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곽 창기들이 동국사로 소풍 다닌 이유
국내 유일의 일본식 절 동국사의 숨은 볼거리들
군산시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는 국내 유일의 일본식 절이다. 일제강점기 세워진 일본식 절 500여개 가운데 동국사 하나만 남은 것. 이 절의 역사는 대한제국이 사법권을 강탈당하던 해(1909) 일본 최대 종단 조동종 우찌다 스님이 각국조계지 1조통(영화동)에 개창한 금강선사(금강사)에서 출발한다. 당시 금강사는 '포교소'였다.
1913년. 우찌다 스님은 웅본이평(熊本利平) 궁기가태랑(宮岐佳太郞) 대택등십랑(大澤藤十郞) 등 대 단가(檀家)들의 시주로 지금의 자리에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한다. 대웅전은 에도시대 건축양식으로 목재는 일본산 쓰기목이다. 지붕에 얹은 기와도 일본에서 직접 구워왔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경내에 들어서면 왜색 기운이 짙게 풍긴다.
차문불문, 참사문비, 평화의 소녀상 등에 얽힌 이야기
동국사 경내에 설치된 안내판은 ① 제1 정문 돌기둥 ② 제2 정문 돌기둥 ③ 평화의 소녀상 ④ 석조 33 관세음 보살상과 석조 12지 본존상 ⑤ 종각(鐘閣) ⑥ 참사문비 ⑦ 방공호 ⑧ 대나무 숲 ⑨ 봉안당 ⑩ 대웅전(등록문화재 제64호) ⑪ 소조석가여래 삼존상 및 복장유물 373점(보물 제1718호) ⑫ 쌍림열반도 ⑬ 금오계첩 ⑭ 시인 고은의 방(房) ⑮ 향적원 등 숨은 볼거리 15개를 소개한다.
그중 제2 정문 돌기둥 팻말에 새겨진 '차문불문'(此門不門)은 1951년 당시 청년 고은이 출가를 앞두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글귀로 알려진다. '차문불문'은 '이 문은 문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이라는 것. 하지만 고은 시인은 '이러한 글이 어떤 자유도 베풀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고 회고한다. 문이 아니라는 사실이야말로 엄청난 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각에는 1919년 일본 교토에서 주조했다는 동종(銅鐘)이 높다랗게 매달려 있다. 동종 몸통에 음각된 축원문은 일왕을 칭송하는 내용이어서 아픈 식민지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종각 옆에는 일본 조동종 스님들이 제국주의 첨병 역할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음각된 '참사문비'가 세워져 있다. 참사문비는 2012년 9월 이치노헤 스님 주도로 건립됐다. 비용도 일본 불교계에서 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참사문비 앞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멀리 일본을 처연하게 바라보며 서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해 1000여 명의 군산 시민이 낸 성금으로 2015년 8월 건립됐다. 성금 모금에는 일본 조동종 스님 등 일본인도 다수 참여해 의의를 더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사찰에 세워지기는 국내 처음으로 알려진다.
유곽 창기들의 소풍지이자 순례지였던 이유
월명산(105m) 중턱에 자리한 동국사는 일제강점기 화류계 여성들이 즐겨 찾았던 사찰이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호남에서 가장 큰 공창으로 알려진 산수정(지금의 명산동) 유곽 창기들의 소풍지이자 순례지였던 것. 일본 고급요릿집 게이샤들은 물론 권번 출신 조선 예기들도 동국사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 흔적들을 따라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동국사는 물매가 급하고 단청이 없는 대웅전과 높다랗게 매달린 동종도 특이하지만, 종각을 파수병처럼 에워싸고 있는 관음석불군(觀音石佛群: 석조 33 관세음보살상과 석조 12지 본존상)도 눈길을 끈다. 주술과 밀교적 성격이 강한 일본의 자안관음(子安觀音) 신앙을 엿볼 수 있어서다. 근기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현현하며 중생을 교화한다는 관음석불군은 1922년 당시 동국사 단가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성 21명이 주도해 조성했다고 전한다.
석조 12지 본존상 중 맨 앞자리 아기를 품은 석불상은 자안관세음으로 자생년(쥐) 수본존이며 허공장보살은 축, 인생년(소·범), 문수보살은 묘생년(토끼), 보현보살은 진, 사생년(용·뱀), 대세지보살은 오생년(말), 대일여래는 미, 신생년(양·잔나비), 부동존여래는 유생년(닭), 아미타불은 술, 해생년(개·돼지)에 태어난 중생을 보호해준다고 믿는 신앙이다.
기단 뒷면 명문에는 여성 21명의 이름과 그들이 관음강(觀音講)을 조직해 관음석불들을 관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대웅전 뒤쪽에서 발견된 33관음 좌대의 각 기단에는 단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단가들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이는 당시 동국사 관음강은 여성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남성이 참여하는 형태였음을 암시한다.
자안관음 신앙은 산모, 아이 모두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안산기원(安産祈願)에 근거를 둔다고 한다. 안산(安産)은 곧 순산(順産)을 의미한다. 따라서 출산을 앞두고 있거나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에게 안산기원은 자안관음 성립으로 귀결된다. 관음강 목적 역시 '안산기원'에 있었다고 한다.
관음석불군은 처음부터 종각 주위에 안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동국사는 관음석불을 뒷산(대나무 숲)으로 통하는 계단 입구부터 야산 곳곳에 2~3개씩 배치하는 형태를 취했다. 군산의 사회 현황을 항목별로 분류한 책 <군산개항사>(1925)에도 '사원 뒷산에 33개의 석상불을 건립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종각 옆 천불전과 다온 찻집 자리는 예전에 낮은 야산이었음)
관음석불군은 동국사 맞은편에 있던 산수정(명산동) 유곽 창기들이 소풍을 오거나 주민들이 방문하는 대중 유락시설 역할도 하였다. 방문객들이 소풍과 유락을 즐기면서 소원을 빌었던 것. 동국사 경내를 산책하며 관음보살을 참예(參詣)하는 것만으로도 일본 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 신사이고쿠 관음영장 1번 순례지)를 전부 순례했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는 군산의 일본 여성들이 동국사를 신불의 영험이 현저한 도량이자 순례지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1935년 발행된 <군산부사>는 군산 산수정에 일본인 유곽 8호가 있다고 기록했다. 일본 창기는 61명이 있었고, 조선인 유곽은 3호에 26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해 제작된 지도에서는 크고 작은 유곽 20여 곳이 발견된다. 여급들이 서비스하는 카페도 즐비했다. 따라서 유곽에 종사하는 창기도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걸 스님(동국사 주지)은 "기생을 비롯해 일본 유부녀들이 동국사로 소풍을 다니고 순례지로 선정한 것은 자안관음 신앙의 주체가 대체로 여성이므로 그에 연유했을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군산에 일본식 절이 7~8개 있었는데, 금강사(동국사)를 제외한 다른 절들은 자안관음 신앙을 신봉하는 종파가 아니었다"고 부연한다.
권번 출신 예기들도 동국사 즐겨 찾아
종각 앞 비석도 궁금증을 자아냈다. 1980년에 세운 비석 앞면에 '木川孺人尙綠香靈駕碑(목천유인상록향영가비)라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주인공(상록향)이 기생 이름처럼 느껴졌기 때문. 상석영(尙夕影)이란 별명도 있어 평범한 가정주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궁금증은 종걸 스님을 만나 풀 수 있었다. 상록향은 일제강점기 경남 진주에서 이름을 날리던 기생이었으며 은퇴 후 군산에 거주할 때는 불심이 깊은 동국사 신도였다는 것.
"상록향(1911~1980) 여사는 대구 출신이죠. 젊어서는 경남 진주에서 소문난 명기(名妓)였다고 합니다. 비를 세운 정찬홍 선생(군산 동산학원 설립자)과 언제 어떻게 연을 맺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군산에서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요. 상 여사가 전각이든 학교든 유치원이든 건물을 시주하고 싶다고 했는데 당시 주지 스님이 정중히 사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상록향)이 사후 제실로 사용할 제각을 지었다고 해요. 지금의 향적원 자리죠. 비석도 처음에는 제각 근처에 세웠는데 건물이 헐리면서 화단으로 이전했고, 작년 천불전 공사 때 가족에게 연락해서 제각은 없어졌지만 고인의 비석은 잘 모시겠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종각 옆으로 옮겼습니다. 여사님 영정 사진은 대웅전 위패실에 모셔져 있죠."
군산의 마지막 예기(藝妓)이자 국내 유일의 민살풀이춤 전승자 장금도(90) 명인은 "나도 한때는 친구와 동국사에 열심히 다녔는디 나중에 은적사(군산시 소룡동 설림산 서쪽에 있는 고찰)로 옮겼다"며 "상록향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장 명인은 "옛날 군산 소화권번 출신 기생들은 절(동국사)을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권번출신 예기들이 놀음(공연)을 펼치는 요정이 3~4곳 있었다. 일본 기생이 서비스하는 일본식 요정도 5~6곳 됐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군산에 일본 기생은 40~50명, 조선 기생은 30~40명이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요릿집 손님들은 벚꽃이 피는 봄이면 기생들과 경마장에도 가고, 근교 사찰이나 공원으로 나가 주흥을 즐겼다고 한다.
군산에는 소화권번 출신 기생 두 분이 생존해 있다. 장금도 할머니와 김난주(91) 할머니다. 기자는 두 할머니가 젊었을 때 내장사, 백양사, 속리산 법주사, 금산사 등에서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군용 지프차를 개조해서 만든 시발택시 앞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도 있었다. 이는 기생들이 평소 절을 좋아했으며 단골 한량들과 드라이브 여행도 즐겼음을 시사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나 죽고 윤회하여 다시 태어날 때까지 기간을 넷으로 나눈다. 이를 4유(생유, 본유, 사유, 중유)라 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생유(生有), 살아 숨 쉬는 존재를 본유(本有), 죽은 순간을 사유(死有)라 한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때가 중유(中有)이다. 중유에서 다시 태어날 곳을 기린다는 뜻에서 영가(靈駕)라 한단다. 영가비에 새겨진 상록향 역시 중생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유추해본다.
자안관음 신앙은 우리의 샤머니즘 종교인 가신신앙(家神信仰)에서 한 가정의 안방을 주관한다는 삼신할매를 연상시킨다. 삼신할매는 아이의 수태부터 임신, 출산, 양육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주는 자애로운 신으로 알려진다. 아파트문화가 정착되면서 사라졌지만, 옛날 삼신할매는 아이들의 수호신이었던 것. 안산과 육아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여성의 로망일 터, 조선 기생들도 한때 동국사를 즐겨 찾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일본학연구소 지미령 논문 <군산지역 西國&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