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을 함께, 에스콰이어 군산점 안만욱 대표
- 다시 태어나도 구두와 함께 살 것
- 에스콰이어 직원 최초로 대리점 개설 꿈 이뤄
- 중앙로상가발전협의회 회장 맡아 중앙로 상권 지키기에 앞장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치고, 한 가지 직업과 평생을 함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전문 기능직이 아닌 영업직으로 한 회사를 40년 가까이 다니는 게 가능했을까.
본사 직원으로 20년, 대리점 사업주로 17년째인 에스콰이어 군산점 안만욱 대표.
군대 제대 후인 스물 네 살 때인 1982년도 첫 직장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그 회사와 함께 일하고 있다. 이만하면 인연도 이런 질긴 인연이 있을까 싶다. 긴 세월 한결 같았다는 건 믿음의 다른 말이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구두를 살펴보라는 말이 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정갈하게 다듬고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은 기본자세이다. 구두와 함께 평생을 살아 온 안만욱 대표에게서 구두처럼 반듯한 삶을 본다.
첫 직장 에스콰이어가 마지막 직장이었으면
“제가 입사할 당시인 80년대 ‘에스콰이어’ 하면 명품으로 소문나 있었지요. 잘 나가던 명동점에는 영업사원 50명이 근무할 때였는데, 한 접이 100족인데도 다 팔을 정도였어요.”
성실함이 주특기이자 자랑인 그는 당시 제화업계의 선두 주자였던 에스콰이어 입사 이후 명동본점. 로얄호텔, 롯데호텔본점, 잠실점 등 큰 백화점 점포에는 모두 근무했다. 직원으로서 승승장구했던 이면에는 그의 성실과 끈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무역센터 백화점에 주임급 지점장으로 나갔을 때였어요. 당시만 해도 상품권이 유행하였고, 매출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 의존하였지요. 직원의 직급마다 상품권 판매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를 채우려고 신사동에서 양재동, 서초동, 역삼동, 시화공단, 구로공단을 돌아 경기도 전역을 안 뒤져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상품권을 팔러 다녔습니다.” 이런 성실함을 인정받아 그는 꿈을 이루게 된다.
그는 에스콰이어 회장과 면담하면서 회사 출신 최초로 대리점을 갖고 싶다고 꿈을 말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군산대리점 사업주와 본사가 계약을 해지하면서 결국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처음 직장에서 대리점 대료라는 꿈을 이뤘고, 지금까지 긴 인연을 이어왔으니 이 직장이 마지막 직장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안 대표는 때온 신물이 넘어 올 정도로 지겹다가도 새벽기도와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매장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천직임을 느낀다고 했다.
영업사원에서 대리점 사업주의 꿈을 이루다
지금은 메이커로 많아지고 돈 가진 사람들이 선택할 폭이 너무나도 넓어졌지만 한 때 한국 사회에서는 돈이 있어도 못하는 게 바로 대리점이었다. 1980년~1990년대가 그렇다.
에스콰이어도 소르젠테 등 패션을 겸하면서 잘나갔고, 극히 몇 명을 빼고는 전국의 대리점을 현지 직원을 뽑아 본사에서 직영 관리하였다. 이런 사정상 영업 사원이 대리점 직원도 아니고 사업주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신화적인 사건이었다.
안만욱 대표는 2002년 9월 7일 에스콰이어 본사 직원으로는 처음으로 군산대리점을 개설했다. 그 회사 직원 아무도 넘보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그는 월급쟁이로써는 가장 높은 곳을 밟은 인물이다.
그는 영동 겔럭시 앞의 작은 매장을 임대내서 문을 열었고 연간 15억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월드컵이 열리던 해에는 장사가 잘됐지요. 그런데 그 이후 상권이 나운동으로 갈리고 상품권 발행을 줄이면서 매출이 점점 줄어들었어요.”
영동 상권이 균열 조짐을 보인 건 이 때부터였다. 마이카 붐이 일어나 자가용 이용이 늘어나면서 주차할 곳이 마땅찮은 영동을 말하자면 돈 있는 소비층들이 외면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영동을 벗어나 중앙로 상권에 정착하다
안 대표는 옥구 선제리가 고향으로 옥구초와 자양중(옥구서중 1회)을 거쳐 공고와 인문계 종합으로 운영되었던 시절 군산고를 나왔다.
“서울에서 회사 다닐 때 친구들에게 ‘다신 군산에 안온다’고 큰 소리쳤지요.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친구들도 모르게 영동 가게를 오픈했는데 친구들이 지나가다 ‘너 언제 내려왔냐’고 반기더라고요. 그 이후로 가게 문턱이 닳도록 다녔는데 고맙단 말 한마디 못했네요.” 반듯하게 살아 온 그는 친구들에게도 반듯하다.
영동 상권이 예전 같지 않을 때였다. “월 380씩 임대료를 내면서 장사를 했는데, 건물 주인이 임대 기간이 남았는데도 아무 말 않고 매장을 팔아버렸어요. 할 수 없이 가게를 나와야 했지요.”
2008년 영동 매장에서 지금의 중앙로 매장으로 이전했고, 4년 후 집을 샀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 때 중앙로 상권으로 이주해 온 게 전화위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에스콰이어’라는 한 우물만 팠다. “한 우물만 파면 먹고산다는 말이 진리처럼 들렸지만 옛날 말이고, 요즘에 비추어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조건보고 옮겨 다니는 게 상식으로 굳은 영업 방식인데 어느 땐 ‘나만 바보같이 피해보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안 대표는 “어느 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가죽 냄새가 지겹다.”라고 말은 하면서도 “그런데도 나는 시작과 끝을 한 회사와 하고 있으니 그 질긴 인연은 참 모를 일이다.”라고 선문답처럼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중앙로상가발전협의회 회장 맡아 중앙로 상권 지키기에 앞장
군산지역 의류업 등 자영업이 어려움을 겪는 요즈음, 그나마 안정적으로 중앙로상가를 지키고 있는 건 중앙로상가발전협의회 안만욱 회장과 회원들의 역할이 컸다.
협의회를 2년째 이끌고 있는 안 회장은 “외지 사람들이 군산에서 놀고 자고, 돈을 쓸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면서, “중앙로에 관광객들이 와야만 이런저런 씀씀이를 유도할 수 있다.”고 했다.
또 “군산의 중심인 중앙로가 근대역사 지구에서 멀어지고 각종 지원에서 소외되는 게 아쉽다.”면서, “중앙로에 대한 중요성 조명과 함께 오고 싶은 거리, 혹은 걷고 싶은 거리 등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이를 육성하는 일도 모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동과 월명동, 신창·신흥동을 묶어서 근대역사경관지구로 각종 지원을 하고 있는데, 중앙로까지 연장해서 동반 발전시켜주는 시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로와 함께 영동이 같이 상생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건 원도심 살리기의 기본이라고 했다.
그는 또 “터미널에서부터 시작하여 옛 역앞 사거리를 거쳐 중앙로를 걸으면서 문화재로 지정된 둔율동 성당과 군산 최초인 개복교회를 돌아보는 종교 유적 관광 루트를 만들고, 소설 ‘탁류’의 지명들이 살아남은 중앙로 일대의 샛길을 연결하는 ‘걷고 싶은 탁류길’을 만드는 일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