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텔지어'같은 존재, 군산 월명공원 수시탑
정진술 전 군산시 수도사업소장이 전하는 ‘수시탑’에 숨겨진 이야기
전북 군산시 원도심권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아늑한 월명공원, 이곳에 오르면 마을 어귀의 솟대처럼 우뚝 솟은 탑 하나를 만난다. 군산을 수호신처럼 지켜주고 있는 수시탑(守市塔)이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돋보이는 이 탑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윗부분은 돛단배의 돛과 활활 타오르는 봉수대 불꽃을, 아랫부분은 선박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발 64.3m 능선에서 하늘로 치솟은 그 모습이 날렵하면서 아름답고, 보면 볼수록 믿음직스럽다. 전국 어느 도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미지를 연출한 탑을 볼 수 없다. 이처럼 수시탑은 독특하다. 개성적인 면에서도 특출한 조형미와 안정감을 보여준다. 흑백의 조화도 뛰어나다. 그래서 그런지 건립 초기부터 많은 시민에게 사랑을 받았고, 일찍이 군산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하였다.
수시탑은 해망동과 금동에 걸쳐 뻗어있는 월명공원 능선의 중간지점 120평에 높이 28m, 공사비 280만 원을 들여 1968년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 탑은 군산을 대표하는 조형물로 그치지 않는다. 부지런하고 진취적인 시민과 근검절약을 추구하는 청백리의 의지, 그리고 희망과 다산, 풍요를 상징하기도 한다.
으뜸 산택코스이자 청소년들이 꿈을 키웠던 곳
월명공원에 오르면 금강 하구와 충남 서천군 일대, 그리고 '군산팔경' 중 5~6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시민들에게 휴식처이자 가족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대사산 비둘기집 옆에서 수시탑으로 오르는 300계단은 으뜸 산책 코스이자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비롯해 제일고등학교 축구부, 영광여고 테니스부 선수들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학창시절에는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로, 테니스 여왕으로, 지금은 가수 윤종신의 아내이자 방송연예인으로 활동하는 전미라씨.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군산 토박이'라고 소개하는 전씨는 2013년 <얼쑤 전북>(3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군산 월명공원은 내가 처음으로 꿈을 키웠던 곳"이라며 애틋한 추억들을 떠올렸다.
"군산 해망동 바로 맞은편에 있는 월명공원은 내가 처음으로 꿈을 키웠던 곳이다. 어린 시절 남들은 소풍으로 오는 곳인 월명공원에서 훈련을 했고, 호기심이 많던 어린이는 잠깐의 쉬는 시간이 생기면 해망동 비릿한 짠 내에 이끌려 바로 앞 바닷가에 나가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무척이나 잘 정돈된 수산시장이 어릴 때 우리에겐 놀이터였고, 앞마당 같은 곳이었으며 때로는 지옥같은 곳이기도 했다.(줄임)
월명공원 꼭대기 수시탑까지 나 있는 수백 개의 계단들…. 하루에도 수십 번 종아리가 터져라 가쁜 숨을 내쉬며 그 계단을 뛰어올랐다. 끝도 없는 바닷길을 따라 공단이 있는 그곳까지 러닝을 하며 체력을 다졌다. 그 어린 나이에 훈련이 너무 힘들어 철없게도 가끔은 '이 바다에 발을 헛디뎌 빠지면 하루는 훈련을 쉴 수 있겠지'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힘들었지만 따뜻한 바닷바람이 엄마 품같이 느껴져 힘듦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그곳에 대한 기억이 내 머릿속에 공존한다."
수시탑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
자신의 공직 생활 35년 경험들을 담담하게 엮은 <잘 놀다 갑니다>(저자 정진술)에 따르면 수시탑은 1966년 부임한 박동필 군산 시장이 지역의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물로 세웠다. 처음엔 탑 높이를 30m로 계획했으나 중간에 28m로 수정됐다. 이름도 '춘망탑(春望塔)'이었으나 준공 때 군산경제를 활성화 시키자는 뜻으로 '성시탑(盛市塔)'이라 했다가 다시 '수시탑'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설계자는 강명구(1917~?)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중앙대 교수 역임) 시공회사는 향토기업인 상호토건(대표 이화영)이 맡았다. 박동필 시장은 강명구 교수를 찾아가 설계를 의뢰하였다. 신석정(1907~1974) 시인을 군산으로 초빙, 함께 월명공원에 올라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춘망탑'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春望·춘망>은 '나라는 망했어도 산천초목은 있어'로 시작되는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제목으로 알려진다.
정진술(67)씨는 군산시청 정보통신과 계장으로 근무하던 1999년 강명구 교수를 비롯해 박동필 전 군산시장, 한상준 전 군산시 도시과장(당시 공사감독) 등과 전화통화, 서신, 만남 등을 통해 수시탑에 숨겨진 비밀들을 밝혀낸 주인공이다. 아래는 그의 회고담이다.
"그때(1999) 나는 군산 관련 정보를 시민과 국내외 분들에게 제공하는 업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일을 하다 보니 기록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사명감도 느끼게 되었다. 먼저 군산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수시탑 관련 기록물을 찾아봤으나 설계자 이름과 탑의 높이, 형상, 건립 연도 등만 구전으로 전해질 뿐. 남아 있는 자료가 너무 빈약해 피상적인 기록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설계서와 공사 감독일지, 공사현장 사진 등은 공문서 보관규정에 의거 모두 폐기처분이 됐기 때문이었다. 실망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개항 100주년을 맞아 진포대첩 기념탑 건립 구상이 발표된 시기여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설계자인 강명구 교수를 찾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 곳에 연락처를 남긴 끝에 강 교수와 직접 통화도 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숨겨진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박동필 전 군산시장은 전주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 면담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하였다. 1966년 8월 제16대 군산시장으로 부임한 박동필 시장은 번창했던 지역 경기가 완전히 침체되어 과거 영광을 찾아볼 수 없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이탈리아의 어느 항구에 있다는 모녀상(망부석)을 모델로 군산 번영을 상징하는 탑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군산시사>에는 수시탑이 1967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히는 1968년이다. 박동필 시장 재임(1966년 8월~1968년 4월) 기간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준공식은 17대 한정수 시장이 부임해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 교수는 편지 마지막에 '탑의 돛 부분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됐어야 함에도 자재와 기술부족으로 대부분 소각(小角)을 이루고 있다. 차후 보수 시에는 원안대로 수정하는 공사가 필요하다'고 간곡히 당부했다."
정씨는 "한정수 시장 시절인 1968년 준공식을 했다는 얘기는 박동필 전 시장의 증언"이라며 "박 전 시장은 전화인터뷰 말미에 정확한 위치는 기억할 수 없으나 설계도서 등 관련 자료(타임캡슐)를 땅에 묻었다는 말을 했다"고 부연했다. 정씨는 "그 후 공사를 감독했던 한상준 전 도시과장을 만나 문의했으나 (타임캡슐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라며 아쉬워했다.
강 교수가 정진술씨에게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1966년 어느 날 박동필 시장, 강명구 교수, 이화영 대표 등 셋이 모여 탑 건립을 위한 의견을 나눈다. 이들은 월명공원의 여러 봉우리 중 시내와 내항 어디에서도 눈에 잘 띄는 지금의 장소에 선박을 모델로 높이 30m의 탑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조형물 설계는 약식으로 디자인과 철근 배근에 이르기까지 강 교수가 맡았다.
공사는 예산과 기술, 장비부족 등으로 어렵게 진행됐다. 중앙에서 예산이 집행되지 않아 탑 높이가 2m 줄어든 28m로 수정되어 시공됐다. 모든 자재는 해망굴 입구 흥천사 부근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손수레로 운반했다. 탑도 약 30m 높이까지 동바리를 설치하고 어렵게 계단을 통해 모르타르를 등에 지고 날라 형태를 만들어 나갔다. 기초공사부터 완공까지 무척 난공사였던 것.
"수시탑 야경 안내문 바르게 수정해야"
정씨는 "(수시탑은) 월명산 정상에 있는 탑으로..."로 시작되는 '수시탑 야경 안내문'을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수시탑이 세워진 위치는 월명공원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이지 월명산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 "야간 조명도 화려함 보다는 처음 탑을 세울 때 목적에 따라 '봉화를 나타내는 붉은 색' 중심으로 연출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현재 수시탑 정면에는 사각 돌판 세 개에 한자로 '수·시·탑'을 음각해놓았는데, 1990년대 이전에는 탑 기둥에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탑 주변에 설치한 스테인리스 난간을 비롯해 '군산시 연혁', '군산 시민헌장' 등이 음각된 기둥의 석판도 준공 당시에는 없었으나 훗날 부착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진술 씨는 "건립한 지 어언 반세기가 지난 수시탑은 이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같은 존재가 됐다. 공사를 추진했던 분들도 진즉 고인이 됐고, 시공회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앞으로 월명공원 및 수시탑 관련 기록을 정리할 때는 설계자와 시공회사 대표 이름도 포함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