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 김선화 군산여성일력개발센터 관장
세상은 두드리는 자의 몫이었다. 어렵고 힘들지 않은 삶이 얼마나 될까만 대학 진학도 힘겨워했던 청춘 김선화, 그녀가 위기의 삼십대를 넘기고 19명의 실무자가 있는 군산여성일자리센터를 총괄하는 관장으로 돌아왔다. 오늘 그녀의 귀환은 먼저 두드리고 용기를 내서 부딪치는 경력 단절, 혹은 여성 취업자들의 표상이 될 것이다.
그녀는 한 때 방황하는 청춘이었다. 그러나 원광대를 졸업 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렵고 힘든 교육대학원과 사회생활을 병행하면서 타성에 젖었던 껍질을 벗어냈다. 그리고 진지하게 세상과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중부교회에 다니면서 어려운 이들에게 눈을 돌려왔던 그녀. 커튼 집을 운영했던 친정 부모님(김봉윤, 지정금)의 헌신적인 도움은 그녀를 담대하게 만들어갔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처럼 그녀는 용감하게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고민이 많을 때인 2010년, 그녀는 힘들 때 멘토가 되어 주었던 노동부에 근무하는 정찬호씨와 결혼했다. 아이는 둘인데 첫째가 이든, 둘째가 가을이다. 김선화 관장의 일상은 여느 엄마와 다르지 않다. 부모님들에 도움으로 그녀 또한 경력단절의 위기를 넘어섰다. 그래서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위한 애정은 각별하며 발길은 거침이 없다.
여성들을 위한 취업 요람, 군산여성인력개발센터
군산여성인력개발센터가 이 지역의 여성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지 22년이 지났다. 경력 단절 여성들에게 사회 복귀는 힘든 일이다. 20대~50대 여성들에게 직업 상담, 훈련, 취업과 창업 정보제공, 일자리 알선, 인턴지원, 일·가정 양립지원 등을 도와주는 게 이 센터의 일이다.
이 센터는 ‘모든 여성이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발휘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지원’한다는 설립 목적을 갖고 있다. 군산의 YWCA가 위기를 맞았을 때 Y연합회 후원회가 이 센터 운영법인을 맡았다. 지난 2010년 7년 동안 Y에서 본부 목적사업에 몸담았던 김선화씨는 이 센터 부장으로 발령 받았으며, 다시 7년만인 작년 10월 17일 관장으로 승진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사회복지가 전공이었지만 그녀는 예술대를 나와 교육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했다. 어쩌면 전공이 이 단체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잘 적응했다. 그 때부터 여성을 위한 거침없는 걸음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시니어클럽 홍소연 관장이 당시 부장님이었는데 비영리 단체로써 필요한 역량들을 전부 이어받았지요. 비전공자로써 좋은 선배를 만나서 역량 강화가 알차게 이뤄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하고 싶었던 일을 했는데, 주머니가 두둑하게 월급이 주어졌다. 기독교인으로서 꿈꾸어 왔던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 그 비전과 목적이 딱 맞아 떨어졌다. 꿈의 직장이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그녀는 도전하는 과정이 대부분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실패를 생각하기보다 더욱 용기를 냈다. “뒤늦게 서예를 공부하여 98년도에 원광대 예술대에 진학했거든요. 저는 교육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 이후 늦게 공부를 한 만큼 더욱 열심히 직장과 학업을 병행했지요.”
교육 대학원에는 각 과마다 한명씩 정원이 주어졌는데, 그때 포트폴리오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해서 합격했다. 대학원에 3일만 나가면 되었기에 지금의 특기적성수업(당시에 방과후학습)을 준비했다.
이런저런 인맥을 타고 가기보다는 직접 모든 일에 부딪쳤다. 이때부터 그녀는 홀로 거친 들판에 나섰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회현중 교장 선생님을 만났고, 특기적성 수업을 맡았다. 그 선생님이 임피중을 소개해 줘서 다행스럽게 두 학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YWCA에서 여성인력개발센터 프로그램 간사를 뽑는 광고를 보고 응모한 게 긴 시간 그녀를 이 자리에 묶어둔 계기였다.
“운영주체가 평화중고등학교 운영을 준비 중이어서 그랬는지 이례적으로 사회복지가 아닌 교육학을 전공한 저를 뽑아주더라고요. 사람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네요.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그런지 이런저런 시련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 일이 싫지 않았어요. 정말 다행이지요.”
그런데 이날의 인연이 중간에 평화중 사태를 맞으면서 그녀에겐 큰 시련을 겪었지만 시련 가운데 묵묵히 그 파동의 한 가운데를 견뎌냈다.
여성들이여, 용기를 내서 부딪쳐라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분들이 도움보다는 스스로의 용기와 노력이 필요했다는 걸 깨달았다. 도전하지 않으면 그 길이 열리지 않았으며, 용기를 내자 상대방이 알아주는 거였다. 놀라운 결과였다. 이런 말을 지금도 센터를 찾아 구인활동을 하는 여성들에게 해주고 있다.
이 센터 관장님은 실무자 출신이었는데 ‘실무형 부장’을 원했다. 열심히 배우겠다는 각오로 했는데, 외톨이였고 따돌림 당했다. 사람인지라 실망도 했다.
“그 당시 내가 어려울 때마다 맨토가 지금의 남편이 였는데, 남편에게 가서 힘들다고 하소연 겸 상담을 하면 나에게 묻는 거였어요. ‘사업예산 전체가 얼마냐’, ‘국비훈련이 뭐야’, 등등. 그런데 계속 말이 막히는 거예요. 기대고 싶어서 ‘나 진짜 힘들거든’ 하니까, ‘너 센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잖아. 지금은 센터 일을 먼저 해.’라고 이야기 해주곤 했는데, 그 순간 머리가 시원해지더라고요.”
그녀는 스스로를 바라봤다. 일은 모르면서 관리자가 되길 바랐고, 전문가도 아니면서 대접받기만 원했던 자신을 발견했다. 깨우치고 나자 정말로 일에 몰두 할 수 있었다.
“센터의 업무의 기본인 문서 수발도 신입 간사들과 함께하며 일을 시작하였고, 그 당시 관장님은 처음 하는 사업을 주로 맡겼는데 ‘맨땅에 헤딩’이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취약 계층사업 중에서 결혼 이민 여성에 관한 교육 일이 주어졌다. 생각 끝에 다문화가정을 찾아갔다. 가서 협약을 맺고 처음부터 사례를 만들어 갔다. 관장님과 직원들이 조금씩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필요하면 본인이 뛰어서 만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아갔다. 서서히 변하는 게 보였다.
규정과 기준, 그리고 원칙을 세우다
YWCA 활동은 비전과 목적에만 맞추면 되었다. 그러나 이 센터는 기관이나 지자체에서 하라는 목적과 방향에 맞게 일을 해야만 한다. 어려운 외부 기관을 상대하면서 이제는 원칙과 규정이 맞게 하고 있다.
기준을 맞추면 아무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였다. 무조건 해당 기관에 맞게 공문을 통하여 질의응답과 담당자들에게 확인을 받는다.
“센터가 규정과 원칙에 맞게 일하면서 기관 단체들과의 소통이 잘되었어요. 부장 때부터 말이 아니라 문서와 서류로 하는 걸 지켜 나갔고, 무조건 공문서로 일을 하는 원칙과 체계를 마련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원칙과 규정을 준수하자 일이 수월해졌고 자연스레 평가도 높게 나오더군요.”
그렇다. 세상일이란 처음의 원칙이 한 장 한 장이 쌓이면 그게 자연스러워지고 지키지 않으려고 해도 지켜지는 법이다. 관장이 된 지금, 센터의 실무를 너무 잘 아니까 직원들이 힘들 것 같다.
“저는 직원들에게 서류를 하나 만들더라도 ‘서류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들어야지 만드는 사람의 눈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하죠. 왜냐면 직원으로 바뀌거나 외부 기관에서 와서 보더라도 곧바로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렇게 일을 하도록 앞장서 나갔다. 요즘은 까다롭다는 노동부나 여가부와도 신뢰가 쌓여져서 상당히 만족감을 느낀다.
여성 직업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 2월까지 한국GM정규직들이 실업급여 혜택을 받게 되는데, 그 직장인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돈이 많이 들어가는 연령대이다. 그 주부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다. 올해 그 부인들이 직업 훈련을 받으러 나온다. 그게 실제로 바뀐 점이다.
“그동안의 직업 훈련은 취업이 잘되는 방과후지도사나 사무직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국가에서는 4차 산업혁명에 맞춰 도전적인 분야에 대한 훈련을 원합니다. 3D프린팅, 드론 등인데 이런 분야를 교육해 놓았다고 해도 센터의 단기 교육으로 전문가적인 수준에 다다르지 않고, 기업이 뽑아줄 것인지 생각하면 아니거든요.”
도전적인 직업 교육의 경우 아직까지 갈 곳이 없다. 기대치를 충족시키려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력개발원이나 폴리텍 대학에서 6개월 교육을 하고 있는데, 센터는 길어봤자 2∼3개월이 전부입니다. 고용위기다, 여성 인력이 갈 곳이 없다, 라고만 하지 말고 6개월~1년 정도 장기 훈련을 먼저 해야 여성일자리 정책에 희망이 보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찾아주려면 좋은 교육을 받도록 해줘야 한다. 국가 정책 차원에서 방향이 바뀌어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