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철릭에 연정을 담아
“영안도로 경성 군관 하여 가니 내 고도와 겹철릭 보내소. 거기는 가면 가는 흰 베와 명주가 흔하고 무명이 매우 귀하고 관원이 다 무명옷을 입는다 하오. 무명 겹철릭과 무명 단철릭을 입으려 하니 모름지기 많이 하여 설 쇠기 전에 경성으로 구디 시켜 들여보내소....
“내 삼베 철릭이랑 모시 철릭이랑 성한 것으로 가리어 다보내소 . 또 분하고 바늘 여섯 사 보내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고”
2011년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안정 나 씨 종중 묘 이장 과정 중 미라와 16~17세기의 조선시대 복식 156점을 비롯한 유물 200여점이 출토되었다.
그중 신창 맹 씨의 묘에서 나신걸(1461~1542).이 부인인 ‘회덕 온양댁’을 수신인으로 적어 보낸 편지 2점이 발견 되었다. 1498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한글편지다. 지금의 함경도인 영안도에 군관으로 발령받아 고향집에 가지 못하고 부임지로 가야만 하는 남편이 아내에게 분과 바늘을 사 보내며 무명 철릭을 지어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한글로 써서 보내는 데서 애틋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 편지는 보존 처리를 거쳐 2016년 대전 시립박물관에서 〈대전 안정 나 씨 묘 출토복식 특별전 – 그리움을 깁고 연정을 짓다〉를 개최하면서 공개되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철릭은 말을 많이 타는 유목민인 몽고족이 입던 옷으로 활동에 편하도록 저고리아래 너른 치마가 달린 포의 한 종류다. 고려시대에 원나라에서 들어와 우리 옷으로 정착하였다. 첩리, 천익, 첨의 등으로 불리기도 한 이 옷은 조선 초기에는 주로 무관 들이 입었다. 임진왜란 전후에 왕 이하 문무백관들이 전쟁이나 사냥을 할 때 융복으로 입다가 이후에 서민에 이르기 까지 널리 입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착용이 줄다가 1894년 고종의 갑오의제개혁이후 좁은 소매의 두루마기만 입도록 한 이후 역사드라마 에서나 볼 수 있는 복식이 되었다. 극중 왕이 사냥을 하거나 활을 쏠 때 혹은 이순신 장군이나 무관들이 철릭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철릭이 드라마뿐만 아니라 세간에 다시 등장했다. 신 한복 바람이 불면서 여자 옷으로 입혀지고 있다. 특히 20대 30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젊은 디자이너 들이 주도하는 신 한복 회사들이 많이 생겨났고 다양한 소재의 철릭을 온라인상에서도 쉽게 구매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통치 철학 및 이념은 유교사상이었다. 국가의 예식을 규정한 법전과 예전에서 신분 계급과 의식에 따라 복식을 치밀하게 정하여 입었다. 조선의 선비는 단령, 방령, 직령. 철릭, 심의, 답호, 장의, 액주름포, 중치막, 학창의, 창의, 도포, 전복, 두루마기 등을 때와 장소에 맞게 입은 패셔니스타였다. 세계 어느 나라 복식의 역사에서 남자들이 이렇게 다양한 겉옷을 입은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7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와 오랫동안 남자들이 포(袍)로 입던 옷이 사라졌다가 여자들의 신 한복 트렌드를 이끄는 핫 아이템이 되었으니 과연 복식혁명이 아닌가. 우리 조상의 복식들이 새로이 재해석 되어 철릭 못지않게 패션의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 지기를 기대한다.
남편이 30여년을 근무하던 회사에서 조만간 퇴직을 하면 활을 쏘고 싶다고 한다.
철릭을 입고 토수를 하고 활시위를 당기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오늘은 철릭을 만들 무명에 가을 하늘을 닮은 파란 쪽물을 들여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