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색의 춤, 화가 ‘고현’
- 순간의 느낌을 색으로 만든다
“유화는 인생과 같아요.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것.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만 마음은 언제나 타인일 수 있다는 것. 욕심을 내면 후회한다는 것. 천개의 얼굴을 가졌지만 바탕은 하나라는 것.’ 나의 성숙을 위하여 그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10년만의 중앙대 미대 졸업, 그리고 마흔 넘어 다시 잡은 붓. 자칫 꺾어질 뻔 했던 화가 ‘고현’이 두 번째 전람회를 열면서 한층 성숙해진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말처럼 ‘손끝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그린다.’는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 아닐까.
누구에겐들 청춘이 없었겠냐만 그녀는 한 때 그림에 꽂혀 반항하고 좌절했다. 불꽃같았던 시절이 지났고 그녀의 가슴에 하얀 재만 남았다. 지나고 나면 허망한 것,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청춘이 지나고 중년이 찾아왔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딸을 키웠던 세월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공허했고 삶의 목적을 잃어갔다.
그 위험한 시대를 지나려면 탈출구가 필요했다. 생활 속에 잠겨 미뤘던 늦깎이 공부를 마쳤다. 그러자 미술을 전공한 책임감이 뒤따라왔다. 86학번이니 벌써 중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오늘의 그녀는 너무나도 그리고 싶었기에 캔버스 위에서 원색의 춤을 춘다.
단호함, 집요함 그리고 순응의 과정 담아내
“사람들은 작가의 바람에 따라 작품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걸 바라본다는 걸 이번 전람회에서 깨달았어요.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간극을 좁혀 나가는 일, 그게 제가 가야할 인생이지요.” 간간이 정기회에서 얼굴을 보여주었던 고현 작가. 일상의 삶과 경험 속에서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여러 표현 기법을 통하여 이미지로 만들어왔던 터였다.
올해 내보인 작품들도 다양한 표현 기법과 다작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물론 유화를 기본으로 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몽환적인 수채화 기법도 눈에 띄었다.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세계가 펼쳐졌다. “제 스스로의 변화된 모습에 더해 새로운 지식 세계를 섭렵하면서 ‘세상과 다가가거나 밖으로 나가고 싶은 열망’을 표현해 내려고 했어요.”
그녀의 딸(이전우)이 전람회 안내장에 “어떤 고요는 언젠가의 나 같다. 내가 보지 못하는 슬픔, 내가 알지 못하는 기쁨…”이라는 말과 “찰나를 믿으세요? 이런 게 슬픔이고 기쁨이라면 저는 떠나고 말겠어요. 기쁨도 여기에 두고, 슬픔도 여기에 두고 갈게요”라고 썼던 구절이 생각났다.
그랬다. 그녀가 내놓은 ‘군산 풍경’이나 ‘꺾어진 꽃’ 등의 작품을 보면서 왜 이렇게 단호할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가슴을 다독이는 노란색의 물결을 보면서 안도했다.
보색의 이질감과 그 안에서 뭔가를 감싸 안는 듯 착각에 빠졌으며, 원색의 대비가 화면을 압도하다가 느닷없는 정물로 바뀌는 이질감을 받아들여야 했다. 고 현, 그녀의 작품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굵직한 질감 속에서 내면의 아픔·슬픔·외로움·아스라함 등에 젖어 있다. “꿈이 많아서 헛되었던 자신의 열망에게 ‘소금간’이라는 무형의 형벌을 내리려는 한다.”는 그녀의 단호함 그리고 집요함과 반항, 혹은 순응의 과정이 그녀의 작품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나의 숨구멍, 혹은 나의 호흡기
“한 관람객이 ‘볼 때마다 다르다’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리려는 이미지 색을 내기 위하여 바탕에서부터 다양한 붓질을 해야 하는 수고가 따릅니다. 그런 기본에 충실하려고 하지요.” 그녀는 사람들이 작품을 보는 방향이나 시각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지는, 그래서 다양하게 소통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내가 바라보는 사물,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이미지, 순간순간의 느낌에 따라 작품의 주제도 변할 것 같거든요. 말하자면 고현만이 가진 특징은 있을 수 있지만 나 자신이 그림 안에서 빠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화가는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기에 표현하는 시각이 다를 수 있고 그림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그녀는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바라보기와 표현하기가 다르기에 ‘어떤 작업을 할 건가.’의 문제이며, 나의 성숙한 정도에 따라 작품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될 거라고 했다.
“제 작품은 지방에서 그리는 작가들의 느낌(약간 칙칙하다고 할까, 과감한 표현의 양식이 아니라서 촌스럽다고 통칭하는)도 있으면서 보색 대비 등 과감하게 색감을 쓰는 특징이 있어요. 또 하나는 ‘나의 숨구멍, 혹은 그림 속의 나의 호흡기’ 비슷한 기호 혹은 암호 장치를 해놓기도 합니다. 나만의 성향이지요.”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림마다 그녀만의 행위를 한다. 그리고 작품의 결과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림은 손으로만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영향을 받은 건 ‘구성주의’인데, 과정 과정에서 순간마다 발현되는 감정 상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즉시성에 주목하고 있거든요.”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을 그리는 순간순간 느끼게 되며, 그런 이미지를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색, 여러 가지 표현 양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고현 작가처럼 원색을 많이 쓰는 특이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보여줌으로써 위안을 주는 게 작가인데, 나는 그림이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해요. 내가 변하는 것처럼 그림도 변했으면 좋겠고,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보색 대비와 3원색의 춤
그녀는 술산초와 임피중을 거쳐 남성여고를 거쳐 전주대 미술교육과를 다니다가 다시 공부해서 중앙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미술선생님과의 인연이 그림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군산대에서 아동가족학 석사, 같은 대학 유아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지만 다시 아동가족학 박사과정을 다닐 정도로 지식욕구가 넘친다.
청소년 상담을 하면서 캔버스에 마주 앉는 그녀. 매일 아침 산북동 화실로 출근하게 만든 건 ‘그림을 통해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간다.’는 긍정 에너지 때문 아닐까. 그녀는 ‘인물화’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도와준 분들 욕구가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거였고, 나 또한 보답하고픈 양식이 초상화였어요. 그걸 하면서 어느 순간에 몰입이 되었고 행복했거든요.”
그녀는 가장 좋은 조화는 ‘보색의 조화’이고, 가장 안 좋은 건 ‘보색의 부조화’라고 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3원색의 세계에 도전하는 그녀의 용기가 부럽다. 그리고 원색이 춤을 추고 차갑고 따뜻한 보색이 대비되는 다음 작품 세계가 벌써 기대된다.
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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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수송동 신평길 12, 101동 4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