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각 시군마다, 작게는 동 리마다 축제를 발굴하느라고 야단법석이다. 군산시에서는 축제위원회까지 구성하여 몇 년째 노심초사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해산물이니, 벚꽃이니 해서 몇 개의 고만고만한 축제가 있지만 전국적으로 내놓을만한 면모는 못된다. 괜찮은 축제가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새만금 방조제가 개통되고 나서 더 심해졌다. 관광객은 몰려오는데 오는 이들마다 볼거리가 없다고 푸념하니, 시정을 경영하는 분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까지 ‘축제 만들기’가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자리잡아가고 있다.
2010년 방조제 개통에 맞추어 전라북도는 신시도 앞 매립지에서 ‘깃발 축제’를 열었다. 화려한 깃발 수천 개가 해풍에 휘날렸지만, 막상 보는 이들은 황량한 매립지에서 이 무슨 요상한 퍼포먼스인가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까운 예산만 탕진했다. 반면에 김제의 지평선축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제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로 14회이니 그리 긴 연륜도 아니다. 이 둘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는 실패했고 하나는 성공했는가?
축제는 반드시 뿌리가 있어야 한다. 역사성이 있어야 하고, 그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이 드러나도록 차별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해당 주민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즉, 공동체의식이 축제의 저변에 흘러야 한다. 깃발 축제는 이런 여러 요건들 중에 그 어느 것 하나 갖춘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평선 축제는 달랐다. 벽골제의 유구한 역사와 농경문화 발상지로서의 문화적 배경, 쌍룡놀이나 입석 줄다리기 등의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공동체놀이 등을 잘 버무려 놓았다.
지평선 축제는 제사부터 시작한다. 예부터 제사에는 반드시 놀이가 수반되었다. 아니 제사와 놀이의 구분이 없었다고나 할까? 신과 인간의 만남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신 내림’을 감사하고, 그 분을 극진히 대접하기 위해서는 춤과 노래, 풍악, 연희 등이 펼쳐진다. 서양의 내놓으라하는 카니발과 페스티벌은 다 제사에서 유래되었다.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은 다 놀이가 수반된 제사였다. 고대 마한에서는 소도(蘇塗)에서 천군이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마한은 지금의 호남지방인데, 학자들에 의하면 호남의 당산제가 곧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니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고대 제사는 단절되지 않고 무속의 ‘굿’으로 전승되어 왔는데, 고려시대에는 불교식으로,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식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동신제(洞神祭)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방방곡곡 없는 곳이 없었다. 동신제는 호남지방에서는 당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쓰였지만, 그 대상 신이나 목적, 그리고 지방에 따라 산신당, 서낭당, 성황당, 국사당, 용신당, 영신당 등 가지가지였다. 주민들의 대동단결을 우려했던 일제는 동신제를 금했지만 상당수가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산업화가 가속되고,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과 연관되어 미신타파의 명목 하에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지난 정월 대보름에 중동 당산제가 열렸다. 제당은 원래 서래산(중동 돌산)에 있었는데, 도시개발로 파괴되어 없어질 뻔했다. 그러자 이를 아쉬워한 마을 어르신들께서 197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한다. 군산 도심에 남은 유일한 제당이요, 동신제이지만 초라하다. 제당은 특이하게도 경로당 옥상에 마련되어 있었다. 딱히 이전할 위치도 비용도 없다보니 그리되었으리라. 당산제가 끝나 점심 먹고 서래포구에서 용왕제가 열렸다. 이 또한 조촐하다. 그저 돼지머리 놓고 절하면 그만이다. 식전에 걸립패가 풍악을 울렸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딴 동네 여성농악대를 초빙해왔다.
그래도 시장, 국회의원, 시의원 등 빈객은 많이 오셨다. 동네 어르신들 숙원은 번듯한 제당 하나 짓는 것인데,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문화재적인 가치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고증도 안 되고, 보전된 유물도 몇 장의 무속화(巫俗畵)가 전부인데 그나마 근년에 그린 것들이다. 제례양식도 평범한 유교식이라서 내세울 것이 없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만 남았다.
군산 인근에서 제대로 된 동신제로는 부여의 ‘은산별신제’(중요무형문화재 9호)가 있다. 백제 장군을 주신으로 모시는데, 마을의 풍요와 무병을 기원하는 축제로 거창하다. 또 하나는 부안의 ‘위도 띠뱃놀이’(중요무형문화제 82-3호)이다. 띠뱃놀이는 용왕굿을 할 때 짚으로 제작한 띠배를 바다에 띄워 보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둘 다 원형을 잘 보전하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대단한 축제다. 제사 규모는 이들만 못하지만 선유도에 있는 오룡당(五龍堂)은 1123년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이 서해안을 여행하고 기록한 <고려도경>에도 나와 있으니, 천년 세월 서해를 지켜온 셈이다.
지역문화를 잘 가꾸어 관광상품화에 성공한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동신제를 ‘마츠리(祭り)’라고 한다. 역사도 수 백 년이 넘는 곳들이 많고, 동네마다 없는 곳이 없다. 도쿄, 오사카, 교토 등 대도시의 마츠리는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마츠리도 실상은 우리의 동신제와 유사했고 기능도 같았다. 이것이 현대화되면서 시민과 관광객이 참여하는 페스티벌로 발전했다. 왜 우리는 그 많은 동신제를 다 멸절시키고,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축제로 발전시키지 못했나? 되짚어볼수록 아쉬움이 남는다.
군산의 ‘축제 만들기’는 방향을 잘못 잡아가고 있다. 대표 축제 발굴한답시고 남의 동네, 남의 나라 성공한 사례 열심히 베끼고 짜깁기해봤자 돈과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딴 지방에서 나는 음식물은 사다 먹을 수 있겠지만, 축제는 반드시 우리 것이어야 한다. 얼이 깃들지 않은 축제는 지역의 문화 수준만 떨어뜨린다. 군산이 국제도시로 비상하려면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은산별신제’, ‘위도 띠뱃놀이’, ‘강릉 단오제’ 등의 웅장한 동신제는 아니지만 군산에는 괜찮은 무형문화재가 있다. ‘앉은 굿’(전라북도 무형문화재 26호 최갑선)과 ‘넋풀이 굿’(전라북도 무형문화재 38호 하진순)이 그것이다. 둘 다 원형이 잘 보전된 호남을 대표하는 굿으로, 구연되는 무가(巫歌)와 무악(巫樂)은 그 스토리나 예술성에 있어서 군산이 세계에 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전통문화가 아닌가 한다. 문제는 이런 문화재를 어떻게 축제로 승화시킬 것이냐이다. 무형문화재는 학술적 가치가 높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전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런 차원과는 별도로 원래의 기능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국의 굿은 풍요다산, 역병이나 재난예방, 소원성취 등을 목적으로 하지만, 독특하게 한풀이, 즉 해원(解寃)의 더 기능이 있다. 망자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해원인데, 군산의 ‘넋풀이 굿’이 대표적이다.
아마 중동 당산제나 서래포구의 용왕제도 오리지널은 굿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해안가의 동신제가 다 그렇기 때문이다. 그것이 축소되어 지금처럼 축문을 읽고 절하는 가례 수준으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동 당산제는 아쉽게도 박제된 마을제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 의미를 찾지 못한다. 특히 다음 세대는 더 그렇다.
군산의 ‘축제 만들기’는 ‘없던 것 새로 만들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남의 것 베끼기’는 더더욱 안 된다. ‘ 있던 것 살리기’가 되어야 한다. 무작정 무속문화를 계승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축제를 기획함에 있어서는 먼저 자기 지역의 문화적 자산을 평가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해 둔다.
바다, 섬, 배, 항구, 난파선, 표류, 진포대첩, 항일, 식민지, 미군주둔, 간척, 바람, 해일, 방조제, 풍어, 어패류, 고래, 용왕, 해원, 굿, 제사, 춤, 타악기 등을 실핏줄처럼 연결하여 축제의 근간을 만들어야 한다. 역동적인 해양문화와 귀를 때리는 비트음악, 그리고 신과의 합일에 이르는 엑스터시가 축제의 소재다. 일본인들이 남긴 잔재를 이용하여 옛 추억이나 되살리려는 문화정책은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 한다. 축제는 생명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