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소리로 일본 사람들 울려보고 싶어..."
[인터뷰] 21세기 아주 특별한 광대, 최영준 변사를 만나다
연극배우, 싱어송라이터, 무성영화 변사, 개그맨, 라디오 DJ···.
다재다능한 연예인 최영준(65)씨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최씨는 이 시대 마지막 무성영화 변사로 활동하면서 연극무대에도 오르고, 개그도 하고, 라디오 DJ도 하고 노래를 직접 만들기도 하는 등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알려졌다. KBS 신인 개그맨 시절인 1990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부른 가수이기도 하다.
긴 세월은 아니지만, 좌절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최씨. 그는 배고프고 가난했던 연극배우 시절의 쓰디쓴 경험들이 새로운 무대 적응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기획도 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는 등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꽹과리까지 치는 아주 특별한 광대다.
76년 연극배우로 데뷔... 30년째 무성영화 변사로 활약
최영준은 1954년 여름 부산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 초중고와 대학을 수도권에서 다닌다. 학창시절 꿈은 끝내주는 연극배우,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에 미치기 시작한다. 밥보다 연극이 더 좋았던 그는 대학도 1년 다니다가 그만둔다. 1976년 마침내 꿈을 이룬다. 그해 '극단 76'에 입단 <관객모독>으로 데뷔한 것. 그 후 <리어왕>(광대 역), <요지경>, 신파극 <월급날> 등에 출연한다.
연극판에서 1인극으로 잔뼈가 굵은 최영준은 나이 서른일곱에 KBS 개그맨 공채 시험에 합격, 주위를 놀라게 한다. 재치와 탄탄한 연기력으로 <유머 1번지>, <6시 내고향> 등에서 소금 역할을 하였고, TBN 한국교통방송 <최영준의 한밤의 교차로> 프로를 17년 진행해온 최씨는 타고난 입담으로 30년째 무성영화 변사로 활약해오고 있다.
빽빽한 스케줄 속에서도 지난해(2017) 가을 8집 앨범 <아비>를 발표한다. 앨범에 실린 노래는 <2002년 월드컵>(viva 코리아)을 비롯해 <허수아비> <골목길 풍경> <막걸리 심부름> <양은 도시락> <연탄 한장> <추억의 불량식품> 등 21곡, 모두 자작곡으로 가사는 물론 제목에서도 해학과 향토색이 짙게 묻어난다.
20여 회의 미주 순회공연을 통해 교포들의 눈물샘을 자극해온 최씨는 글로벌 변사로 발돋움 중이다. 2017년 1월 LA 한인타운 노인 및 커뮤니티 센터에서 설날을 맞은 시니어들을 상대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 변사극을 공연, 호평을 받았다. 교포들로부터 21세기형 신파극 변사로 평가받는 그는 오는 10월 LA 윌셔이벨극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앞두고 있다.
지난 11일(토) 최영준 변사를 군산의 모 카페에서 만났다. 아래는 최 변사와의 인터뷰와 주고받은 메일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 및 대학을 수도권에서 다닌 이유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으로 이사해서 수송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실직으로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인천으로 옮겨 서울로 기차통학을 했다. 그때 생활이 참 어려웠다.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하공대 조선공학과에 합격했으나 1년 다니고 생각한 게 있어 자퇴했다. 당시 목적은 연극이지 취업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분야 넘나들 수 있었던 비결은 '연극 정신'
- 학창시절 최영준은 어떤 학생이었나?
"반항아 기질이 다분했다고 할까. 단체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뭔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다. 아침조회 때 줄 서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생활하다 보니 지각이 잦았고, 담임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체벌을 견뎌내며 희열을 느낄 정도였으니... 공부도 내가 좋아하는 과목(국어, 한자)은 열심히 하고 싫어하는 과목(화학, 물리, 수학)은 안 했다. 고등학생 때 연극에 미치면서 절대 취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이뤄졌다. (웃음)"
- 1976년 데뷔 후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 수 있었던 비결은?
"첫째는 연극 정신이다. 연극은 영화와 달리 스토리가 기록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의 가슴에는 남는다. 한 번의 기억이 평생 갈 수 있는 게 연극이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을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한다. 연극배우 시절 가난과 고난을 이겨냈던 용기와 투지가 생소한 분야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등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연극배우 시절 희곡도 쓰고, 연출도 하고, 신파극에 감명받아 <극단 미추홀>(1981), <극단 예전>(1984)을 창단하는 등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면서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다. 1987년엔 무성영화 변사공연 전문 1인 극단인 <최영준 유랑극단>을 창단했는데, 그러한 열정과 도전 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최영준은 없었을 것이다."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 미주공연 개척
- 서른일곱 나이로 늦깎이 개그맨이 됐다. 특별한 목적이라도 있었나?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KBS 개그맨 공채에 응시했던 1990년 그때 나는 연극계에서 꽤 알아주는 배우로 성장해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한편 먹고살기 위한 도전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한 자구책으로 '알바(아르바이트)'를 했던 거다. 그래서 더 열심히 뛰었는지도 모른다."
- 미주 공연을 20여 회 이어오고 있다. 공연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1987년으로 기억한다. 그때 직접 비자를 만들어 LA, 뉴욕 등지의 기획사(언론사) 임원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성사시켰다. 첫 공연은 윌셔이벨 극장(1500석)을 가득 메운 관객 앞에서 <이수일과 심순애>를 했다. 그때 객석의 박수 소리가 폭풍우가 몰고 온 파도처럼 격렬하게 느껴졌다. <청춘고백>을 부를 때는 객석이 울음바다가 됐다. 그 후 1~2년에 한 번씩 미주공연을 해오고 있다."
- 미주 순회공연 뒷이야기도 많을 것 같은데?
"에피소드나 뒷이야기가 별로 없다. 왜냐면 공연을 앞두고 시간이 나면 연습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하나 기억하는 게 있다. 미국에서 교포를 상대로 공연할 때는 끝나고 출입구에 나와 인사를 건네며 배웅한다. 서양은 헤어질 때 인사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한국은 상대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는 게 고유의 정서다. 미주 교포들이 그러한 정서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을 거쳐 알래스카까지 가서 공연했는데, 그날도 끝나고 출입구에 나와 인사를 건네며 배웅했다. 그때 어느 꼬부랑 할머니가 귀국할 때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손수건에 싼 20달러를 손에 꼭 쥐여주는데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주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면서 받았다. 그러한 돈을 어떻게 쓰겠나. 지금도 20만 달러짜리 보석처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미래 계획은 활동 영역을 일본으로 넓히는 일
- 주위로부터 '늘 연구하고 뭔가를 만들어 내는 연예인'으로 평가받는다. 다양한 아이디어 구상 비결은?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전에 앞서 대박을 기대하거나 돈에 무게를 두면 두려움이 밀려오고 실패할 확률도 높다. 앨범도 마찬가지다. 작년 가을 8집 <아비>를 제작할 때도 주문량이 많으면 '탱큐'이고 그렇지 못하면 발매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 항상 생각하고 그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것도 다양한 아이디어 구상의 비결이라 하겠다."
- 미래 계획은?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편이어서 그런지 계획도 많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신파극 무성영화는 1948년에 제작된 <검사와 여선생>(유형문화재) 하나뿐이라서 <홍도야 우지마라> <불효자는 웁니다> 두 편을 만들 계획이다. 가능하면 무성영화 박물관도 만들고 싶다.
또 하나는 활동 영역을 일본으로 넓히는 일이다. 일본에도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하는 신파가 있다. 무성영화도 200여 편 남아 있고, 변사도 10여 명 되는데 활동사진을 해설하는 단순 내레이터 정도이지 나처럼 등장인물 전체 목소리를 내면서 노래도 하는 변사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얘긴데 내 목소리로 일본 사람들을 울려보고 싶어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