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슴엔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가슴아파하던 시절의 상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은 3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우리의 삶을 짓밟았고, 생활터전과 문화를 자기들 것으로 채웠다. 그때 아픔을 지금도 보여주고 있는 곳이 전북 군산이다.
소화 9년(1934)에 촬영한 위 사진은 당시 군산부(府) 사이와이마치(幸町)의 ‘전북자전차점’(全北自轉車店) 주인과 종업원들이다. 일제강점기 관공서와 수탈의 현장 등 안타까운 장면만 봐오다가 사람 냄새나는 사진을 보니 고향 어른들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사진을 제공해준 이종남(78세) 어른은 자신의 부친(이규철)이 1932년에 개업한 ‘자전거포’라고 귀띔했다. 이규철은 지난 기사 ‘군산경마장 폭발사건’(1945년)으로 화재가 발생하자 점포를 비워두고 현장으로 달려가 인명을 구조하다 순직한 민간 의용소방대원이었다.
유려한 필치의 예서(隸書)체 간판글씨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획에 힘이 실려 있고, 변화와 ‘여백의 미(美)’가 살아있어 전시실에 전시된 서예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 유명 서예가의 현판 글씨가 떠오르기도 한다. 간판 상단에는 ‘중고자전차판매’라고 쓴 한자가 희미하게 보이고, 중간에는 상호, 하단엔 전화번호(530번)가 적혀 있다. 이종남 어른은 “당시 전화를 취급하는 군산부 우체국에 전화기가 부족해 돈을 주고도 구매할 수 없어 이웃집과 함께 사용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간판이 ‘全北’으로 시작해서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가게에서 판매할 자전거와 발전기, 라이트 등을 주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수입해왔다는 얘기를 듣고 풀렸다. 가게는 살림집까지 합해서 10평 남짓 됐지만, 거래 규모는 전북을 대표할 정도로 컸다는 것.
관옥민자 독창회 포스터(좌)와 내셔널 회사가 제작한 30년대 광고판(우)
자전거포가 들어선 거리(幸町)는 일본 배에 쌀을 선적하는 부두가 한눈에 보이는 지금의 장미동(藏米洞). 크고 작은 방앗간과 쌀 창고가 많은 ‘정미소 거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게 앞 로터리는 강호정(현 죽성로), 본정통(현 해망로), 째보선창, 내항으로 갈라지는 군산의 교통 중심지였다. 코흘리개 시절 뛰놀았던 동네를 찾아간 이종남 어른은 “내가 어렸을 때는 부근에 붕어와 미꾸라지 등이 헤엄치고 다니는 개울이 흘렀고, 밤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했었다”며 “도로가 무척 넓었는데 좁아졌고, 사람도 많이 다녔는데 너무 한산하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뒷맛이 씁쓸했던 ‘독창회 포스터’
자전거포 입구 오른쪽 기둥에 걸린 간판 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밑으로 내려쓴 일어(ナショナルランプ)와 한자(乾電池)는 ‘내셔널 램프 건전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상단의 한자 ‘경제제일(經濟第一)’은 무엇을 뜻하는 글귀인지 얼른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이종남 어른은 군산에서 제작한 간판이 아니고, 자전거 부속(전등, 건전지, 발전기 등)을 만드는 회사(내셔널)에서 보내준 광고판이라고 했다. 설명을 듣는 순간 ‘경제적인 상품’, 즉 ‘값이 저렴하고 품질이 으뜸인 알뜰 상품’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제목과 연예인 사진이 들어간 극장 포스터는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전거포 진열장 상단의 포스터를 발견하는 순간 호기심이 동하면서 가슴이 뛰었다. 나운규의 <아리랑>(1926), 아니면 조선 악극단 공연 포스터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확대해서 보니 일본 여류 성악가 관옥민자(関屋敏子) 독창회가 14일 오후 7시 군산 공회당에서 열린다고 적혀 있었다. 1934년 당시 군산부 인구가 전주를 앞섰다고 하지만, 일본에서 유명한 성악가 독창회를 군산에서 개최하다니 놀라웠다. 네이버 검색에서 “소프라노 가수 관옥민자 일행이 황군위문(皇軍慰問)의 귀도(歸途)를 이용하여 ‘부민관’에서 공연한다.”는 1939년 8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조선, 중국, 일본인이 섞여 사는 군산에서 주인 노릇은 점령군처럼 들어온 일인들이 했음을 알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 지금쯤은 팔순 노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가 사진사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자전거에 가려있어 아쉬웠다. 조선 백성 대부분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던 1930년대 군산의 아이들 옷차림은 어땠는지 가늠할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였다.
쌀이 산처럼 쌓여 있는 1930년대 군산항 부두. 지금의 내항이다
사진을 촬영한 1934년은 제3차축항공사가 완공(1916~1933)된 이듬해로 창고마다 흰쌀이 산을 이루면서 일제의 쌀 수탈이 200만 석을 돌파하였고, 인구도 전주보다 1만이 많은 4만을 기록한 해여서 당시 군산이 호경기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웃엔 누가 살았는지 궁금했는데, 동해루(東海樓)와 함께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화요리점으로 알려진 평화원(平和園)이 우측에 있었다고 한다. 평화원은 몇 년 후 영화동으로 이사했고, 주인 우계청(于桂淸)은 1942년 군산 화교소학교 회장과 교장을 지냈다. 재미있는 것은 평화원 주인 우계청이 사진을 제공한 이종남 어른의 대부(代父)였고, 지금은 부인이 다른 화교의 대모(代母)가 되어 끈끈히 지내고 있다는 것.
자건거포 단골은 식당, 주조장, 쌀가게 등
이종남 어른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달력을 오려 자전거에 번호를 붙였다”며 “영업이 잘될 때는 자전거를 30대 넘게 보유하였고, 매매도 하고 대여도 해주었다”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당시 군산에 자전거 수리소는 많았으나 파는 가게는 3~4곳 정도 되었다고.
일제강점기 (榮町). 길 끄트머리 어디쯤 강경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골손님은 영정(榮町)파출소 앞 농방(가구) 골목 입구에 있던 ‘강경옥’이었다고 한다. 강경옥은 시내에서 맛이 좋기로 소문난 냉면집으로 끼니때가 되면 정신없이 바빴는데, 자전거가 고가(高價)여서 구매는 못하고 대여해서 배달하러 다녔다고 한다. 강경옥 외에도 부근의 소규모 방앗간과 쌀가게, 주조장(양조장) 등에서 자전거를 대여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쌀은 짐자전거에 싣고 다녔고, 양조장은 나무로 만든 술통(한 말)에 막걸리를 담아 자전거로 배달했는데, 술통을 10개씩 싣고 다니는 배달부도 있었단다. 이종남 어른은 “자전거를 팔아 남기는 이익도 좋았지만, 수리를 해주거나 빌려주고 받는 수입도 짭짤했다”고 말했다. 시내도 대부분 비포장 길이고 험해서 타이어 ‘펑크’가 자주 났고, 자전거가 지금처럼 튼튼하지 못해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입학도 못하고 자전거포에 취직
사진 맨 오른쪽 하얀 양복 차림의 젊은이가 주인(이규철)으로 당시 나이는 23세. 사장님이어서 그런지 나이보다 한참 어른스러워 보인다. 종업원들 표정이 다양하고 자세와 옷차림이 자유분방해서 부담을 덜어준다. 친구 결혼기념사진처럼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복에 국민복, 양복, 일본식 ‘당꼬바지’(탄광바지) 등 옷차림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머리가 모두 하이칼라여서 군산의 모더니스트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림새만 보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의류를 염색해서 입는 게 유행이던 1950년대 어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서울 태생인 이규철은 외아들로 어렸을 때 사촌 형제들을 따라 군산으로 내려왔다. 옥구군 회현면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몇 년 살다가 사촌들은 모두 떠나고 이규철만 군산에 남는다. 일본인 자전거포 주인 눈에 들었기 때문. 이규철은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도 못하고 자전거포에 들어가 기술을 익혔다. 자전거가 비싼데다, 자전거포 종업원이었던 엄복동(1892~1951)이 자전거경주 때마다 일본 선수를 제치고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어서 자전거 수리공도 사윗감으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종업원이 넷이나 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 수리는 물론, 부속 재생과 도금도 해야 하고, 거래처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배달을 다녔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1950~1960년대 쌀가게에 전속지게꾼이 상주했던 것처럼.
일제강점기에도 자전거포는 허가를 받아야 개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고품을 취급하는 모든 업소는 경찰서에서 받은 허가증을 액자에 넣어 가게에 걸어놓고 신줏단지처럼 모셨다고. ‘고물상 허가제’는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지다가 1990년대 초 ‘신고제’로 바뀌었다.
열심히 벌어 중심지 상가건물 사들여...그러나 순직으로 생을 마감
일제가 계획적으로 조성한 도시 군산은 1년이 멀다하고 새로운 도로들이 개통되면서 시가지도 더욱 확장되었다. 그중 명치정과 이어지는 ‘소화통’(중앙로 2가)은 최근까지 군산의 관문 노릇을 했다. 따라서 이규철이 운영하는 전북자전차점도 나날이 번창했다. 무학(無學)이었던 이규철은 바쁜 중에도 틈틈이 책을 가까이하면서 한학을 깨우쳤다.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군산의 중심지가 이동할 것을 예견하고 모아놓은 돈으로 중앙로 2가에 위치한 2층 상가건물을 사들인다. 이규철은 1944년 장미동에서 중앙로 2가로 이사하여 새로운 각오로 상호를 ‘아라이(アラヰ)자전차점’으로 내건다. 해방(1945)이 되자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로 ‘조화(朝和)자전차점’으로 다시 바꾼다. ‘朝’는 한국을, ‘和’는 일본을 뜻한다고.
“아버지는 종업원들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어지간한 부속은 재생해서 사용했어요. 녹슨 부속은 집에 시설을 갖춰놓고 도금을 했을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나셨죠. 타이어 구멍을 때울 때 쓰는 고무풀도 생고무를 사다가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배웠습니다. ‘신나’를 섞어 만드는 법을 지금도 기억하죠.”
그러나 이규철은 그해(1945) 11월 일제가 남기고 떠난 포탄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화재현장에서 인명을 구조하다가 33살 나이로 의롭게 순직하였다. 임신한 아내를 남겨놓고 홀연히 떠나다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민다. 이 모두 ‘식민지 잔재’, ‘식민지 아픔’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