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는 모기 입 삐뚤어지기 전에 심어야"
시골 아주머니에게 듣는 김장배추 모종 이야기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8월 23일)가 지난 지도 열흘이 넘었다. 달이 바뀌어 하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9월 8일)가 코앞이다.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하다. 숭늉도 냉장고에서 꺼내 그냥 마시는 것보다는 데워먹는 게 느낌이 좋다. '간사한 게 사람마음'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다.
농촌의 들녘도 누런색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참깨 수확하랴, 김장배추 모종하랴 시골이 바빠지는 계절이다. 보름쯤 됐을까. 면사무소에 다녀오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대문 앞 그늘에 앉아 바둑판무늬의 모종판을 앞에 놓고 막대기로 콕콕 찌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기에 성큼 다가갔다.
"아주머니 지금 뭐하세요?"
"가을 짐장배추 포토 좀 허니라고유!"
아주머니는 눈길을 줄 것도 없이 대답만 하면서, 좁쌀 크기보다 작은 배추씨를 서너 개씩 작은 칸에 뿌리며 막대기로 흙을 골라준다. 배추씨가 파랗다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호랑나비 알만한 것이 머리통보다 큰 배추로 자라다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장 배추를 심는 모양인데 포토가 뭐예요?"
"지가 알간듀. 넘들이 포토라고 허니께 나도 그냥 허는 거시지···. 짐장(김장) 배추는 모기 입이 삐뜨러지기 전이 심어야 허그든유!"
"모기 입이 비뚤어지다니요. 지금이 여름인디···."
"하이고 아자씨도, 매칠 있으믄 처서잔유. 그날부터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니께 날짜에 맞쳐서 포토를 혀야 따땃헐 때 밭이다 옮겨심지유!"
김장배추는 가뭄을 타므로 모종판에서 자랄 때부터 물을 잘 주어야 한단다. 물을 넉넉하게 줘야 속이 꽉 차고 맛도 좋다는 것이다. 만약 잘못하면 벌레가 먼저 시식하고 사람은 그물 배추를 먹게 된다는 게 아주머니 설명이다.
아주머니는 무는 조금 늦게 심어도 되지만 배추는 처서 전에 파종을 마쳐야 한다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인분 냄새가 풍기는 상토를 담아 놓은 상자가 옆에 있는 걸 보니 움이 잘 트도록 영양가가 높은 흙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시내버스에서 자주 만나는 아주머니들에게, 한약방에서 약을 달이고 남은 찌꺼기를 구해서 거름으로 이용하면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병충해 없이 잘 자란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시나브로 떠올랐다. 해서 그 내용을 전했더니 아주머니가 그때서야 고개를 위로 들더니 "사람도 못 먹는 보약을 어치게 배추한티 멕인데유"라며 빙그레 웃었다.
아주머니는 처서와 백로가 언제인지 날짜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처서 전에 포토한 배추는 인큐베이터 노릇을 하는 모종판에서 12일-13일 정도 키웠다가 백로를 앞두고 밭에 옮겨 심는다. 아주머니는 싹이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며 아기 배추가 자라는 동안에 비가 많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녹아내려 배추농사를 망친다고 덧붙인다.
무·배추 모종 이야기, <농가월령가>에도 등장
아주머니 설명에 따르면 포토를 마치면 배추가 뿌리를 제대로 내리며 성장하는지 봐가면서 솎아내야 한다. 솎아낸 아기 배추로 국을 끓이면, 약간 풋내가 나면서도 입안에서 감도는 상큼한 맛이 그만이다. 밖에서 놀다 들어와 찬밥을 배춧국에 말아먹으면 꿀맛이었던 코슬리개 시절이 아슴하게 그려졌다.
된장을 풀어서 끓인 아기배춧국은 칼칼하고 개운하기에는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에는 환절기에 아기배춧국을 따라올 반찬이 없었다. 그동안 세월에 묻혀 지냈는데 배추가 자라는 것을 보니 부엌에서 자글자글 끓던 냄비와 어머니 손맛이 떠올랐다.
‘김장할 무와 배추는 늦지 않게 심어야 한다’는 말은 조선 후기 문인 정학유(丁學游:1786∼1855)가 지은 것으로 알려지는 <농가월령가> 7월령에도 나온다.
“칠월이라 맹추(초가을) 되니 입추 처서 절기로다
화성은 서류하고 미성은 중천이라
늦더위 있다 한들 절서야(계절을) 속일소냐(줄임)
꼴 거두어 김매기 벼포기에 피고르기
낫 벼러 두렁깎기 선산에 벌초하기
거름풀 많이 베어 더미 지어 모아 놓고
자채논에(이른 논에) 새보기와 오조밭에(이른 밭에) 정의아비(허수아비)
밭가에 길도 닦고 복사(덮인 흙)도 쳐 올리소
살지고(기름지고) 연한 밭에 거름하고 익게(깊게) 갈아
김장할 무우 배추 남먼저 심어 놓고....” (한국콘텐츠진흥원)
<농가월령가>는 달과 계절에 따라 1년 동안 농가에서 실천해야 할 일들과 세시풍속을 읊은 월령체(일명 달거리) 가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7월령은 무·배추 파종 외에 칠석날 견우직녀의 이별과 비, 김매기, 피고르기, 선산 벌초하기 등 추석 명절을 앞둔 농촌의 고즈넉한 풍경을 세세히 보여주고 있다.
농촌에서는 처서보다 한 절기 빠른 입추가 지나면 겨울을 대비하기 시작하는데 김장용 배추 포토를 처서 전에 끝내려는 이유도 강추위가 일찍 찾아와 배추가 자라는 중간에 얼어버릴 것에 대한 대비책으로 알려진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여름 내내 지치고 짜증나게 했던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살랑살랑 어깨를 스치는 바람에서도 가을 기운이 완연히 느껴진다. 누렇게 변해가는 십자들녘과 청잣빛 하늘로 두둥실 떠가는 하얀 구름들이 천고마비의 계절로 바뀌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