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의 일본 식 사찰
동국사(東國寺)
종걸 스님
일제가 세운 절, 민족혼을 일깨우는 해동 대한민국의 사찰로 거듭나다.
동국사의 주지인 종걸(宗杰)스님, 그를 대할 때면 큰 바위 같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일제가 남긴 유일한 사찰이지만 우리민족혼이 생동하는 역사교육의 보고로 탈바꿈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문화재 수집을 위해 국내외를 수없이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 36년, 그 통한과 울분의 역사를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될진대 당시를 돌아볼 수 있는 자료를 축적함으로써 후대의 가르침으로 남기고자 함이다.
동국사의 변천사
동국사 정문 우측 돌기둥에는 차문불문(此門不門)이라는 글씨가 있다. 직역하면 ‘이 문은 문이 아니다’인데 바꿔 말하면 문이 아니므로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어도 된다는 뜻이다. 차별을 두지 않고 만물을 포용하는 부처님의 자비가 담긴 말 같다. 그 글씨 밑으로 금강사(錦江寺)라는 음각 글자가 희미하다. 변천사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지사, 종걸 스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의문이 풀린다. 이곳에 사찰이 세워진 것은 1913년. 당초 융희3년(1909년), 우치다(內田佛觀)를 위시한 일본 조동종(曹洞宗)승려들이 금강선사(錦江禪寺)라는 이름으로 개창했던 포교소를 현 부지에 신축 건물을 완공, 이전하면서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찰로 인정받아 금강사로 명명한 것인데 군산의 일본인 거주민들을 위한 사찰로 기능했으리란 건 짐작이 어렵지 않다.
이 금강사는 8.15해방 후 미군정에서 압수,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들어 전북 종무원에서 매입하게 되며 1970년에 당시 주지였던 남곡(南谷)스님이 ‘해동(海東) 대한민국의 절’이라는 의미로 동국사로 개명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에 편입,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국내에 세워진 포교소 및 사찰만 해도 1,000여개가 넘었다. 그러나 광복과 더불어 일제잔재 청산 시류를 타고 대부분 철거 되거나 용도 변경으로 자취를 감춤에 따라 동국사 역시 김영삼 정부 시절 철거가 검토되기도 했지만 조계종 측에 대한 막대한 보상비 문제로 흐지부지되었던 것은 이제 와서는 다행스런 일이 되었다 할 것이다.
참사문(懺謝文)
사찰 경내에는 1992년도 일본 조동종에서 세운 두 개의 참사문 비(碑)가 있다. 각각 일본어 원문과 한글 번역문으로 새겨진 이 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폭거를 자행했고 조선을 종속시켜 국가와 민족의 말살을 획책했으며 인류애를 펼쳐야 할 종문(조동종)이 오히려 조선 침탈의 첨병이 되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는바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것, 더불어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고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친다”는 내용으로서 아직도 식민지배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별개로 조동종 종단에서 나서서 참회를 해왔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동국사 기록를 찾아
종걸 스님은 2005년도에 동국사에 부임된 이후 사찰에 관한 기록이 전무함을 알고 혹시 일본에는 기록이 있지 않을까 하여 일본 조동청(조동종 본산)에 찾아갔다. 처음엔 비협조적이었던 조동청에서도 종걸 스님이 계속 버티자 마음이 움직여 여러 자료를 보여주었는데 그 수많은 자료들 속에서 비록 한 페이지 분량이지만 동국사의 건립 기록과 초창기 사진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왔다. 이때 알게 된 아오모리현 소재 조동종 운상사(雲祥寺)주지인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스님은 이후 적극적으로 군산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해 주었고 2011년에는 사절단을 꾸려 동국사를 방문, 이치노헤와 종걸 스님을 중심으로 ‘대한역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이후 종걸 스님은 군산시 관련 자료나 사진 한 장이라도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지체 없이 일본을 방문, 적극적으로 손에 넣었다.
소녀상의 눈물
사찰 경내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는 참사문비를 뒤로 하고 서있는 맨발의 소녀상이다. 이 소녀상은 지난 2015년도, 시민들로 구성된 건립위원회에서 제작한 것으로 뜻을 같이한 민간인들의 십시일반 후원으로 성사되었다. 하지만 동상 제작 후 막상 건립할 장소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근대역사박물관 뜰과 조선은행 뒤 공원, 구 경찰서 자리, 바닷가 등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지만 시 측에서 난색을 표한 것이다. 관에서 부지를 선정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때문인 듯하나 꽃봉오리의 나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무참히 짓밟힌 그 소녀들이 정작 오늘날 내 땅에서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종걸 스님은 가슴이 메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소녀상은 결국 동국사에 세워졌다. 종걸 스님의 뜻에 다른 것이다. 제막식 때에는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고 각계 인사들의 축하 인사말이 이어졌다. 서 있을 자리도 찾지 못했던 소녀의 제막식행사,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의 운상사 주지 이치노헤 스님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자국 내에서 후원인을 모집, 1,000만원의 성금을 들고 찾아와 그간 수집했던 자료와 함께 기증하기 위해서다. 이치노헤 스님은 종교를 떠나 인권과 평화, 환경운동 등 인류 행복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단체의 이사장으로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가해국으로서 일본의 죄를 사죄하는 진정성을 보여준 것인데 정작 제나라 땅에서조차 홀대받는 소녀상이 눈물을 삼키며 어떤 감회를 가졌을지 부끄러운 일이다.
참사문비 옆 종각에 매달린 범종(梵鐘)에 새겨진 글귀를 명확히 확인한 사람은 드물듯하다.
‘황(皇)의 은덕이 영원히 미치게 하니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복이 일본이나 조선이나 굳건히 될 것이다’ 내선일체 야욕을 드러낸 분노어린 범종이지만 철거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 또한 먼 후대에까지 사실을 증명하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증거 자료를 없애고 역사를 잊어간다면 우리는 언젠가 또 경술국치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 종걸 스님의 생각이다.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
지난 6월 4일, 동국사 아래쪽 대로변에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이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연면적 1,868m2의 지상 3층 규모로 전시실과 세미나실을 갖췄으며 약 300여점의 일제강점기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이는 대한역사연구소에서 수장하고 있던 약 10,000여점(이치노헤 스님 1,500여점/종걸 스님 8,500여점)의 자료 중 불과 0.3% 분량으로서 전시관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이 수집품들은 대부분 수탈과 관련된 증거 자료들과 독립운동가 유물들로서 생전 처음 보는 영상물 등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희귀 자료들도 있다. 역사관 김부식 관장에 따르면 역사관 위치가 근대역사탐방 코스와 연계되어 있어 다양한 연령층에서 가족단위 등 하루 평균 150~200여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면서 특히 타 지역 근대역사관련 연구자들의 발길도 늘고 있다 한다.
전국 최초 이완용 친필과 부인 양주 조씨의 관(棺)뚜껑 전시
역사관에서는 11월 29일부터 내년 2월까지 이완용의 친필과 전국 최초 그 부인의 관(棺)뚜껑 전시를 갖는다. ‘平生所學爲何事 後世有人知此心(평생소학위하사 후세유인지차심)’ 이라 쓴 글씨는 ‘평생 배운 바를 어디에 쓸 것인가, 훗날 이 마음 알아주는 이 있을 것이다’란 뜻으로 이 글을 쓸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의 광복은 영원히 불가할 것으로 봄으로써 일본의 조선 종속을 자신의 치적(?)으로 여겼던 듯하다.
또한 부인인 양주 조씨 관 뚜껑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이 이완용과 합장되어 있던 묘를 파헤쳐 유골은 강경천에 뿌리고 모두 불태웠다. 이완용 관 뚜껑은 원광대학교에서 보관했으나 후손 이병도 박사가 소각했고, 부인의 관 뚜껑은 불에 타던 중 누군가가 후에 역사적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해 반출해 보관하다가 최근 대한역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