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뱃길 100년, 그 발자취를 찾아서
추억의 뱃길 군산·장항 도선장(2)
군산 도선장은 고은(高恩) 시인의 자전적 소설 <나의 산하(山河) 나의 삶>에도 등장한다. 고은은 군산중학교 4학년 때 한국전쟁(1950~1953)으로 학업을 중단한다. 그리고 그해(1950) 가을 한동네 선배인 기호를 따라 군산 시내에 나왔다가 중앙로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차(車)씨에게 점심을 대접받고 도선장으로 향한다.
“기호와 나(고은)는 차 씨의 대접을 받고 그곳에서 헤어져 군산 도선장(渡船場)으로 갔다. 공회당을 지나 도립병원의 긴 담을 끼고 가면 거기에 바다냄새가 온몸을 파묻어버리는 내항 서부두가 나타난다. 금강이 바다에 흘러드는 곳. 강경 일대에서부터 금강은 그 이름대로 비단같은 강물이 지독한 흙탕물로 바뀌어 군산에 이르는 것이다. 물난리라도 나면 이 탁류는 더욱 장관이다.
장항과 장항제련소 굴뚝이 벌써 내 마음을 압도하고 있다. 우리는 30분쯤 기다려서 매일 몇 번씩 강을 건너는 정기여객선을 탔다. 부두 입구에서는 경찰이 검문을 했다. 그렇다 우리는 그 무렵 발급받은 양민증(良民證)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통과했다. 그 검문에 걸려들어 경찰의 조사를 받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당시 군산은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1·4후퇴 때 미군 수송함(LST)이 군산항에 퍼 놓은 피난민은 5만여 명. 그중 절반이 군산에 정착하면서 곳곳에 피난민촌이 들어섰다. 내항으로 통하는 철도 주변과 도선장 철조망 부근에는 움막과 판잣집이 잇대어 빽빽하게 들어섰다. 움막 안에는 생활력 강한 피난민들이 꿀꿀이죽과 강냉이 죽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고은 시인은 당시 군산항의 여러 시설들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추억한다. 큰 배가 드나드는 부두는 폭격으로 쓸모없게 파괴됐고, 미창(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창고들도 다 박살났으며 전란을 겪은 터라 승객들은 모두 초라하게 보였다고 추억한다. 장항에 도착한 고은은 그곳에서 이틀을 머물고 돌아온다.
“장항은 쓸쓸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쓸쓸한 곳이 장항인지 모른다. 다방 하나가 있었다. ‘가고파’ 다방. 우리는 다방에 들어갔다 바로 나와버렸다. 뱃고동 소리가 났으므로 무작정 그 소리에 우리가 놀랐던 것이다. 우리는 군산으로 건너가는 배를 탔다. 배안의 미친 여자가 아무나 보고 히죽히죽 웃었다. (줄임)
앞쪽으로 나가서 바닷바람을 실컷 맞아들였다. 갈매기, 늙은 갈매기, 그렇게도 세련되게 나는 갈매기를 가까이서 봤을 때의 그 늙고 더러운 모습이 이제 미지의 내 갈매기 정서를 배반하고 있었다. 어떤 동경의 대상도 거기에 거리가 없어지면 현실 이하로 되기 십상이다. 군산 도선장에 내리자 기호는 군산의 누님 집에 가고 나는 10리길을 걸어서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고은 시인은 그 후에도 장항을 한국에서 가장 쓸쓸한 도시라고 말한다. 경찰 검문은 유신 시대 들어 더욱 빡세게 이뤄졌고, 양민증은 주민등록증으로 바뀌었다. 바닷바람은 10년, 20년 후에도 여전히 짭조름했다. 배 안에서 아무나 보고 히죽히죽 웃던 여자는 나이를 먹어서도 나타나 승객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장항역 앞 가고파 다방 역시 상호만 ‘전원다방’으로 바뀌었을 뿐 지금도 방문객들에게 애잔하면서도 달콤했던 추억의 향수를 제공한다.
추억의 경남호와 군산호
군산-장항 도선 사업은 광복 후 군산시가 운영하게 된다. 광복이 됐음에도 도선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경남환’(京南丸)이 오갔다. 일본식 발음 ‘마루’인 환(丸)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나마 배가 노후해서 휴항이 잦았다. 객선이 결항할 때는 미창(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소속 바지선 영운호나 소형 선박으로 대체했다.
1960~1970년대에는 경남호(91,3톤, 정원 237명)와 군산호(108톤, 정원205명)가 15~20분 간격으로 오갔다. 설이나 추석 대목을 앞두고는 자정이 넘도록 운항할 때도 있었다. 서울-장항 간 열차가 10~20분 연착하는 것은 보통이고 명절을 앞두고는 2시간 이상 연착할 때도 있어 늦도록 기다렸다가 귀성객을 싣고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야간 통행금지가 삼엄했던 1970년대 유신정부 시절. 자정이 넘어 장항역에 도착한 군산, 옥구, 김제 지역 승객들은 수상파출소 검문 경찰이 팔목에 찍어주는 확인 도장으로 방범대원들의 길거리 심문을 피해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서천군에서 운영하는 '서천호'가 추가 운항하였다. 서천호 선착장은 군산도선장 옆에 잔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1984년 금강도선공사 설립 이후 금강호가 가세하여 세 척이 오갔으나 금강하굿둑 완공(1990) 이후 승객이 줄자 서천호와 군산호는 휴항하고, 뱃길이 끊기는 2009년 10월까지 '금강호'가 운항하였다.
예술가들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장항제련소 굴뚝
당시 군산-장항은 직선거리 1,9km, 뱃길로 3km였다. 도선 이용객은 출퇴근하는 직장인을 비롯해 학생, 영세상인, 날품팔이 노동자 등 다양했다. 이들은 해가 멀쩡한 날에도 풍랑경보나 주의보가 내리면 뱃길이 끊기기 일쑤여서 학생들은 등교를 포기해야 했다. 어쩌다 하교 시간에 뱃길이 끊기면 저녁을 사 먹고 여관방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바람이나 안개 등 일기불순으로 뱃길이 막히는 날은 1년에 20여 일. 군산의 중고교에서는 기상 관계로 배가 결항할 경우 장항 통학생은 결석으로 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못 받는 피해는 어쩔 수 없었다. 학교 측에서는 뱃길이 묶이면 시내 학생과 통학생들로 조를 편성해 학우를 집에 묵게 하였다. 그렇지 못한 통학생들은 10여 명이 숙박료를 거둬 여관이나 여인숙에 투숙할 수밖에 없었다.
군산 지역 학생들이 장항제련소로 소풍이나 견학을 가기도 했다. 흥남제련소, 진남포제련소 등과 함께 1936년 완공된 장항제련소는 일제강점기엔 수탈, 광복 후에는 산업화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특히 바다를 배경으로 바위산(120m)에 우뚝 솟은 굴뚝은 문인, 화가, 사진작가 등 예술가들 작품에 자주 등장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장항제련소로 소풍을 다녀왔다는 정영선 군산문화관광해설사의 추억담을 들어본다.
“초등학교 5학년 때(1965) 장항제련소로 소풍가면서 급우들(이명숙, 박정숙 등)과 군산도선장 선착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카메라가 뭔지도 모르던 때였죠. 박상기 선생님이 찍어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척 세련된 선생님이셨나 봐요. 마을 입구의 장승처럼 장항을 지키고 서 있는 장항제련소 굴뚝을 비롯해 시골 장터처럼 시끌벅적했던 도선장 풍경, 그리고 사진을 찍어준 선생님과 급우들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육중한 엔진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던 군산호도 다시 한 번 타보고 싶고요···.”
고은 시인은 어린 시절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늘 영원감(永遠感)을 체험했다고 회고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방향이 달라지는 굴뚝의 연기가 어린 고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어린 고은은 고향 마을에 있는 할미산에 올라 이리(익산)행 기차의 기적 소리와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열애하듯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상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월호 <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는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