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근대역사박물관 로비에 들어서니 청일전쟁(1894~1895) 후 중국 항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축조(1912)했다는 ‘어청도 등대’(국가 등록문화재 378호) 모형이 가장 먼저 반긴다. 어청도(於靑島)는 군산항 서쪽 64㎞ 해상에 자리한 섬으로, 서해 중부어장의 기항지이자 어업전진기지.
한쪽 소파에 앉아 봉지 커피를 즐기는데, 군산대학교 대학원장 김항석(68: 金恒錫) 교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김 교수와의 만남은 기자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경영학 교수이면서 향토사(鄕土史)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군산의 발자취와 미래에 대해 고견을 듣고 싶어서였다.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김 교수를 따라 일어났다. 먼바다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가 박물관 분위기를 돋운다. 해양물류역사관에 들어서니 석기시대(石器時代)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군산지역 바다와 육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과 자료들이 시대별로 구분 전시되어 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머나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군산시는 수탈과 항거가 공존하는 내항 일대를 문화 및 창작공간으로 재조명하고, 교육과 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켜 원도심권 재생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김 교수는 환영의 뜻을 비치면서도 군산의 역사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자칫 ‘개항의 역사’가 ‘군산의 역사’로 탈바꿈될까 우려된다는 것.
“금강 하구에 자리한 군산은 지정학적으로 요지에요. 선사시대에 중국 내륙과 해안의 농어민이 기착하여 살았고,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와 중국, 일본 등을 연결하는 해상 교역·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였지요. 괴나리봇짐을 지고 걸어 다니던 옛날에는 바닷길이 지금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군산의 역사는 백제가 공주(웅진)와 부여(사비)로 천도하고, 불교를 일본에 전파하는 5~6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고려 때는 최무선 장군(1325~1395)이 왜구를 격파한 ‘진포대첩’ 기지였고, 호남지방에서 개경(수도)으로 가는 세미(稅米)와 공미(貢米)를 보관 운반하는 조창(漕倉)과 조운(漕運)이 발달했지요. 조선 초에는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됐으며, 임진왜란 때는 군산도(群山島)가 이순신 장군의 수군함선 정박지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수군의 요새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술 모델이 되기도 했던 진포대첩은 1380년(고려 우왕 6년) 8월(음력) 500여 척의 대 선단을 이끌고 호남지역의 곡식을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금강 하구)에 침입한 왜구(倭寇) 1만여 명을 최무선 장군이 세계 해전 사상 처음으로 화포를 발명하여 패퇴시켰던 전쟁이다. 김 교수는 “백제의 관문이자 해양물류 중심지로 부상한 군산의 역할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국토 균형발전이 이루어지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일제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 위해 군사비행장을 건설하는 등 군산을 병참 기지화 했으며, 해방 후에도 미군이 공군 전략기지로 확장한 것에서도 군산지역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김 교수의 부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근대적인 항구도시 개발은 개항(1899) 이후 시작
군산이 근대적인 도시로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개항(1899) 이후로 알려진다. 그러나 천혜의 양항이었던 군산은 중국, 일본 등과 교역이 이루어져 개항 전에도 상당수 일인과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1905년 군산항을 근대항으로 건설하기 위해 거액의 공사비(8만6천 원)를 투입하지만, 그해 11월 을사늑약으로 의미가 퇴색된다. 러일전쟁(1905)이 일제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인 진출이 급격히 팽창했다. 또한,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경술국치(1910) 이후에는 각종 제도가 일제의 의도대로 정비되면서 일인들의 합법적 활동이 확대되었다. 관청은 일인들이 독점했으며 관의 후광을 업은 상인들이 군산의 주요 상권을 장악했다.
군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토지와 운송, 금융 등을 자신들의 의지로 전단하며 군산 일대 농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또한, 명치정(明治町), 소화통(昭和通), 장기(長崎), 능본(熊本) 등에서 알 수 있듯 자신들이 섬기는 왕과 고향 이름을 학교, 거리, 기관 이름에 붙여지었다. 민족 말살을 위해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1937년에 내세웠던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이미 시작됐던 것.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에 입맛을 다시던 일제의 ‘약탈형’ 거점항구가 된 군산은 그들의 계획대로 도시가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었다. 싼값에 농지를 사들이고, 쌀을 수탈하기 위한 축항공사와 간척공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 일본인 이주 급증으로 1930년대에는 전북 도청소재지 전주 인구를 추월하는 전국 7대 도시로 급성장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 군산이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작쟁의(1920년대)가 일어난 곳도 군산이라는 점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났던 농민운동은 수탈과 수모를 당하던 조선 백성들 가슴 깊이 억눌려 있던 분노의 표출이었지요. 또 하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군산이 번영을 누리고 일인들이 부(富)를 쌓을수록 조선인들의 삶은 더욱 각박해지고 피폐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군산은 1930년대까지 지속해서 발전하다가 1940년대 들어 멈춥니다.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1937년 7월)에 이어 태평양 전쟁(1941~1945) 때문이었지요. 군산은 그렇게 건설이 중단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합니다. 해방 이후 북한, 중국과 교역이 단절되자 군산은 큰 혼란에 빠졌으나 원조물자 등 수입 선박의 출입으로 부두 노동자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임해상공업도시 위치를 겨우 유지하지요.”
그러나 한국전쟁(1950~1953) 이후 군산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건 변화로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 반세기 가까이 ‘성장이 멈춘 도시’, ‘불 꺼진 항구’라는 불명예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1960년대 이후 서울-대구-부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절름발이 경제개발’로 교역 및 상업도시의 역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공업도시로서의 개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었다.
채만식은 불합리한 세태 거부했던 신념 있는 작가
박물관 3층 근대생활관에서 미두장을 돌아보던 김 교수는 10년 전(2001) 교환교수로 미국에 거주하면서 느꼈던 얘기도 해주었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1899~1961)가 <노인과 바다>를 쓰느라 8년 동안 머물렀던 조그만 도시 키웨스트(Key West)의 기념관을 찾는 수많은 참배객을 보면서 백릉 채만식(1902~1950)의 <탁류>를 떠올렸다고.
“그들(미국인)이 시대 상황에 물들지 않고, 모험을 좋아하며 결심하면 목숨을 걸고 자유분방하게 생활했던 헤밍웨이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경건하게 참배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흔히 백릉 선생은 풍자 작가로 불리지만, 불합리한 세태나 시대 상황을 거부하고 저항했던 정열적이며 자유분방한 신념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헤밍웨이처럼···.” 김 교수는 “세태 풍속 소설가라는 미시적인 면모에서 그치지 말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일제 말기와 해방 직후의 시대 상황을 들여다보면 좋겠다”며 “미국 플로리다 반도 남쪽 끝 ‘키웨스트’가 ‘헤밍웨이’로 지역의 자존심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듯 군산도 수준 높은 문화와 관광의 도시로 발전시켜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역사관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외세 침략에 대응하고자 고종 8년(1871) 군산 오식도에 설치됐던 것으로 알려지는 철제화포가 발길을 잡았다. 전통적인 우리나라 화포제작방식과 달리 포구 쪽이 본체보다 좁아지는 개량된 형태여서 발견 당시에는 외국 대포로 오해를 받기도 했단다. 지난 1991년 고물장수에 의해 우연히 발견됐다는 화포는 길이 127cm, 포구내경 6.5cm, 중량 120kg으로 포신의 중간 부분에 걸기 좋게 단면 원형의 축이 붙어 있고, 작약구에는 심지를 꽂았던 구멍이 확인되며, 작약구 뚜껑에 원형의 고리가 부착돼 있다. 위용이 당당하게 느껴지는 화포는 조상들이 비옥한 군산·옥구 땅을 무기력하게 빼앗긴 게 아니라 최신형 화포를 배치해서 방어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말해주는 듯했다. 화포를 뒤로하고 박물관을 나와 일제 수탈의 현장이자 진포대첩 격전지였던 내항으로 이동했다.
“개발독재는 건전한 경제성장 가로막았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내항까지는 약 3분 거리. 바닷물이 빠져나간 내항에는 몇 척의 멍텅구리 배들이 게으른 머슴처럼 질펀하게 누워있고, 그 위를 무리지어 나르는 갈매기들은 포근한 늦겨울 포구의 정취를 마음껏 노래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트인 갯벌 사이로 금강하굿둑과 백제 오성인의 혼이 잠든 오성산(五聖山)이 아슴하게 들어왔다. 군산에서 가장 높은 오성산(227m)은 김항석 교수가 태어나서 자란 동네. 마을 이름은 군산시 성산면 도암리로 <군산의 지명유래> (발행 및 편집 이복웅)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개성 김(金)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로 소개하고 있다. 오성산 줄기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도암리는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왕족인 ‘王’(왕)씨들이 뱃길로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오성산 기슭에 터를 잡고 성도 ‘金’씨로 고치고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터’라 부르다가 변이되어 지금은 ‘고리터’로 불린다고. 전설이지만, 김 교수도 그 후손 중 한 사람이어서 흥미를 끌었다.
“유학자 집안이어서 그런지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자’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도 희망직업을 물으면 학자라고 답했죠. 그런데 1970년대 초 군대를 제대하고 삼성그룹에 입사했습니다. 효창운동장에서 그룹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어요. 행사가 시작되고 이병철 회장이 입장하니까 박수와 함께 이 회장의 미소 띤 얼굴이 카드섹션으로 그려지는 겁니다. 순간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갈등이 일더군요. 한참 후 다른 회사에 입사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학교 선생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때가 1981년이었으니까 벌써 31년이 지났네요. (헛웃음)” 꿈과 희망에 부풀어있던 청년기를 박정희 유신체제하에서 보낸 김 교수는 “1960년~1970년대 일방적으로 행해졌던 개발독재는 민주주의 꽃인 지방자치제와 건전한 경제성장을 가로막았다”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효율적인 지방자치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지역 균형발전 등에 관심이 많다”고 덧붙였다.
“군산은 새만금에 이어 ‘새금강 시대’ 열어야!”
김 교수는 “21세기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무리(群) 뫼(山) 군산은 새만금·금강 광역지역권을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새만금에 이어 ‘새금강 시대’를 활짝 열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구상은 수도권 과밀화 방지와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라도 꼭 실행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호남과 영남 등 남부권 인구와 경제가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중간에서 차단할 수 있는 새로운 신산업지역이 형성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만금지역과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는 ‘세종시’를 연결하는 금강지역(군산)이 새로운 국토의 중심축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일본이나 미국 화물이 군산항을 거쳐 중국으로 가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물자가 군산항을 거쳐 나가는 중계무역 거점지역으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것이죠” 김 교수는 “새만금·금강 광역지역이란 금강을 낀 전북과 충남의 중소도시와 농촌이 하나의 광역권을 형성해서 지리·역사·문화·산업 등의 동질성을 갖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새만금·금강권의 중심부에 있는 군산은 양 지역을 엮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었던 김항석 교수와의 만남은 유익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정년퇴임식을 며칠 앞두고 있어 바쁠 터인데도 시간을 내준 김 교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군산의 상징 음식인 ‘물메기탕’ 전문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