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민들 건의 외면하면 수산업 위기 닥쳐
임성식 전 군산시 수협조합장 “중국 어선들의 불법어획 근절해야”
임성식(80) 전 군산시 수협조합장. 그는 평생을 험한 파도와 싸워온 바다의 사나이다. 열네 살 때 1.5톤짜리 주꾸미 배 화장(火長:배에서 밥하는 사람)으로 어부 생활을 시작 기관장, 선장을 거쳐 스물아홉에 어엿한 선주가 된다. 그리고 1969년 가을 20톤짜리 중선(안강망)을 끌고 먼바다로 진출, 국내 최초로 '동지나해'(東中國海) 어장을 개척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정부의 어업 정책이 바뀌면서 상도 많이 받았다. 국민의 정부 시절(2002) 훈장도 받았다.
임씨는 군산에서 북서쪽으로 22km 떨어진 작은 섬 연도(煙島)가 고향이다. 보리죽 먹기도 어려운 가난한 집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임씨는 남다른 건강과 끈기를 밑천으로 자수성가한다. 임씨는 자비를 들여 연도에 전기를 끌어들이고 학교 담장을 쌓아주는 등 애향심도 남다르다. 어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돕기 위해 고향에서 어촌계장을 맡기도 하였다.
한때는 안강망 13척을 보유, ‘어부 갑부’, ‘안강망의 달인’ 소리를 들으며 서해 어장을 누비고 다녔다. 4대(1994~2010)에 걸쳐 군산시 수협조합장도 지냈다. 어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정리하고 어선(140톤) 한 척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35년 전 마련한 군산 째보선창 부근 단독주택에서 아내와 노년을 보내고 있는 임씨. 지난 27일 오후 ‘119 길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예깊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옛날 뱅어잡이 배 사진도 있고, 판자로 지은 허름한 동부어판장 사진도 있고, 선술집이 꽉 들어찼던 째보선창 부둣가 사진도 있고, 군산의 역사를 다 모아놨고만. 이 사진을 다 어디에서 구했데. 특히 만수호 진수식 사진을 전시장에서 보니까 감회가 더 새롭네. 진수식을 해망동 대신조선소에서 했거든. 가만있자 뒷모습만 보이는 이 사람은 내 마누라 같은디··· (웃음)
여기 이 가운데 배가 동지나해 어장을 국내 최초로 개척했던 그 만수호(20톤)여. 대한민국 수산업이 빨리 발전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고마운 배지. 이후 근해에서만 이뤄지던 어장이 태평양으로 확장됐거든. 가만있자 그때가 1969년 가을이었으니까 몇 년 됐냐. 벌써 50년이 되어가네. 참 그때는 죽을 줄 모르고 덤볐지. 군산 근해에서도 어선 전복 사고가 자주 일어났었거든···.”
임씨는 “나도 열다섯 살 되던 해 겨울 개야도(開也島) 근해에서 주꾸미 잡이를 하다가 전마선이 뒤집히는 바람에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본선(本船) 어부들의 재빠른 구조로 살아나는 등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사실 동지나해 어장 진출도 조업이 아니라 생사(生死)가 걸린 투쟁이었다.”라면서 먼저 세상을 뜬 동료 어부들이 생각나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임씨의 동지나해 어장 개척은 당시 정부가 근해 어선들의 조업 범위를 동지나해 및 중부 태평양 어장으로 확대할 방침을 내비치는 등 한국 수산업계에 대변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20톤 안팎 목선으로 연근해에서 조업해온 선주들은 원거리 조업을 위해 70톤~100톤 규모의 대형 어선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도 어장조사 및 시험 조업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기술 지도와 수산물 생산 및 수출 목표를 확대 발표하기에 이른다.
광복 후 군산의 어선과 어획고 변화
군산 지역 어업은 광복(1945) 후 연근해를 중심으로 주목망, 소형 안강망(중선), 연승어업(주낙어업), 유자망어업 등 소규모 어업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60년대 이후 낭장망 어업과 새우어업(조망) 등 새로운 어업을 시작한다. 1969년 동지나해 어장 개척 이후에는 어선을 대형화, 현대화시키고 동북아의 새로운 어장을 개발하는 등 활기 속에 황금기인 1970년대를 맞이한다.
군산시 수협 관내 연도별 어선 추이(군산시 해양수산과 자료)를 보면 1962년 당시 어선은 총 711척 가운데 동력선이 158척으로 동력화 비율이 22%에 불과했다. 그처럼 부실했던 어로 상황은 1969년 이후 해난사고 예방과 어로작업 능률향상을 위해 동력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75년에는 어선 1120척 중 동력선이 617척으로 55%를 넘어선다.
또한, 어선 대형화·현대화 사업을 전개하여 1981년에는 어선 1291척 가운데 동력선이 1177척으로 90% 이상 동력화 된다. 어선 척수도 1962년에 비해 1975년에는 3.9배가 증가하였고, 1989년에는 9.6배(1514척)로 증가한다. 1996년에는 동력선이 96%를 차지한다. 이후 2003년 말에는 총 어선 2079척 중 동력선이 2073척으로 100%에 이른다.
어획량과 위판액도 변화가 일어났다. 1962년은 어획량 5천224톤에 위판 실적은 8천 900만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1970년 이후 어선의 대형화, 현대화로 군산 어민들은 황금기를 맞는다. 1975년 위판액 56억 3000만 원, 1977년에는 112억 7000만 원으로 100억 원을 돌파한다. 그리고 1987년에는 420억 원, 1999년에는 608억 원의 위판액을 올린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위판액은 500억 원을 약간 웃돌면서 답보 상태를 거듭한다.
시급한 것은 중국 어선들의 불법어획 근절
50~60년대에는 째보선창 앞에서도 농어, 민어 등 고급 어종이 잡혔다. 그러나 서해안 개발이 본격화되는 1980년대 이후 산업단지 조성과 새만금사업 등으로 바닷물이 오염되고 간사지 매립 등으로 어장이 상실된다. 또한, 대부분 근해어장이 황폐해진다. 더욱이 1993년 이후 7년 6개월의 마라톤협의 끝에 발효된 2002년 6월 한·중 어업협정은 군산 지역 수산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에 임성식 씨는 “어민들의 권익 보호와 소득증대 정책도 중요하지만, 더욱 시급한 것은 중국 어선들의 불법 어획을 근절시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중 어업협정 이후 우리는 해마다 정부에서 금어기를 정해놓고 어민들의 어로작업을 강력히 단속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아요. 하지만 우리 금어기나 휴어기에 중국 어선들은 하루 수백 척씩 EEZ(배타적 경제수역)를 넘어와 불법 어획을 일삼아요. 해경이 단속을 펼치지만 역부족이죠. 이대로 가면 우리 어족자원은 씨가 마릅니다. 어민들의 권익보호가 따로 없어요. 정부의 강력한 대처가 어민들을 보호해주는 것이죠.
우리 수산업은 어족자원 고갈로, 유자망도, 연승도, 안강망도 한계에 와 있습니다. 우리 어민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중국 어선들의 불법어업 단속이 더 시급하죠. 정부는 어민들이 건의하면 심각하게 검토하고 대처해줘야지 입버릇처럼 하는 잔소리로 알고 외면하거나 문제점을 방치하면 우리 수산업은 머지않아 큰 위기에 닥칠 것입니다.”
평생 바다를 벗 삼아 수산업에 종사해온 임씨는 “근해에 불법으로 설치해놓은 어망과 어구들의 단속을 당국에 요구해도 돌아오는 것은 불법남획을 일삼는 중국어선들 때문에 손이 부족하다는 답변뿐”이라며 “해경의 손이 부족하다면 신고제를 활성화해서라도 단속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