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꼰대로소이다 -남대진-
엄마와 아빠 아들, 가족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식당에 들어와 음식을 주문한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은 자리에 앉아 계속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음식이 나오고 아빠가 아들한테 막걸리 한 잔을 따라주는데, 받는 아들은 여전히 한 손에 휴대전화기를 들고 들여다보며 다른 한 손으로 잔을 받는다. 식사하면서도 아들은 여전히 한 손에는 휴대전화기를 들고 눈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수저를 움직인다.
건너편 식탁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나는 꼰대가 맞다.
두 자녀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두 자녀는 차 뒷자리에 앉아서 곧바로 휴대전화기를 들여본다. 지나치는 바깥 경치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엄마, 물…”
“엄마 휴지…”
“엄마 과자…”
그리고는 깊은 잠에 빠진다.
멋진 경치들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엄마는 연신 감탄을 하며 아이들을 향해 말한다.
“얘들아, 저것 좀 봐라, 진짜 멋지지 않냐?”
아이들은 아무런 관심 없이 여전히 잠에 취해있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비몽사몽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화가 나는 나, 분명 꼰대가 맞다.
호텔 식당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다 큰 아들에게 엄마가 컵라면에 물을 부어다 줄 동안 아들은 휴대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또 화가 치미는 것은 내가 꼰대이기 때문이다.
명절증후군이 어쩌고, “왜 시댁(이런 단어도 쓰면 안 된다지만)이 우선이고 친정은 다음이냐?”는 항변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 때는 말이야…’ 라며 항변하고 싶은 것을 보면 난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맞다.
언제부터인가 ‘꼰대’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소통이 없다는 것, 오직 자기 의견만 고집한다는 것,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라는 것, ‘나 때는 말이야…’를 반복하며 비난을 일삼는 것들이 꼰대의 모습인 것은 분명하고 젊은이들로부터 배척받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성년이 되어서도 컵라면에 물 붓는 것조차도 엄마가 해줘야 한다면, 거금을 들여 가족여행을 하는데 오직 휴대전화기만 바라보고 먹고 잠만 자다가 돌아와서 여행의 의미도 모른다면,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명절에 자신은 친정에 가면서 올케는 시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시집간 딸은 친정에 오고 며느리는 시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나이가 몇이든 유치원생일 뿐이다.
나는 꼰대가 맞다. 그러나 탈 꼰대를 위해 애를 쓴다. 마찬가지로 유치원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성년이라면 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