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정미소에서 파업이 지속됐던 이유
‘군산 야행’ 행사장에서 발견한 일제강점기 군산 정미소 파업 투쟁
전북 군산 구도심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역사와 문화의 향연이 이틀(10월 2일~3일) 동안 펼쳐졌다.
지난 8월, 군산시가 특색 있는 지역 문화유산을 활용, 새로운 관광콘텐츠로 큰 호응을 얻었던 ‘2018 군산 야행(夜行)’ 두 번째 행사를 <가을밤! 근대문화유산은 잠들지 않는다>라는 주제로 월명동, 영화동 일원에서 진행한 것.
이날 기자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부근을 비롯해 최근 문화재로 등록된 옛 법원관사, 옛 남조선전기회사 등을 거점으로 조성된 등불 거리를 거닐며 낭만 넘치는 가을 정취를 느꼈다. 밤거리를 무대 삼아 펼쳐진 프로그램은 다양한 거리 테마공연, 문화재 답사, 플리마켓(70개) 운영, 옛날신문 전시 등 60여 개였다.
야외 전시장에는 군산 진명의숙 학생모집, 옥구농민 소작쟁의, 군산지역 사회단체 활동, 군산 노동운동, 우리물산 장려 관련 행사, 조선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상, 군산 경마장 폭발사건, 군산중학교 야구부, 영화 <끊어진 항로> 상영 예고 등 30여 개 기사가 소개되고 있었다. 그중 군산농사조합 설립과 정미소 노동자 파업 사건 속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 본다.
군산농사조합은 어떤 단체?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하였다. 이후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온다. 특히 군산 지역은 대농장주를 꿈꾸는 농업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배후 농지가 비옥하고 가격도 일본의 1/10에 불과해 몇 배가 넘는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군산은 농장 운영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 농업인들의 진출기지가 되어갔다.
일본 농업인 진출의 첨병 역할을 한 것은 군산농사조합이었다. 이 조합은 한국 최초 일본인 농사 단체로 군산에 정착한 일본인 40여 명이 1904년 봄에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다. 거류지로부터 약 4㎞ 이내 토지·가옥의 임차 및 소유만 인정됐음에도 그들은 거류지 밖 토지를 소유하였고, 그 소유권을 보장받기 위해 만든 단체가 군산농사조합이었다.
군산 지역 농장운영 효시로 알려지는 미야자키 게이타로를 비롯해 구마모토 리헤이, 시마타니 야소야 등이 조합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조합원들은 월보(月報)를 발행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에 헌병과 경찰 주재소 설치, 농사 시험장 설치, 납세법 개정 진정서 제출 등 안정적인 농장 운영과 신변 보호를 요구하였다.
일본 농업인들은 자신들의 신변 안전과 불합리하게 담합하여 매수한 토지 소유권 인정, 경영 정보 교환을 위해 조합을 설립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농장을 각지로 확대해 나갔다. 이로써 김제, 만경, 부안, 고부, 태인, 전주, 익산, 함열, 서천 등지에도 일본인 대농장이 들어서고, 조선 농민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전답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 업주들의 착취가 직공들 파업 불러와
군산은 개항 이듬해(1900) 군산-오사카 직항로가 열린다. 1905년에는 내항에 잔교가 설치되고 1908년에는 전국 최초로 신작로(군산-전주)가 개설된다. 기록에 따르면 개항 이후 10년(1899~1909) 동안 군산 지역에 정착한 일본인 농장주는 3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소유 경지는 모두 3만여 정보. 여기에서 생산된 미곡만 25만 석에 달하였다.
대형정미소는 군산선(군산-익산) 개통 이후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12년 3월 6일 운행을 시작한 군산선(23.1㎞)은 군산 지역 농지를 가장 많이 소유한 미야자키(宮崎) 농장을 비롯해 개정면의 구마모토(熊本) 농장, 발산의 시마타니(島谷) 농장, 임피·서수의 가와사키(川崎) 농장 등 일본인 대농장 일곱 개를 꿰뚫고 지나갔다.
1914년 호남선이 완공되고 철도가 내항까지 연결되면서 철도 주변에 정미소 거리가 조성된다. 군산 부근에 대형 농장이 많았고, 각지에서 생산된 미곡 최종 집결지가 군산항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당시 군산에 만석 이상 생산하는 정미소(매갈잇간)는 열네 곳, 그중 가등, 조일, 조선, 화강, 낙합, 육석 등 여섯 곳은 5만석 이상 생산하는 대형 정미소였다.
조선 청년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매갈잇간 매가리공으로 부녀자들은 쌀을 고르는 미선공으로 종사하였다. 그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감독들의 폭언과 폭행도 뒤따랐다. 그나마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새로운 기계가 들어오면 해고 대상 1순위가 됐고, 불경기 때는 임금을 일방적으로 삭감하였다. 이 같은 착취와 탄압은 파업에 불씨 역할을 하였다.
정미소 노동자 파업 투쟁과 그 의의
기미년 삼일만세운동이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던 군산은 그해(1919) 군산정미인접공동노동조합(아래 군산공동조합)이 창립된다. 이후 미선공회(米選工會) 등 다양한 노동단체가 만들어진다. 군산공동조합은 숫자가 많은 정미소 노동자 회원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매가리공과 미선공들은 일본인 업주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개선을 요구할 사항이 있으면 이들 단체와 연대하여 파업을 전개하였다.
군산 지역 최초 정미소 노동자 파업은 1924년 3월 16일 ‘낙합정미소 매가리공 동맹 파업’으로 전해진다. 일본인 업주의 일방적인 임금 인하에 불만을 품은 정미소 직공 40여 명은 기존 임금의 90%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며 정미소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일본 순사가 출동하였고, 조선인 수십 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군산경찰서는 동맹파업 장기화를 우려하여 이세환 군산공동조합 조합장을 불러 정미소 측과 타협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제시한 안이 대체로 수용되고, 구속된 노동자들도 풀려난다.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 정미소 직공들이 1924년 3월 23일 업무에 복귀하면서 파업은 종료되었다.
그럼에도 정미소 직공들의 파업 투쟁은 해마다 일어났다. 1926년 11월 조선정미소 직공과 육석정미소 노동자 연대 파업, 1928년 2월 중정정미소 미선공 파업, 1929년 10월 남선정미소 미선공 파업, 1930년 6월 조일정미소 미선공 파업, 1930년 12월 군산 지역 정미소 대규모 동맹 파업, 1933년 11월 가등정미소 직공 거리 시위 등이 대표적이다.
군산 정미소 노동자 파업은 일본인 업주의 일방적인 임금 인하와 모욕적인 감시, 폭언, 폭행 등이 원인이 됐다. 이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단체와 연대하여 대항하였고, 일본인 업주들은 ‘군산정미공조합’이란 단체를 조직하여 대응하였다. 이들은 정미소 직공들 요구를 무시하거나 경찰을 투입, 주동자를 검거하여 무력화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인 업주들의 혹독한 착취와 치밀한 방해 공작에도 노동자들은 단결력을 보여주며 자신들의 의견을 일부나마 관철한다. 조선인 노동자 파업은 초기엔 생존권 확보 차원이었으나 점차 정치적 성격이 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옥구농민 소작쟁의가 항쟁으로 발전했듯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