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 강한 ‘시민 의식’은 도시 발전의 원동력
김양규 군산문화원 고문이 꼽는 ‘군산의 일곱 항쟁사’
지난 27일 오후 김양규(92) 군산문화원 고문을 만났다. 김 고문과의 인터뷰는 어렵게 이뤄졌다. ‘늙은이가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며 두 번이나 사양했기 때문. 김 고문을 찾은 이유는 그가 향토사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제22회 <군산문화>(2009)에 연재한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일곱 가지 항쟁사’에 대해 부연 설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 고문이 꼽는 군산의 일곱 항쟁사는 ▲오성인의 충절(삼국 시대), ▲진포대첩의 빛나는 전적지(고려 시대), ▲최호 장군 사당 충의사(조선 시대), ▲ 의병장 임병찬(대한제국), ▲한강 이남 최초 삼일운동(일제강점기), ▲옥구농민 항일항쟁(일제강점기), ▲전국에서 제일 많은 학도병 전사자(대한민국) 등. 그중 최호 장군과 옥구 농민항쟁은 김 고문이 처음 발굴하고 정리한 것이어서 각별하다.
장수 비결은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비우는 것
김 고문의 올해 나이는 아흔둘. 고령임에도 밝고 건강한 모습에 위트가 넘친다. 약간 쇤듯한 목소리, 그래도 쇳소리처럼 카랑카랑하다. 놀라운 총기에 발음도 정확하다. 요즘에도 문화원 행사(추모제, 당산제 재현 등) 때 경과보고도 하고 역사탐방 가이드와 강의 요청이 들어오는 등 바쁘단다. 오래도록 건강을 지키면서 장수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침저녁으로 가벼운 체조를 허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잖여. 왜정시대에 배운 것이지. 근디 나는 마음이 건전하면 쇠약해지는 정신도 이끌어간다고 믿어. 무슨 말이냐면 노년에 건강을 유지하려면 건전한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건전한 정신이란 게 다른 게 아녀. 나이 먹을수록 시기심, 질투심 등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지. 누구와 다투지도 말고. 그게 장수 비결여.
그리고 또 하나는 글쓰기여. 왜냐. 노인들 건강에는 글 쓰는 것이 제일 좋댜. 그려서 틈틈이 자서전을 쓰지. 내가 자서전을 낸다고 허믄 남들이 웃겠지. 하지만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나하고 우리 자식들만 볼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혀. 요즘도 화단을 손질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지난날을 회상하고 회고하지. 대학 다닐 때 교수가 ‘역사는 기록’이라고 혔는디 나는 하나 더 붙여서 ‘인생은 기록’이라고 생각혀.”
김 고문은 어려서부터 오만 잡동사니를 모으고 또 기록하는 게 취미였다고 한다. 지금도 여행할 때는 항상 기록하고 영수증이나 차표 등을 보관한단다. 그는 “그렇게 이것저것 모으니까 하루는 아들이 뭐하시려고 그런 걸 다 모으시느냐고 묻기에 나 죽으면 모두 관(棺)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며 껄껄 웃는다.
면면히 이어진 항쟁 역사는 시민의 정신적 뿌리
김 고문은 일 욕심이 많아서, 아니면 향토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서 그런지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군산향토문화연구회 회장도 맡고 있다. 그 중간에 군산문화원장도 지냈다. 향토사 관련 서적도 3권이나 출간해서 베테랑 향토사학자 소리를 듣는다. 아래는 ‘군산 지역의 항쟁사와 민심’에 대한 그의 소견이다.
“노인이 잔소리 늘어놓는다고 허니까 말을 아껴야 허는디 자꾸 허게 되네.... 하여간 군산은 역대 선거에서 국회의원도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됐고, 대통령도 여당보다는 야당 후보 표가 훨씬 많이 나왔지. 결국, 반골 기질이 강한 야당 도시라는 얘기여. 끝까지 버티는 인내심과 불의에 맞서는 정의감도 투철하지. 왜 그런 줄 알어? 백제 시대부터 쭈~욱 받아온 외침을 막아내면서 자연스럽게 저항정신이 강해진 것이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항거했던 백제 오성인(五聖人), 세계 최초 함포 해전으로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순국한 최호 장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구국 투쟁을 하다가 유배지에서 자결한 돈헌 임병찬,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삼일독립만세운동, 옥구농민 항일항쟁 등에서 선인들의 호국, 저항 정신이 느껴지거든. 6·25전쟁 때 학도병 전사자도 전국에서 군산이 제일 많았다고. 그렇게 면면히 이어진 항쟁 역사가 시민의 정신적 뿌리가 됐지.”
김 고문은 “군산 지역에서 있었던 항쟁사는 전국의 시·도 광역자치단체(17개)와 기초 자치단체(총 226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역사”라며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더욱 빛나고 우리도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재일교포 교사로 근무하면서 향토사 소중함 깨달아
김 고문은 군산에서 나고 자랐다.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1944년 이리 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신문용지 생산 업체인 북선제지(페이퍼코리아 전신)에 들어간다. 그러나 월급은 일본인 친구들의 60%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일하는 부서도 달랐다. 부서를 바꿔 달라고 해도 쇠귀에 경 읽기. 나라 없는 서러움에 비애가 느껴져 입사 4개월 만에 사표를 던진다.
“농림학교 졸업허고 만철(滿鐵·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오라고 허는디도 안 가고 북선제지에 들어갔지. 그해 농업학교 졸업생 세 명(일본인 2명)이 같이 들어갔어. 그런디 일하는 부서도 다르고 월급도 차이나. 나는 현장 노동자처럼 근무하고 일본 애들은 사무실서 일하고 말여. 쉬는 시간에 갸들이 웃으면서 노는 게 부럽더라고, 책임자에게 부서를 바꿔달라고 혔지만 들은 척도 안 허는 거여. 그려서 그만뒀지.”
광복과 함께 자신의 모교인 군산신풍초등학교 교사로 들어가 6학년 담임을 맡는다. 1946년 여름 첫 제자들이 졸업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서울로 올라가 동국대학교 전문부 사학과를 수료하고 중학교 역사 교사가 된다. 김제와 옥구에서 역사 교사로 재직 중 6·25가 터지자 입대, 육군 장교가 된다.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면서 상처도 입고 금성 화랑무공훈장도 받은 그는 1956년 대위로 전역한다.
군산여상 교사 시절(1961) 정부가 시행하는 재일교포 파견교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일본 북해도 한국정부 파견교사 겸 삿포로 한국교포문화센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기록문화에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966년 귀국해서 향토사 연구를 교직과 병행했던 그는 정년퇴직(1993) 후에도 향토사 연구에 매진해왔다. 그가 향토사에 빠져든 계기도 특별하다.
“일본에 있으면서 놀라운 걸 봤어. 우리는 전쟁 상흔이 가시지 않은 때여서 비참하게 사는디 일본은 국민소득이 500불이나 되더라고. 주민들의 뜨거운 향토애가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걸 알았지. 우리는 고려 시대부터 쭈~욱 중앙집권제를 혔잖여. 근디 일본은 지방분권 정치가 자리 잡으면서 향토사가 발전헌 거여. 이것이 일본의 저력이라는 깨달음이 향토사에 매달리게 된 계기지.”
김 고문은 “지역민의 숨결이 느껴지는 찬란한 문화와 정신적 유산을 많이 간직한 고장일수록 긍지와 자부심이 강한 특색 있는 ‘시민 의식’이 형성된다”며 “이러한 시민 의식은 애향심 고취로 이어져 도시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