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노헤 스님 "일제강점기 첨병 노릇 사죄드린다"
[책소개] 일본 조동종 이치노헤 스님의 <조선침략 참회기>
“우리 조동종(曹洞宗·일본 불교의 대표 종단)은 메이지유신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 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군산시 금광동 동국사(東國寺) 경내에 세워진 ‘참사문비’ 앞부분이다. 이 비(碑)는 <조선침략 참회기>(정옥희 옮김·동국대학교 출판)를 펴낸 일본 조동종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스님 주도로 2012년 9월 세워졌다. 이치노헤 스님은 일본 아오모리현 소재 운상사(雲祥寺) 주지이다. 그는 몇 년 전 기자와 만났을 때도 “일본 제국주의 첨병역할을 했던 조동종의 만행은 불교 정신을 무시한 행위였다”고 고백하고 참회했다.
이치노헤 스님은 동국사에 참사문비를 세운 이후 일본 우익세력에게는 협박을, 자신이 속한 종단으로부터는 참사문비 철거를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속한 종단이 과거 총독부 앞잡이로 조선인에 가한 만행을 낱낱이 파헤친다. 특히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신사 참배를 계속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스님은 <조선침략 참회기> 서두에서 “종교와 정치는 표면상으로는 별개지만 실상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과거를 검증하는 것은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1992년 일본 조동종이 일제 침략전쟁에 가담한 것을 참회하고 사죄하는 글(참사문)을 내외에 발표한 것은 획기적이었고, 포스트콜로니얼(식민지 이후)의 올바른 길을 제시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분단된 남북 두 나라, 한국·조선으로 불러야!"
이치노헤 스님은 '식민지 시대 조선'과 그 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패배의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조선(朝鮮)'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음을 이해해 달라고 당부한다. 이어 '조선'을 그냥 조선이라고 하기에는 결연한 마음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이라는 말에 대한 애틋함은 일본(불교계 포함)의 조선 지배가 초래한 결과라고 토로한다.
그러면서 그는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국호를 정할 때 '조광선려'(朝光鮮麗)에서 따온 '朝鮮'과 북한을 지칭하는 '북조선'을 거론한다. '朝鮮'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음에도 1910년 일본이 식민지화하면서 되돌려놓았고, '북조선' 역시 일본과 국교는 없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이란다. 따라서 분단국인 남북 두 나라 국호는 한국·조선, 혹은 조선·한국으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서울의 호화호텔 '웨스턴조선'도 지적한다.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기 위해 원구단을 건립한 자리로 1913년 조선총독부가 모든 시설을 철거하고 경성철도 호텔을 건립했고, 이승만에 의해 '조선호텔'로 불리다가 외국인 투자자에 의해 1979년 '웨스턴조선'으로 개칭된다. 이에 이치노헤 스님은 “식민지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해서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조선'이 이곳만큼은 당당하게 불리고 있다”며 일본 자본이었다고 해도 가능했겠는지 의문을 던진다.
기자는 자주색 구두만 신어도 경찰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시인이 붉은색 꽃이 들어간 작품을 발표하거나 빨간색 메모지를 사용해도 형사가 그 의미를 캐묻던 시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또한, 당시에는 북한을 '북괴'나 '괴뢰'라고 해야지 '북조선'이라 했다가는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웨스턴조선의 '조선'이 당당하게 불리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대목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완성은 우리들의 몫
일본 불교는 강화도조약 체결(1876) 이듬해부터 한국을 침략하였다. 제1호 인물은 오타나파(大谷派)의 오쿠무라 엔신. 그의 선조 오쿠무라 조신(奥村爭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할 때 부산에 사찰을 세우고 종군(從軍)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에 이치노헤 스님은 표면적으로는 불교를 포교하는 것처럼 하면서 조상이 이루지 못했던 꿈, 즉 정부가 의도한 침략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조선침략 참회기>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가 깊숙이 개입한 사실과 조선 침략을 위해 일으킨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 때 일본 승려들의 첨병 역할,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던 날 한반도 전역 포교소에서 축하 법요식을 봉행하는 등 일제의 조선인 황민화 정책에 조동종이 앞장선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특히 안중근 의사(1879~1910)에 관해서는 오직 조국독립을 위해 살았던 안 의사 생애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에서 있었던 일련의 연극, 서울 남산 공원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 방문기, <내 마음속의 안중근>(부제: 치바 도시치-합장의 세계) 저자 사이토 야스히코 스님(다이린사 주지)을 만나 그가 전하는 이야기 내용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다이린사(大林寺) 주지 사이토 야스히코 스님을 만나러 갔다.(중략) <내 마음속의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간수를 했던 치바 도시치의 안중근에 대한 공경과 흠모하는 마음을 그린 작품이다. 치바 도시치는 다이린사의 신자였다. 사이토 주지의 필치는 치바 도시치의 심정과 같이 한없이 부드럽다. 내 마음은 치바 도시치의 마음임과 동시에 사이토 주지의 마음이기도 한 것 같다. 꼭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조선침략 참회기> 83쪽)
짧은 문장에서 안중근 의사를 향한 이치노헤 스님의 존경심과 애틋함이 묻어난다. 그는 “이토의 동양평화 목표는 동양의 지배이고, 안중근은 동양 국가들의 자립·공존을 목표로 삼았던 것 같다”며 “옥중의 안 의사가 처형을 이틀 앞두고 집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미완의 작품 '동양평화론'을 실천하고 완성시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인지도 모른다”며 숨을 고른다.
잔잔한 감동 자아내는 일본 스님의 참회기
종걸 스님(동국사 주지)에 따르면 이치노헤 스님은 책 인세를 받지 않기로 약속했다 한다. 일본 불교가 한국에서 저지른 일들을 좀 더 많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이치노헤 스님은 안중근의사와 그의 아들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책을 출판했단다. 또한, 일본에서 경매로 사들인 자료들을 군산시와 동국사에 기증해왔으며 지금도 진행형이다.
"식민지 조선은 36년 동안 천황의 이름으로 지배당하고 수탈당하고,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소멸을 강요당했다. 조동종도 그에 가담했다. 그 일을 지금의 조동종은 얼마나 이해하고 반성하고 있을까? (상대방)고통은 내 몸으로 바꾸어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의 고뇌에 다가가지 않고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같은 책 345쪽)
한국과 일본은 해방 후 외교관계가 단절됐다가 1965년 한일협정 타결로 국교가 수립된다. 우리에게 불리하고 굴욕적인 협정이었다. 그럼에도 한일관계는 격랑에 휩쓸려왔고 작년에도 올해도 일본 각료들의 잇따른 망언과 신사참배, '욱일기 논쟁' 등으로 반일 감정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때 일본 스님의 참회기는 불법, 부정에 항거하는 광화문광장의 촛불처럼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조선침략 참회기>는 5장으로 나눠 정리됐다. 제1장과 제2장은 일본과 조동종의 조선 침략사와 3·1독립만세운동 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특히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제3장은 군사도시 함경북도 나남과 일본군 위안소, 제4장은 함경북도 나남면 초뢰정 남선사 창립 및 포교활동 등을 다룬다. 제5장은 동국대학교와 군산 방문기, 군산 동국사 보존, 한일 불교의 전망과 나아갈 방향 등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