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시민기자 <군산 해어화 100년> 펴내
군산의 기생 발자취 책으로 엮어 화제
일제강점기 군산에 존재했던 권번(券番)과 기생(妓生)들의 다양한 활동이 오롯이 담긴 책 <군산 해어화 100년>(300쪽: 편찬 조종안 기자)이 출간되어 화제다.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이해하는 꽃’이란 뜻으로 기생에게 붙여진 애칭이다.
조종안 기자는 시작 글에서 “그동안 만난 사람의 80%가 권번에서 어렵게 기예를 학습한 ‘생짜 기생’을 요정(요릿집) 종업원쯤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소화권번을 ‘명월관의 다른 이름’으로 오인하는가 하면, 성매매가 목적인 유곽과 기생들이 전통 가무를 연행했던 요정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많았다.”며 안타까움을 밝힌다.
“기생들은 신문물을 누구보다 일찍 받아들인 선구자”
‘잘못된 역사의 매듭은 오랜 시간 상처를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에 조 기자는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7~8년 전부터 기생 관련 자료(옛날 신문 및 사진, 문헌, 연구논문 등)를 모으기 시작했다”라며 “군산의 마지막 예기 김난주, 장금도 두 할머니를 20여 차례 만나 녹취도 하고, 함께 여행도 하고, 구술집도 만드는 등 그들의 삶을 정리했다”라고 그동안 과정을 설명한다.
<군산 해어화 100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기생들이 가무를 연행하는 일급요릿집이 5~6곳 있었으며, 세 개의 권번(군산권번, 보성권번, 소화권번)과 두 개 조합(한호예기조합, 군창예기조합)이 존재하였다. 군산 외곽인 대야에도 명월관이 있었으며 소화권번 권번장과 기생들이 제작한 기념비가 묻힌 장소도 확인했다. 동국사가 명산동 유곽 창기들의 순례지였으며 ‘권번 부채춤’ 본고장이 군산이란 것도 밝히고 있다.
조 기자는 “옛날 기생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 을사늑약(1905), 한일 강제합병(1910) 등 조국이 망해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들이었다.”라며 “망국의 설움을 직접 경험한 기생들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 촘촘한 감시망 속에서도 선진 문화를 가장 먼저 체화하면서 전통 예술을 계승 발전시킨 장본인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극장을 처음 접한 예인도 기생이었습니다. 1902년 협률사가 개관했을 때도 그들이 처음 무대에 올라 춤을 췄고. 서양의 포크댄스, 소셜댄스, 레뷰댄스 등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기생에게 가서 배우라 했습니다. 대중 앞에서 가무(歌舞)를 행하는 게 본업이었던 그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새로운 춤을 습득하고, 공연도 하였죠. 가요나 영화 제작을 앞두고 제일 먼저 기생에게 섭외가 들어갔다. 새로운 춤, 연기, 노래 모두 그녀들 몫이었던 것입니다.
기생들은 외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연기(演技), 무용, 노래, 악기 연주 등 예술에 대한 식견을 두루 갖춘 문화 엘리트이자, 신문물을 누구보다 일찍 받아들인 선구자들이었어요. 대중스타이자 신여성의 상징이기도 했던 그들은 훗날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숨겨야 했습니다. 손자 손녀가 알까 무서웠고, 아들 며느리 눈길이 두려웠고, 주변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이었죠. 세상은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오랫동안 그들을 천시했습니다. 식민치하라는 모순된 사회 체계에서도 전통 예술을 계승 발전시킨 장본인이었는데...”
군산 기생들, 거리시위 앞장서
책에 등장하는 기생이 100명에 이르는 것도 눈길을 끈다. 기생들의 주요 활동은 극장, 공회당 등에서 열리는 각종 음악회와 연주회 가극대회, 적성야학교 돕기 행사, 신파극 공연, 재만(在滿) 피란동포 및 국내 수재민 구호 성금, 사회 저명인사 부의금 등이 주를 이룬다. 일제에 의해 중앙지 신문이 정간되자 위험을 감수하고 ‘독자 위안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는 군산 기생들의 뜨거운 민족애와 강한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그래프이기도 하다.
또한, 단연회(斷煙會)를 조직하고, 토산품 애용을 위한 거리시위에 앞장서 참여하면서 주권 행사도 활발히 펼쳤다.
“군산시내 이십여 단체의 발기로 조직된 ‘우리물산장려선전회’에서는 (중간 줄임) 당국의 제한한 오십여 명의 각 단체 대표 중 선전위원 열사람은 일제히 토목으로 두루마기를 입고 토목버선에 조선집석이를 신었는데 더욱 가상한 것은 보성예기(普成藝妓), 한호예기(漢湖藝妓) 이십여 명은 명주저고리 백목치마 버선에 조선 미투리를 신고 수백 명의 군중은 뒤를 이었다···.(줄임)” (1923년 3월 4일 치 <동아일보> ‘군산 각 단체의 물산선전’에서)
특히 여덟 폭으로 만들어진 선전기(宣傳旗)에는 ‘전 조선적으로 모두가 일치단결하자!’는 뜻으로 조선 팔도 특산물이 각각 표기되어 있었다. 선전기 위에는 ‘우리물산 장려선전’이라 쓰고 한 폭, 한 폭에 각도의 생산지명을 표기하여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군산 기생들의 사회 활동은 극장, 공회당, 학교 강당 등에서 개최되는 각종 음악회와 연주회, 가극대회, 적성야학교 돕기 행사, 신파극 공연, 영화 상영 후원금과 동경(東京) 지진재해 의연금, 재만 피란 동포 및 국내외 수재민 구호 성금, 사회 저명인사 부의금 등이 주를 이룬다. 성금 액수가 대체로 남자들보다 많았고, 여사(女史)로 호칭하는 가정주부보다 적게는 3~4배, 많게는 5~10배나 되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조합 운영과 처우 개선 등에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나타냈다. 1930년대 중반에는 권번을 주식회사로 바꾸는 등 조직적인 자치활동도 펼쳤다.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노동단체에도 가입한다. 기생들의 다양한 활동은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잦은 자선공연과 지원 활동, 토산품 장려 및 단연(금연) 운동, 동정금 기탁 등이 그것이다.
1926년 1월에는 군산권번 기생들이 조선 최초로 노동단체에 가입해서 화류계에 혁신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군산 영신여학원 설립 모금운동 동참. 북간도 조선족자치주 룽징(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 운영비 지원, 하와이교포 군산 방문단 동정금과 이상재 선생 장례식 부의금 전달 등에서 찐한 형제애와 민족애가 느껴지기도. 옛날 기생들과 요즘 연예인들의 수입 비교도 흥미를 돋운다.
문화체육부 지원금으로 출간되어 의미 더해
<군산 해어화 100년>은 6월쯤 전자책으로 발행될 예정이다. 책에는 옛날신문 기사 및 광고 400여 개와 흑백사진 100여 장, 컬러사진 20여 장 등이 시대별로 수록됐다. 이 책은 한국문화원 연합회 2017년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 지원사업’의 하나로 문화체육관광부 지원금을 받아 출간되어 의미를 더한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됐다. 제1장은 기생의 기원과 조선 시대 기녀들의 삶, 제2장은 대한제국 시대 기생조합과 권번, 제3장은 일제강점기 군산 기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정리하였다. 제4장은 호남 최대 산수정 유곽, 제5장은 군산의 마지막 ‘생짜 기생’ 장금도 명인(군산시 향토유산 제20호)의 삶을 통해 격동기 기생들의 삶과 사회상을 조명한다.
인터넷 언론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2014년에 <군산 야구 100년사>를 펴냈던 조종안 기자는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역사바로잡기와 향토사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며 “졸필을 추천해주고 선정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