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의 편지 - 염치(廉恥)와 면목(面目
염치(廉恥)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면목(面目)은 ‘체면’과 같은 말이며, ‘면목이 없다’는 건 “스스로 자기 잘못을 뉘우쳐 사람다움을 지켜 나간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면목’과 ‘염치’는 때론 혼동되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우리 사회의 염치와 면목은 어떨까?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을 했을 때 흔히 ‘면목없다’는 말로 이해와 협조를 구한다. 잘못을 책망하는 단어가 아니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청하는 마음을 갈무리한 간곡한 의중이 배어 있다. ‘면목없다’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될 때 우리 사회는 서로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며,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나 양보의 미덕도 넓어진다고 본다.
그런데 요즘엔 ‘면목없다’라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 보다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체면이나 부끄러움도 모른다는 뜻이 담긴 말이 유행처럼 퍼졌다. ’내 탓이오‘보다는 ’남 탓‘에만 열중하는 시대상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시대의 염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기>의 ‘항우본가’에는 사면초가의 수세에 몰린 항우가 강동으로 가기를 권하는 부하에게 “강동의 젊은이 8,000명과 함께 하였는데, 설사 강동의 부모형제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삼아 준다고 한들 내가 무슨 면목(面目)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라면서 오강(烏江) 건너지 않았다. 염치를 아는 장수였다.
하루에도 천리를 달리는 말을 차마 죽일 수 없다면서 부하에게 주고 ‘면목과 염치없는 일’이라면서 천하의 항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어쨌든 자살했기 때문에 이를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항우의 남자다움을 말하는 건 이런 ‘염치’와 ’면목‘을 아는 결연한 기개 때문이다.
새로운 지방 정부가 들어섰다. 많은 선량들이 염치를 무릎 쓰고 한 표를 얻었다. ‘면목없다’라는 말은 눈 씻고 봐도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한 약속마저 밥 먹듯 뒤집는 요즘 세태에서 누굴 비난할까 마는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하기야 대통령 둘이 ’염치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염치‘가 횡행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속이 뻔히 보이는 일을 두고 모르쇠 하는 건 국가의 지도자나 지방의 지도자나 어쩌면 그렇게 닮은꼴인가. 이들의 ‘면목’과 도덕성은 어디로 갔는가.
지난 6월 29일 12년 임기를 마무리하고 떠나는 문동신 시장의 퇴임식이, 다음날에는 들어오는 강임준 시장의 ‘시민들에게 듣는다’는 행사가 열렸다. 문 시장은 공과도 있겠으나 3선 과정을 마친 퇴임이라, 강 시장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하기에 모두 큰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군산의 신·구 리더들의 행사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 따라 ‘염치’와 ‘면목’이라는 두 단어가 주는 무게가 커지는 건 왜일까. 시대가 너무 엄중하고 위급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군산시는 ‘염치없는 일’일랑 그만 되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하다가 안 되었을 때 남 탓보다는 ‘면목없다’고 진솔하게 말하는 아름다운 시정이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