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다 들른 '후지동', 알고 보니 '조선 땅'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와서
항일 유적지와 함께하는 '겨울 만주기행' 여섯째 날. 아침 8시 45분 연길(옌지)을 출발, 항일시인 윤동주 묘소와 '3·13 반일의사 묘역'을 참배하고 곧바로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와 마주한 국경도시 도문(투먼)으로 이동했다.
버스가 묘역을 출발한 시각은 오전 10시 30분. 차에 놓고 내렸던 페트병의 생수는 그때까지 녹지 않아 손으로 흔들어가며 겨우 목을 축였다. 병을 흔들고 누르느라 짜증도 났지만,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고드름 따먹던 기분으로 깔깔대며 마셨다.
다음날 새벽 심양(선양) 민박집에 도착해서 알았는데, 여섯째 날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 2011년 만주기행 중 가장 추웠던 날로 기억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유난히 춥다고 생각했는데 얘기를 듣는 순간 칼바람에 떨던 일들이 떠오르며 끔찍스럽게 느껴졌다.
여름보다 겨울에 보는 북한은 부담 덜해
시계는 오전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차츰 북한의 산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에 안내했던 여성 가이드가 생각났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남북관계가 우호적어서 부담이 없었는데 요즘은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 가이드들도 멘트 할 때 조심스럽다"는 대목이 떠올라서였다.
당시 버스를 타고 가며 두만강에 대해 설명하던 가이드는 하얀 글씨로 '21세기 위대한 김정일 장군 만세!'라고 적힌 북한의 민둥산 능선을 가리키며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구호를 새겨놓았는지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물위로 조·중 국경선이 그어진 두만강(547.8km)은 백두산 동부 실개천(석을수)에서 시작하여 소홍단수(76.5㎞)·서두수(173.1㎞)·연면수(80㎞) 등의 지류를 합해 무산(茂山)으로 나가 성천수(76.3㎞)를 합하고 함경북도 회령, 온성을 지나 남쪽으로 기울어 동해로 흐른다.
민족의 눈물과 한을 품고 흐르는 두만강은 꽁꽁 얼었고, 잡초가 무성했던 자리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잿빛이었던 강물과 칙칙했던 땅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동식물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름보다 동면에 들어간 추운 겨울에 보는 북한은 부담이 덜했다.
버스가 달리는 방향에 따라 강폭은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했다. 안쓰럽게 보일 정도로 조용했던 마을과 가옥들은 주변이 초록에서 하얗게 변했을 뿐 모습은 작년 여름 그대로였다. 6개월 만에 대하는 반가움과 촬영도 마음대로 못 하는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조상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후지동'
누군가가 화장실 얘기를 꺼냈다. 버스는 기다렸다는 듯 농가 몇 채와 창고가 보이는 작은 마을 앞에서 멈추었다. 길가에는 '후지동(后地洞)'이라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마을 이름이 범상치 않았다. 왕비를 뜻하는 '后'로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한자로 쓴 초시(超市)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가게 간판인 모양이었다. 중국은 슈퍼마켓을 '챠오지 스창(超級市場)'으로 번역하는데 간단하게 '차오스(초시)'라 부른단다. 신조어라고 했다. 고향동네 점포들이 'ㅇㅇ상회' 간판을 'ㅇㅇ슈퍼'로 바꿔 달기 시작하던 1960년대가 떠올랐다.
십자가 탑이 서 있는 걸 보니 교회도 있는 모양이었다. 중국은 믿는 자유는 있지만, 외국인의 선교(포교) 자유는 없다고 한다. 중국 역시 많은 선교사가 순교했고, 지금도 걸리면 처벌받는단다. 조선족자치주라고 하지만,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가 있다니 놀라웠다.
송아지 두 마리가 산책을 나왔는지, 눈 쌓인 도로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달리는 트럭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만주에서는 흔한 광경이지만, 볼 때마다 웃음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송아지를 비켜가거나 기다려주는 운전기사들의 여유가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후지동은 길림성 도문시 월청진 석건촌에 속한 작은 마을이다. 석건촌은 150년의 개척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주 1세대들이 풍수설에 의해 지은 종갓집 규모의 기와집 서너 채가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어 조상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지역이라고 한다.
지나다 들른 '후지동', 알고 보니 '조선 땅'
마을을 돌아보다가 붉은 벽돌로 지은 창고 벽에 흰 페인트로 써놓은 한글 구호가 조금 어색하면서도 정겨웠다. '서로 관심 애호하여 생명을 환락하자!'라고 적어놓았는데 '작은 농사일 하나도 형제처럼 돕고 의지하면서 인생을 즐겁게 보내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만주의 농가 마당도 한가롭게 느껴졌다. 문득 '조선인들이 터를 잡은 곳에는 벼가 자란다'는 말이 떠올랐다. 만주의 황무지를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훈춘벌, 평강벌, 세전벌 등)로 바꾸어 놓은 개척자는 조선 유민들이었음을 입증하고 있어서였다.
<연변일보>(2008년 2월26일)에 의하면 후지동, 장거리, 하석건 등으로 불리던 일제강점기 석건촌은 주민이 3500여 명으로 도문이 '회막동'(灰幕洞)으로 불리던 1920년-1930년대까지 도문, 남양 지역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였다고 한다.
석건촌 사람들은 광복(1945) 전까지 두만강 건너 동광, 종성 일대에서 청명, 단오, 추석 등 민족의 고유명절에 치르는 각종 대회에 참가했는데 씨름, 그네, 축구는 석건촌의 대표 운동 종목으로 꼽혔단다.
당시 석건촌은 여인숙 서른두 개에 화류계 골목까지 조성될 정도로 경제가 활발했으며 지금도 '륙군지'(일본군들이 병영자리)라는 밭 이름이 있다고 한다. 1950년대만 해도 석건촌 변방부대에 통행증을 내고 '석건촌해관'(세관)을 거쳐 나룻배로 조선(북한)을 오갔단다.
후지동의 150년 개척사는 '서쪽으로 압록(鴨綠), 동쪽으로는 토문(土門)을 경계로 정한다.'는 조·청 합의(1712년)와도 일치해서 후지동이 예전에 조선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간도땅을 차지하기 위해 1933년 연길현 산하 촌락 회막동을 '투먼'으로 고치고 '투먼진'으로 승격시켰다.
화장실에서 비명, 버스에서 웃음으로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더럽고 끔찍했다", "무서워서 혼났다", "냄새가 지독해서 코가 아팠다" 등등. 비명을 지르는 여학생도 있었다. 그래도 시골의 작은 마을에 공중화장실이 있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도시에서도 보기 어려웠기 때문.
화장실은 출입문 대신 시멘트 담으로 가려놓았고, 바닥까지 훤히 내려다보였으니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크기도 두 명이 겨우 들어가 대소변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협소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꽁꽁 얼어붙어 악취가 여름보다 덜했다는 것.
여학생들의 비명은 금방 웃음으로 바뀌었다. 짜증 날 정도로 불편했지만 처음 경험하는 일이어서 재미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른들도 추억담을 늘어놓으며 함께 했다. 화장실을 카메라에 담는 어른들도 마음은 어린 학생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버스에 올라 인원을 확인하고 도문을 향해 계속 달렸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사람들 체온의 도움을 받아 차내 온도계가 섭씨 10도를 가리켰다.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게 없었다. 온도가 올라가면서 창밖 풍경도 따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북한 남양시와 중국 도문시를 연결하는 도문철교(320m)를 지난 시각은 오전 11시 50분, 버스는 봉오저수지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뛰는 김좌진 나르는 홍범도'란 말이 유행하리만치 명성을 떨쳤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적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