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뱅어떼 씨를 말린 주범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38)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군산 앞바다 어장(고군산군도 근해, 금강)에서 잡히는 주요 어류는 조기, 복어, 상어, 민어, 홍어, 뱅어, 갈치, 게, 삼치, 대구, 청어, 새우, 숭어, 병치, 가오리 등 35종에 달하였다. 그중 뱅어는 일본인도 무척 좋아하는 어류였으며 금강 하류에서 많이 잡혔다.
베도라치 치어(실치)를 뱅어로 착각하는 이를 종종 본다. 뱅어가 한반도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베도라치는 농어목, 뱅어는 뱅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다. 뱅어는 몸길이 10cm 쯤으로, 가늘고 긴 몸에 꼬리 부분은 편평하다. 머리는 위로 편평하며, 몸통은 투명한 은빛으로 배에 작고 검은 점이 줄지어 있다. 산란기(봄)에는 강으로 올라와 알을 낳는다.
옛 문헌에도 뱅어가 맛좋은 어류로 소개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경기도 양천현 토산조'는 서쪽 굴포(堀浦)에는 몹시 추운 시기에 언제나 백어(뱅어)가 나는데, 그 맛이 제일이어서 먼저 상공(上供)한다고 하였다. 한편 뱅어는 왕기(王氣)가 서린 곳에서 나므로 한강과 백마강에서만 잡힌다고 하였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에도 실려 있다. 얼음이 얼 때 경강(京江)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고 임한(林韓)과 임피(臨陂) 사이에서 정월과 2월에 잡은 것은 희고 국수처럼 가는데, 이를 먹으면 매우 좋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임피는 금강 하류(군산-나포 사이)를 가리킨다. 중종 1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도 뱅어를 군산(임피) 토산품으로 기록하였다.
1931년 어느 날 신문에 뱅어찌개 끓이는 법이 소개된 것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에도 많은 사람이 뱅어 요리를 즐겨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문은 뱅어는 겨울에 얼음구멍에서 잡는 것은 굵은 것. 봄가을에 나는 것은 중간크기라며 뱅어와 파를 적당히 썰어 기름과 깨소금을 치고 주물렀다가 끓는 물에 넣고 달걀을 풀어 휘저어 끓인다고 설명한다.
한때 군산을 풍성하게 했던 뱅어
위는 1936년 5월 11일 치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이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사진임에도 정겹고 넉넉함이 느껴진다. 사진에는 부연설명 없이 '금강(錦江) 하류(下流)에 몰켜든 백어선(白魚船)'이라고만 적었다. 여기에서 '白魚'는 뱅어의 한자 이름이다. 죽으면 몸이 하얗게 변해서 '백어'라 했다 한다, 지역에 따라 빙어(氷魚)로도 표기한다.
신문은 3년 후에도 풍성한 선창가를 실감나게 그린다. 1939년 5월 5일 치 신문은 <성어기 도래(渡來)로 군산항 대 활기>란 제목의 기사에서 호남의 대(大) 어항인 군산항은 막대한 어획량으로 생활하는 어민이 많다고 소개한다. 특히 1년 중 4~5월은 특산품인 조기, 뱅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때이므로 부두는 품팔이 노동자와 상인으로 대혼잡을 이루고, 금전 융통도 좋아 음식점들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그 옛날 군산의 봄은 금강과 월명산(105m) 기슭으로 스며들었다. 월명산 자락이 연한 청록으로 드러낼 즈음이면 째보선창으로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뱅어 떼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어부들이 그물을 올리면 희고 통통한 뱅어들이 우글거렸다. 알밴 뱅어가 가득한 그물이 고깃배보다 더 크게 보였다. 그 모습이 햇빛에 반사될 때는 눈이 부셨다.
군산문화원장을 지낸 이병훈(1925~2009) 시인은 생전에 "일제강점기 군산 거리를 누비는 뱅어 팔이 일본인들은 뱅어에 그만 황홀해 마구 사다가 먹었던 봄날 그럴 때를 생각한다."며 "금강의 뱅어잡이는 광복 후에도 어부들이 서포, 나포를 지나 강경 턱밑까지 올라가 작업했다,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집결지 군산은 온통 뱅어로 하얗게 변했다."고 회고했다.
그랬다. 뱅어 산란기가 되면 충청도 경기도 배들까지 금강 하구로 몰려들었다. 한꺼번에 70~80척이 뜨는 날도 있었다. 강바닥은 나뭇잎을 뿌려놓은 것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배를 댈 곳이 없어 이중삼중 굴비 엮듯 겹겹이 접안했다. 1.5톤~3톤 크기의 소형 풍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뱅어 떼가 금강 지류(일명 세느강)를 타고 구시장 입구까지 올라와 아이들에게까지 재미난 볼거리를 제공해줬으니 반가운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뱅어 떼, 씨를 말린 주범은 공장 폐수
소금 한 주먹 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던 금강의 뱅어.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59년 2월 19일 치 <경향신문>은 "군산만 일대는 화학 공장(고려제지, 한국주정, 풍국제지 등)이 즐비하여 뱅어 등의 어족이 멸망직전으로 어획도 2~3년 전부터 부쩍 줄어들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언론들이 '어족이 멸망 직전'이라고 경고했음에도 째보선창 주변 공장들은 폐수를 계속 방류하였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뱅어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1969년 4월 12일 치 신문은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함께 어물전의 싱싱한 생선이 입맛을 돋운다"며 "뱅어는 부안과 군산 것이 제일 좋다. 1근(375g)에 1백 35원~150원"이라고 가격까지 친절히 소개한다. 이때만 해도 뱅어가 서민들 밥상에 올랐다는 얘기다.
그러나 1975년 9월 13일 치 <동아일보>는 "(째보) 선창 바로 위 우풍화학, 주정공장에서 버리는 검붉은 폐수가 흘러들고 있고, 그래서 간장 빛깔이 된 개천 위에 붕어 등 민물고기 10여 마리가 흰 배를 드러낸 채 죽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물빛을 보니 민물고기가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라고 보도하였다. 폐수 방류 20여년 만에 어족의 씨를 말려버렸던 것.
해마다 봄이면 째보선창을 찾아왔던 반가운 손님 뱅어 떼. 이제는 전설 같은 옛날얘기가 되어버렸다. 뱅어가 멸종되는 과정을 쭈~욱 지켜본 시민의 한 사람으로 안타까움과 함께 탄식이 절로 나온다. 오호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