노평호 서진수산 대표
글 : 이진우 /
2020.04.01 15:38:0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30년 수산업 외길, 노평호 서진수산 대표

- 어촌에서 태어났으니 어촌에서 살리라

- 어렵고 힘든 어민들 도우며 살아갈 터

 


 

 

깝깝하면 몬산다

매일 바다를 보아서일까, 그는 바다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사업체인 냉동창고와 수산물 가공공장 건물 사방이 탁 트였으니 그럴만했다.

 

어황, 작업 규모 등을 파악하기 위하여 바다를 한 번 보고 하루의 시작한다고 했다. 수더분한 그의 입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 나오다니 뜻밖이었다.

 

군산중과 군산고, 그리고 군산수산전문대학을 졸업한 노평호 대표. 30년 넘게 수산업 외길을 걸어 온 그의 태어난 고향이 경남 삼천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6학년을 마치고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자 군산의 신풍동 말랭이 판잣집으로 이사를 왔거든요. 친척이 운영하였던 신성디젤이라는 철공소를 큰 형님이 맡았던 게 여기에 정착하게 된 계기였지요.”

 

그는 서해안에 생성된 고등어와 오징어 어장의 가능성을 보고 오늘의 그를 성장하게 이끌어 준 자란 고향군산 땅에서 수산전문기업을 일으켰다. 비응도에 반듯하게 들어 선 서진수산(), 비응냉동냉장(), 서진정수()가 바로 그 곳이다.

국내 생산량 50~60%의 고등어, 30~40% 정도의 오징어가 서해안 어장에서 나오는데 비응도에서 선망업 수산물 가공과 냉동 냉장업, 어선 등에 물을 공급해주는 사업체를 만들었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젊었을 때 장돌뱅이처럼 전국을 돌며 수산물 사업에만 매달렸던 그가 길러준 군산으로 돌아온 건 우연이 아니다. 바닷바람에 시달린 흔적이 반쯤 정도만 섞인 풋풋한 인상이지만 벌써 육십이다.

 

어촌에서 태어났으니 어촌에서 살리라는 좌우명의 실천이기도 했다. 그러나 냉동냉장 공장을 지으면서 자금난에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시련을 견뎌야만 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거든요. 그런 순간을 이겨내야 했기에 때론 강성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의 담대한 표정 안에는 단 한 번도 힘들다입 밖에 내지 않았던 자존심이 가득했다. 너무나 치열했지만 이제는 내려놓고 주변과 함께 살려고 한다.

 

지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뤄진 한·중 해운협정으로 130여척이나 되었던 군산의 안강망이 감척되었다. 그 이후 군산경제의 한축이었던 수산업이 붕괴되었는데 노 대표는 이 걸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꿈을 꾼다.

 

수산업 쪽에는 제가 가진 인적 인프라가 꽤 되거든요. 전국을 돌며 도움을 주고받던 사람들과 오랜 기간 쌓여진 인연이지요. 군산에 수산관련 인프라를 만들려면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지요.”

 

바다와 함께 살아 온 노평호는 숱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시련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였으며, 그는 본격적으로 수산물 가공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제대를 한 1989년 군산에 일자리가 없어 삼천포에 내려가 부도직전의 한려제빙에 들어갔다. 꼴찌에서 맴돌던 회사를 선두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사업 수완을 인정받았다.

 

미친 듯이 일했지요. 얼음을 파는 게 가장 마진이 좋았는데, 그걸 팔기 위해서는 선장들과의 유대가 중요했거든요. 밤에 고기를 푸고 낮에는 선장이 집에 갈 때면 잠도 못자고 직접 운전하면서 모셔다 주었어요. 잠도 못 잤지만 인간적인 유대로 묶여졌지요.”

 

티에스우인의 삼천포 소장 당시 우리나라 최대(하루 처리량 12,000상자)의 냉동 공장 신축 과 부산사무소에서 국내 최초로 6척으로 구성된 선망(고등어배)을 임대하고 연간 1천억대의 거래 실적을 올렸지만 갈증은 떠나지 않았다.

 

그는 1997년에 선망업체 신성수산을 거쳐 봉수망(꽁치잡이) 원양어선업 대복수산을 창업했으나 3년만에 실패로 끝났다. 다시 삼천포로 돌아가 냉동공장에서 다시 일하던 어느 날 수협 경매장에 나갔는데, 업계 선배가 , 니 장돌뱅이도만....”하는 말이 단초가 되어 오늘의 그가 만들어졌다.

 

오징어잡이 트롤어선의 냉동고가 고장이 나서 신진도로 들어가 고기를 하역하려 컨 베어 벨트를 빌리려는데 모두 고개를 가로젓는 거였다. 한 업자가 어디 배냐?’고 물어 삼천포 배라고 하니 노평호 사장 아느냐라는 거였다. ‘잘 아는 후배라고 하자 그 때서야 장비를 빌려주었다는 말이 계기였다.

 

오늘날 서해안의 오징어와 고등어 선망 작업을 개척한 당사자가 노평호 대표라는 건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 그 날 이후 그의 서해안 시대가 펼쳐졌으니 말이다.

 

저는 당시 서해안에는 300톤급 큰 배가 못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태안에서 큰 배로 작업을 한다는 말을 듣자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어요. 곧바로 신진도로 올라가서 보니 해경의 500톤급 배가 항구에 드나드는 것이었어요.”

 

, 이 정도면 서해안에서 작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삼천포를 정리하고 신진도로 올라갔다.

 

냉동 시설이 낡아 동중국해로 나가지 못하는 오징어잡이 12척이 근해에서 작업을 했는데 그 배들을 불러 들였다. 시쳇말로 아다리가 났다.

 

얼음을 채워서 가공공장에 보내는 일이었는데 오징어 가격이 잘 나가서인지 하루에 8천만원을 벌 때도 있었다. 고등어가 날 때는 길바닥에 산더미처럼 깔아놓고 박스에 얼음을 채워서 서울 등으로 보냈다.

 

2005년에 신진도의 냉동 공장을 인수하여 남부럽지 않던 2009년 그는 운명처럼 그는 향수병 비슷하게 외로움을 탔다. 마흔아홉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다시 시작했지만 바닷바람은 그냥 잔잔히 불어오는 게 아니었다. 신진도에서 사업을 할 때 함께했던 분에게 4,800평의 공장을 포함한 사업 전체를 물려준다는 약속을 지키고 군산 비응도로 돌아왔을 때 그는 거의 무일푼이었다.

 

비응도에 공장을 지을 때 대금을 제 때 주지 못해서 사기꾼 소리도 들었고 냉동차와 지게차 사이에 머리가 끼어 죽을 고비도 넘겼지요. 물건 살 돈도 없어서 험한 꼴도 당하고 힘들었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지요. 지금은 가장 돈을 잘 주는 업체하면 우리 회사를 꼽지 않을까요?”

 

객지로 돌던 노 대표가 군산에 온지 11년이 지났다. 비응도에 냉동 90(하루 처리능력 4,500박스)과 냉장 3천톤 규모의 냉동냉장 공장과 다른 사업체들도 자리를 잡았다. 이젠 사는 날까지 군산과 함께하려고 마음먹었다.

 

고등어와 오징어로 특화된 가공업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일당으로 고용하고 있다. 잔돈벌이라고 하찮게 볼지 모르지만 수산업계에는 그렇게 먹고사는 분들이 너무 많다.

 

긴 세월을 돌고 돌아 군산의 수산업 한켠에서 뿌리를 내렸으니 나를 길러준 군산에 대해 어느 정도 신세는 갚은 셈이지 않을까요?”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렇게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려고 한다는 그의 얼굴에서 군산 수산업의 부흥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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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2 19:22:16) rec(59) nrec(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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