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묘가 숲이 우거진 산속에 있는 이유
이세윤 전 군산시의원이 전하는 군산 출신 독립유공자 이태로 선생
지난 5월 초. 군산시 개정면 운회리(송호마을)에 자리한 근대소리박물관(관장 이종간)을 찾았다가 놀라운 소식을 접하였다.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중앙언론사총국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펼쳤던 독립유공자 이태로 선생 이야기를 들었던 것. 이종간 관장이 보여주는 자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 후 옛날신문, 문헌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그 자료들을 정리하였다.-기자 말
군산향토사연구소 김양규(92) 소장은 <군산문화>(2009)에 기고한 글에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희생정신을 받들고 숭모하며 감사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난을 극복한 자랑스러운 항쟁사와 애국지사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소장은 "우리는 1986년 11월 은파호수공원 입구에 군산·옥구 출신 독립운동가 공적 기념탑을 세우고 유공자(18명) 명단을 각인했다. 문제는 1986년 이후 유공자로 서훈 받은 45명이 각명되지 않았다. 옆에 기념탑을 하나 더 세워 그분들의 명단을 각인하는 게 시급하다"고 덧붙인다.
이태로 선생, 다양한 항일독립운동 이끌어
김 소장이 거론한 유공자 45명을 분야별로 분류하면 의병활동(정홍기 1명), 호남 최초 삼일만세운동(고석주 등 18명), 학생 항일운동(한대석 등 2명), 국외 항일운동(강항년 등 5명), 옥구농민 항일항쟁(장태성 등 18명),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이태로 1명) 등이다. 그리고 8년이 지났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김 소장에게 물었다.
"독립운동 공적 기념탑 세우는 것 말고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북 서부보훈지청 보조금으로 책자 <순국선열과 애국지사>(2016)도 발간했고, 독립유공자도 45명에서 73명으로 늘었거든요. 선정 과정이 참 까다롭고 힘들었어요. 다섯 번 신청해서 선정된 분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기념탑을 하루빨리 세웠으면 합니다."
김 소장이 작성한 군산 출신 독립유공자 인명록(2015년 현재)에 따르면 의병항쟁 8명, 삼일만세운동 20명, 국내 항일운동 11명, '이엽사농장 소작쟁의(옥구농민항일항쟁)' 18명, 군자금 조달 4명, 학생 운동 3명, 만주 방면 4명, 광복군 1명, 중국 방면 1명, 일본방면 3명 등 모두 73명이다. 이는 전북의 시군 중 임실군 다음으로 많았다. 공훈 분야도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김 소장은 "국내 항일운동의 이태로(1899~1932) 선생은 노동운동 뿐 아니라 옥구농민항일항쟁에도 공적(소작쟁의 자문 및 대구 복심법원 공판에 군산 대표로 파견)이 있다"며 "1928년 9월경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고 부연했다.
책자 <순국선열과 애국지사>(87쪽)에 따르면 이태로 선생은 1925년 10월 전북청년연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결성된 항일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전북위원회 옥구(沃溝) 지역 책임자로 있으면서 대중의 계급의식과 항일의식 고취에 진력하였다. 같은 해(1927) 군산노동연맹과 옥구청년동맹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군산노동연맹 집행위원회에서 서무·재정 담당으로 선출되어 활동자금 모금 및 집행을 담당하였다.
독립유공자 이태로 선생의 생애
"전북 옥구군(현 군산시) 개정면 운회리 242에 본집을 둔 이태로(李泰魯·33) 씨는 옥구농민조합(沃溝農民組合)을 비롯하야 군산노동연맹(群山勞動聯盟)의 상무위원으로 군산 신간지회(群山新幹支會)의 상무 간사로 사회운동에 헌신하여 맹렬히 활동하든 이로서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 그동안 병으로 신음하다가 지난 28일에 자택에서 영면하엿다."
이태로 선생 죽음을 알리는 1932년 10월 3일 치 <동아일보> 기사다. 몇 가지 의아심이 들었다. 김양규 소장 책자는 2년 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는데 신문은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했다고 해서였다. 군산 신간지회(신간회) 활동 내용도 책자에 빠져 있었다. 이에 대해 김 소장은 "유족들 불만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량을 일률적으로 짧게 정리했고, 또 국가보훈처 자료만을 토대로 정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더욱 의아한 것은 얼마나 무거운 죄를 지었기에 군산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고, 감옥살이를 3년이나 했으며, 또 광복 60년이 지난 2005년에야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았느냐는 거였다. 궁금증들은 이세윤(71·이태로 선생 당질) 전 군산시의원에게 자료(재판관련 문서)를 건네받고, 함께 묘소를 돌아본 후 풀리기 시작했다.
"독립운동가 검거 선풍이 전국적으로 불 때였죠. 당숙 어른(이태로 선생)은 경성 법원(검찰)의 지시로 군산 경찰이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됐다고 합니다. 어른의 본적·출생지·거주지 등은 <동아일보>가 보도한 주소지와 같아요. 당시 당숙의 직업은 농업,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즉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노동의식을 함양시킨 죄였죠.
처음엔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감옥에서 죄가 추가됐다더군요. 경찰에 체포되기 전 취재 보도한 기사를 트집 잡았던 것이죠. 체구가 건장한 분이었는데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형기를 마치기 전에 내보냈다고 합니다. 당숙이 개정역에 도착했을 때 군산, 임피 등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환영했다고 들었어요."
고유문과 옛날신문에 따르면 이태로 선생은 광무 3년(1899)에 태어나 독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스물넷에 옥구 김 참봉댁 규수(金氏)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그 후 딸 둘을 뒀고, 집안 조카(聰世)를 양자로 들였다. 부인 김씨 역시 귀부인다운 용모에 문장력도 뛰어났다. 몸이 무척 유연했으며, 남자들도 따르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빨랐다고 한다.
명석한 두뇌에 명필이었던 이태로 선생은 20대에 <조선일보> <내외일보> 군산총국장 및 전북기자단 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26년 7월 조선문(한글) 신문잡지 군산기자단 발기회 때는 선언 규약 의안을 작성하였고,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피선됐다. 그 외 4년(1825~1928) 동안 신문배달부 동맹을 조직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펼쳤다.
1928년 2월 옥구농민 항일항쟁 공판을 취재 보도 하는 등 신문기자와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옥고를 치르고 1931년 8월 출소하였다. 출소 후 고문 후유증으로 1년여를 병석에서 신음하다가 1932년 9월 28일 순국했다. 당시 나이 서른셋. 병구완하던 부인(金氏)도 그해 섣달에 순절하였다.
길일을 잡아 이장하는 일만 남아
이태로 선생 묘소를 찾았다. 주소는 군산시 개정면 운회리(송호마을). 지번만 다를 뿐 옛 거주지와 같은 마을이다. 이세윤 전 시의원은 잡초가 무성한 봉분과 상석, 비석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무거운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이 전 시의원은 감회가 새로운 듯 머뭇거리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내 평심을 되찾으며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당숙 어른을 이곳에 모실 때 가족 모두가 쉬쉬했다고 합니다. '조선공산당'이라는 글자 때문이었죠. 근처에 문중 선산이 있음에도 누가 알까 무서워 구석진 이곳에 모셨던 것이죠. 석물(비석, 상석 등)은 1991년 4월 설치했는데, 그때도 저는 연락을 못 받았어요. 이데올로기가 뭔지···. 저하고 사촌 형님에게는 해가 될까 봐 연락을 안 했다고 합디다. 제가 옥구군 의원을 할 때였고 사촌 형은 경찰이었는데도 말이죠. 시대의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육군 장교 출신이고, 군산 시의원 경험도 있는데요.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신원조회 할 때마다 누가 이 양반(이태로 선생) 이름을 거론할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우리 집안에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어른이 있다는 말을 못 하던 시절이었잖아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산속을 장지로 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집안 내력을 철저히 숨기기 위한 방책이었죠. 훗날 보훈처가 국립묘지 안장을 권했음에도 알려지는 게 두려워 싫다고 했으니까요"
산에서 내려오려는데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했던 당숙의 삶을 대한민국 정부가 알아주기까지는 6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길일을 잡아 양지바른 곳으로 이장하는 일만 남았죠. 서훈을 받은 후에도 숨죽이고 지냈는데, 이제야 자랑스럽게 어른 이름을 조용히 불러봅니다"라는 이세윤 전 시의원의 한마디가 산사(山寺)의 법문처럼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