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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의 삶,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스러워요!” 군산시 나운동 윤태복씨 리어카행상 3년 만에 내 집 마련
글 : 조종안 /
2019.01.01 11:07:5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우리 엄마의 삶,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스러워요!”

군산시 나운동 윤태복씨

리어카행상 3년 만에 내 집 마련

 

군산시 나운동에 사는 윤태복(72)씨. 그의 고향은 경북 청송이다. 산간벽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의붓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직업이 미장이였던 의붓아버지는 까닭도 없이 어린 태복에게 매질을 가했다. 의붓아버지의 병적인 폭력에 시달리던 그는 열세 살 때 가출. 강원도 탄광촌과 대구, 안동 등지 시장판을 떠돌며 잡일, 행상, 식모살이 등을 했다.  

 


 

 

학력은 초등학교 3개월 다닌 게 전부. 월사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의붓아버지 미장일과 개간지 밭농사를 돕는다. 호박, 들깨, 감자, 정구지 등을 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 지내다가 엄마를 졸라 재건중학교(야간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곧 그만둬야 했다. 한글도 모르는데 영어, 수학 과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것. 

 

성당에 다니던 그는 열아홉에 엄마의 강권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혼례를 올린다. 장래 수녀가 되는 게 꿈이었으나 불가능함을 깨닫고 엄마의 뜻을 따른다. 고행은 결혼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이 청송에서 고무신가게 한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가게가 있는 청송에 신혼살림을 차려야 하는데 산골짝에서 시작했던 것, 남편도 고무신가게 진짜 주인은 동생이라고 고백했다.

 

딸 둘 낳을 때까지 남편은 빚만 지고 돌아다녔다. 애들 키우느라 행상도 못 나가고 이종사촌 언니네 집 청소, 빨래 등을 해주며 끼니를 해결했다. 윤씨는 "신랑이 밉다고 굶길 수 없어 밥을 한 그릇 더 얻어오고 그랬다. 왕복 20리(8km) 넘는 길을 큰딸은 업고, 둘째는 보듬고 오가면서 수챗구멍에 콱 빠져 죽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고 아픈 추억을 떠올린다.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 때 전북 군산에 정착, 리어카행상 하면서 틈틈이 글을 익혔고, 오늘의 부(富)를 이뤘다. 그는 "열두 살 되던 해 어느 봄날 성당에 갔다가 수녀님이 수북하게 담아준 흰쌀밥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형설지공'으로 써 내려간 회고록과 구술을 바탕으로 땀 흘려 일궈온 인생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전북 군산에서 새로운 삶 시작

 

윤씨는 사기결혼 충격으로 유산을 거듭한다. 그 속에서도 참깨장사, 고추장사, 생닭장사, 연탄장사 등을 한다. 임신한 몸으로 공사판에 함바집을 열었다가 몇 개월 식대를 고스란히 떼이기도 한다. 궁여지책 끝에 언니에게 가기로 마음을 정한다. 형부가 경찰인데 군산으로 발령이 났던 것. 당시 경북 안동에서 군산까지는 꼬박 이틀 길. 기차도 여러 번 갈아타야 했다. 그래도 군산에 가면 뭔가 희망이 보일 것 같았다

 

"하루는 울화가 터져 남편에게 '당신하고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독하게 한마디 쏟아내고는 옷이랑 기저귀랑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이고 애들을 앞세워 집을 나왔어요. 내가 살아야 아이들도 키울 수 있겠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작은 시누이를 찾아가 '읍내에 잠깐 다녀오겠으니 우리 일화(큰딸) 좀 데리고 있으라'며 맡기고 돌 지난 둘째만 등에 업고 나왔습니다.

 


 

 

안동역으로 가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기차에서도 많이 울었어요. 내가 어렸을 때 의붓아버지에게 매 맞고 서러움 당했는데 큰딸도 엄마와 떨어져 지내면서 나처럼 고생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꾸 눈물이 나왔어요. 큰딸에게 미안하다고 마음으로 사과하고 돈 많이 벌어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도 했죠."

 

윤씨는 언니가 사는 창성동에 정착한다. 그리고 언니의 권유로 한복학원에 다닌다. 취향에 맞지 않았지만 '한복 기술을 배워보라'며 학원에 등록까지 해주는 언니가 너무나 고마웠던 것.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바느질과 종이에 그리는 법은 그런대로 익혔으나 치수(사이즈) 단위인 미터(m)와 센티미터(cm)는 헷갈렸다. 편지도 읽는 게 서툴고 산수도 못 하는 처지에 영문으로 갈겨쓴 치수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언니는 아기를 잘 돌봐줬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동생이 한복을 잘 만든다고 소문내고 다녔다. 그런 언니를 봐서라도 열심히 배워야 하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럭저럭 한 달이 지날 때쯤 언니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며 그만 다니겠다고 하자 언니는 '그럼 안동(친정)으로 가라'며 1만 원을 손에 쥐여줬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과일·채소 행상

 

친정으로 가던 윤씨는 기차에서 방향을 다시 정한다. 알량한 자존심이 '친정행'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대구역에서 내린 그는 구경삼아 재래시장에 들렀다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스테인리스 그릇 도매상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릇들을 보는 순간, '저걸 군산으로 가져다 팔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망설일 게 없었다. 언니가 준 1만 원으로 몽땅 그릇을 구입, 군산행 열차에 오른다.

 

"여러 종류의 그릇을 단단히 포장해서 머리에 이고, 군산까지 오는데 무거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었습니다. 유과꼬시장(명산동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순식간에 동났거든요. 1/3쯤 팔았을 때 본전 챙기고, 나머지도 다 팔고 구시장 그릇 도매상에 갔더니 대구보다 더 싸게 주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그릇장사 재미있게 했죠. 그때 스텐 그릇은 놋그릇보다 가볍고 뽀독뽀독해서 아줌마들이 참 좋아했어요.

 


 

 

하루는 그릇 장사할 때 옆에서 옥수수 팔던 아줌마가 생각났습니다. 그릇보다 가벼운 옥수수 장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아 언니에게 상의했더니 군산역 새벽시장에 가면 싸게 많이 살 수 있다고 알려주더라고요. 그렇게 옥수수 장사를 시작, 하루에 네 접도 팔고 다섯 접도 팔고 그랬어요. 찐 옥수수 한 접(100개) 팔면 쌀 두 되 값(160원) 남았으니 하루에 700~800원씩 번 셈이죠. 그때 하루 벌이로는 큰돈이었습니다."

 

여름에는 고구마도 쪄서 옥수수와 함께 팔았다. 가을에는 감 행상을 하고, 겨울에는 돼지고기를 떼다 팔았다. 이듬해 봄에는 언니 소개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노점상 하면서 청과시장 중매인을 알게 되고 거래도 트였다. 중간상을 거치지 않으니 이익도 많이 남았다. 리어카도 한 대 마련한다. 오전에 과일, 채소 등을 한 리어카 팔고 집에 들어가 아기에게 젖 주고 오후 장사를 시작했다. 고생은 됐지만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행상 1년 만에 전세방 마련

 

윤씨는 "하루는 애기에게 젖을 주고 배가 고파 부엌에 들어갔더니 언니가 형부랑 조카들 먹으라고 해놓은 밥이 솥에 가득 있었다. 배고픈 참에 조금씩 먹다 보니 바닥이 드러났다. 나이가 스물넷이고 젖먹이 아이까지 있었으니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때였지만, 어떻게 그 많은 밥을 한꺼번에 먹어치웠는지 모르겠다"라며 옛일들을 떠올린다.

 

“장사가 안돼서 하제(포구)로 조개잡이도 다녔는데, 그것도 기술이 필요한지 신통치 않더라고요. 하루는 배추와 무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아침 8시부터 시내를 돌며 배추 사라고 외쳤지만 한 포기도 못 팔았어요. 애기가 싼 오줌이 흘러내려 고무신은 흥건하고, 배는 고프고 삼학동 언덕길을 올라갈 수 없어 신세 한탄을 하는데 손님이 배추 가격을 묻더라고요. 

 


 

 

누가 달라고 하면 거저라도 주고 싶었던 때라 큰 바구니에 몽땅 담아줬죠. 그랬더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가와 서로 사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리어카를 비웠죠.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나는 다음에도 이 시간에 이 자리에서 장사해야겠다는 것. 또 하나는 살기 바쁘다고 성당에 나가지 않아서 벌을 받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길로 성당에 가서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일을 잘 지키게 해주시고, 또 주일을 지킬 때는 하느님 앞에 성금을 바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날 이후 장사가 더 잘되고 자리도 잡아갔습니다. 그때까지 창성동 언니 집에서 살았는데 5만 원짜리 전세방을 얻어 이사했지요. 언니가 이사 선물이라며 쌀 닷 되를 싸주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생애 처음으로 내 집 장만하다

 

이사하고 얼마 후 작은 시누이에게 맡겼던 큰딸을 어머니가 데려왔다. 아기가 얼마나 눈칫밥을 먹었는지 사람만 보면 구석에 숨어 눈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녁 먹고 곤하게 잠든 딸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윤씨는 앞으로는 절대 아이와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남편도 군산으로 온다. 쳐다보기도 싫은 얼굴이지만, 형부가 취직 약속하며 함께 지낼 것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조개잡이 배 선원으로 취직된다. 그러나 뱃멀미 때문에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두 번째 직장은 해망동 뱃공장(조선소). 그곳 역시 겨울이 다가오자 일감이 없어 그만둔다. 결국 남편은 윤씨의 과일장사 돕는 일로 새 삶을 시작한다.

 

윤씨는 스물여섯에 셋째 딸을 낳는다. 식구는 계속 늘고, 전세방 한 칸은 너무 좁았다. 이런저런 궁리 하다가 문득 창성동 말랭이 윤락촌 색시들에게 옥수수 팔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 색시들은 돈이 없어 사 먹지 못하고 손님들이 사줬다. 그래도 팔다 남은 게 있으면 색시들에게 나눠줬다. 그렇게 선심 쓰면 다음에 손님을 졸라 옥수수를 비싸게 팔아줬던 것.

 


 

 

“옥수수 팔아주던 색시들이 생각나 말랭이에 올라갔더니 집들이 모두 덩그러니 비어 있었어요. 담배 가게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색시장사 하던 사람들이 군산극장 뒷골목으로 내려가 술집을 차렸기 때문에 집을 싸게 내놨다고 하더라고요. 그곳에 색싯집이 20여 채 있었는데 방이 열댓 개 되는 제일 큰 집도 70만 원 주면 살 수 있다고 그러고. 

 

방 하나에 천 원씩 월세만 내놔도 먹고는 살겠더라고요. 집은 사고 싶은데 돈은 턱없이 부족하고. 혹시나 해서 언니와 상의했더니 고맙게도 모자란 돈은 내가 사채를 알아보겠으니 꼭 사라는 겁니다. 그길로 집주인에게 달려가 10만 원 건네주고 집을 계약했죠. 그런데 말도 마세요. 잔금 치를 돈 30만 원을 남편이 사기당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계약금만 떼일 뻔했어요.” 

 


 

 

윤씨는 전쟁 치르듯 쫓고 쫓기며 남편이 사기당한 돈의 절반을 받아내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집을 매입한다. 내 집 마련은 군산 정착 3년 만에 이룬 기적이었다. 그 후 장사가 잘되어 고율의 사채를 앞당겨 갚는다. 집 지을 대지와 전답도 사들이고 건물도 신축한다. 몇 년 전부터는 전남 신안군에 사놓은 간척지로 농사지으러 다닌다. 요즘 소일거리 역시 채소행상.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직접 가꾼 채소를 내다 판다는 것이다. 

 

윤씨가 무료함을 느낄 때는 말동무도 되어주고 회고록 원고도 수정해주는 김영기(넷째 딸) 씨는 “엄마는 손자들 용돈도 행상으로 마련한다. 지난 추석 대목에도 역전 새벽시장과 아파트 단지에 좌판을 벌였다”며 “행상은 내년 설에도 계속될 것이다. 정말이지 엄마의 삶은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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