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미가 기억하는 군산 골목길, 여기 다 있다
군산 예깊미술관에서 열리는 <119 길> 테마사진전
"저는 군산시 신흥동 산동네 '꽃 많은 집'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그때는 왈가닥이었죠. 군산역에서 미원동 모래집, 중화제재소, 차약방, 미원파출소, 신호약국, 미룡주조장, 산 끊어진 고개, 유과꼬시장(명산시장), 백약국, 구암병원, 홍약국, 백화양조를 지나면 군산여고가 나옵니다. 그 군산여고 뒷동네가 신흥동이죠. 유과꼬시장은 저희 어머니가 고개가 삐뚤어질 만큼 열무를 이고 나가 팔던 곳이었고···."
20년쯤 됐을까. 인기탤런트 김수미씨가 어느 라디오 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진행자와 나눈 고향 이야기 중 한 대목이다. 그의 애향심이 남다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하지만, 코흘리개 시절 동무들과 어울려 다니며 봤던 거리(구 군산역~신흥동) 간판들을 막힘없이 나열하다니 놀라웠다. 김수미 씨 가슴에 색동 조각보처럼 아름답게 수놓인 추억의 편린들. 오늘의 시선을 차약방(車藥房)에 맞추고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스토리가 있는 <119 길> 사진전
항구도시 군산의 근대사가 오롯이 담긴 테마 사진전(5월 23일~6월 23일)이 군산시 명산동 예깊미술관(대표 임성용)에서 열리고 있다. 철길, 물길, 오르막길, 골목길, 저승길 등 다섯 개 테마로 엮은 이번 사진전 주제는 <119 길>이다.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하였다. 지금부터 118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사진전 타이틀을 <119 길>로 정한 이유는 전시되고 있는 사진 400여점 중 개항 1년 전 군산 원도심권이 담긴 그림지도부터 최근 모습까지 군산의 119년 역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다섯 개 테마 중 <철길>은 군산선, 옥구선, 내항선, 째보선창선, 우풍화학선, 페이퍼코리아선(철길마을), 화전선 등이다. <물길>은 금강, 군산포, 죽성포(일명 세느강), 경포, 둔덕천, 미제천 등이다. <오르막길>과 <골목길>은 군산 원도심권 산동네와 골목동네가 담겼다. <저승길>은 군산 지역의 상가(喪家) 풍경과 상여 나가는 모습 등을 소개한다.
일제는 조선의 철도를 만주와 일본을 잇는 중간 고리로 삼았다. 드넓은 소비시장이자 물산 공급지인 만주를 일본과 연결하는 것이 조선 철도의 첫 번째 사명이었고 승객과 물자 유통은 그다음이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 사방으로 뻗어 나간 경인선, 경부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등 주요 철도 종착역은 항구나 국경도시였다.
특히 일제가 서둘러 1912년에 개통한 군산선은 곡식을 실어 나르기 바빴고, 군산 부두는 정미된 쌀을 선적하느라 밤낮없이 분주했다. 군산항은 비옥한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전진 기지였던 것. 거리에는 현물 없이 쌀 투기를 일삼는 미두꾼이 넘쳐났고, 산더미처럼 쌓인 쌀가마에 홀린 일본인들은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을 외쳐댔다.
전시장 사진 중 개항 1년 전 군산 원도심권과 죽성포구 촌락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표시된 그림지도를 비롯해 국내 최초 신작로(전군도로), 일제강점기 군산시가지와 내항, 1930년대 자전거포 풍경, 1950년대 군산 화물역, 월명동, 영화동, 중앙로 거리, 60~70년대 째보선창 부근 조선소, 초록 들녘을 가로지르는 상여 행렬(1970년대), 군산상고 우승 카퍼레이드(1970년대), 메케한 최루탄 냄새 가득했던 1987년 6월 군산시청 사거리 풍경 등이 시선을 모은다. 아래는 임성용 대표의 전시회 소감이다.
“지금 군산은 근대역사를 간직한 관광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구도심은 도시환경을 위협하는 건물이 경쟁하듯 들어서고, 국적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설물이 거리거리 즐비하다. 마치 서울의 가로수 길을 보는 듯하다. 근현대사의 증거물인 건축물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음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중 군산의 근현대사가 오롯이 담긴 조종안 기자의 사진들은 신선한 충격과 열정을 허용해 줬다,
이번 사진전을 준비하며 역사와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재확인하였다. 빛바랜 사진에 담긴 의미를 피부로 느끼면서 그동안 하찮게 여기거나 소홀히 다뤘던 기록물은 없는지 되돌아보고 하나라도 더 남겨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첨단시대를 살아갈 후손들이 우리가 기록하고 남겨준 것들을 감사히 받아들여주기를 희망하면서 전시회를 준비했다. 시민들의 많은 향유를 바란다.”
임성용 대표는 “이번 특별기획전(테마 사진전)은 군산에서 처음 시도되는 전시회다. 전시장에 전시된 사진은 모두 400여 점으로 테마별로 배경 설명을 곁들여 작품에 제목만을 달아 전시했던 예전 사진전과 사뭇 다르게 느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중 눈에 띄는 사진 몇 점을 소개한다.
처음 공개되는 죽성포구(째보선창) 모습
군산의 원도심권(옥구군 북면)과 죽성포구 갯마을이 그려진 지도이다. 우측에 한자로 '명치(明治) 31년 7월 15일 촌(寸), 재(在) 목포영사래신(木浦領事來信) 제26호 부속(附屬)'이라 적었다. 명치 31년은 군산 개항 1년 전(1898)으로 개항과 함께 지정될 각국조계지 경계가 그어져 있다. 강안으로 뻗은 수덕산에 일본영사관 자리도 표시해 놓은 것으로 미루어 옥구 감리가 목포 영사관에게 보내는 복명서 부속 자료로 보인다.
왼쪽 하단 산(石山) 표시와 초가(草家) 다섯 채가 그려진 촌락(동그라미 표시)이 죽성포구이다. 군산진(수덕산), 경포(설애장터) 등으로 연결되는 길과 구 조선은행 부근의 지류(지금의 대학로)에 다리가 표기되어 있어 흥미를 돋운다. 조선 시대 편찬된 <옥구군지>에서도 죽성포구와 대밭이 발견된다. 그 대밭이 성(城)처럼 마을을 감싼 모습이어서 '죽성리(竹城里)' 혹은 '대재'라 했다고 전한다.
촌락 왼쪽 검은색으로 표시된 지류(일명 세느강)는 현 둔율동 성당 인근 방죽에서 발원한 개천과 팔마산 기슭에서 발원한 개천이 구시장 부근에서 만나 죽성포구로 유입되었다. 그 외에 지금의 중동 지역에서 시작된 잔 물줄기가 3~4개 더 있었다. 그 물줄기들도 죽성포구로 모여들었다. 이처럼 째보선창으로 흘렀던 지류들이 모두 복개되어 골목길, 주택단지, 상가,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낀다.
가슨 아픈 역사의 현장 해망굴
해망굴(국가등록문화재 제184호)은 1926년 10월 명치정(중앙로 1가)과 수산업의 중심지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반원형 터널(높이 4.5m 길이 131m)로 개통되었다. 당시 인근에는 군산신사와 신사광장(현 서초등학교 운동장), 공회당, 도립군산의료원, 은행사택, 안국사(현 흥천사) 등이 자리하고 있어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해망굴 앞은 일본 천황 이름을 딴 명치통(중앙로 1가)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 때는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몰린 조선 젊은이들을 환송하던 신사광장이 이웃에 있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군산주둔 북한군 지휘본부가 터널 안에 자리하여 연합군 공군기의 폭격을 받았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서울로 가는 길이었던 경포천(京浦川)
조선 숙종 27년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를 보면 옥구군 경포리에 큰 하천이 있고 여기에 긴 다리 하나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아흔아홉 다리' 부근이다. 이곳에 큰 장이 섰다. 400년 역사를 지닌 '설애 장터'이다. 경포는 호남지방 물화를 이곳에서 서울로 올려 보낸 데서 유래한다. 서울, 충청, 전라 지역 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포구였던 것.
경포는 '서울 경(京)' 발음과 포(浦)는 '개(浦)'이므로 '개'라 하여 '서울 개'라 하였다. 따라서 서울개 →설개→설애→서래 등으로 어원변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소설 <탁류>에서는 '스래'로 나온다. 옛날 사람들도 경포천을 중심으로 서쪽은 '안 스래', 동쪽은 '바깥 스래'로 불렀다. 경포천은 지금의 중동로터리 부근까지 배가 드나들었으나 1960년대 후반 매립된다. 구불구불 'S'자였던 물길도 직선으로 바뀌었다.
국내 최초 신작로 ‘전군도로’
일제는 1908년 군산을 출발점으로 하는 신작로(전주-군산)를 국내 최초로 개설하였다. 일제의 목적은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이는 쌀의 용이한 반출과 조선 3대 시장인 강경시장으로 모이는 민족자본 괴멸, 군산항으로 들어오는 군수품과 상품의 원활한 보급 등이었다.
토지를 매입할 때부터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던 신작로 공사장 인부는 조선 청년과 농민이었다. 강제노역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온 동학군과 의병도 다수 섞여 있었다. 소설 <아리랑>에서도 의병활동을 하던 손판석·지삼출 등이 일경에 붙잡혀 노역하다가 탈출하여 부두 노동자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때 유행됐던 노래가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가장 되네···.'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볏섬을 산더미처럼 쌓은 달구지 행렬이 20~30리씩 이어져 장관을 이뤘다는 전군도로. 군산선 개통(1912) 이후에는 화물차가 가세하였고, 그렇게 집산된 벼들은 내항 부근의 창고와 정미소를 거쳐 일본으로 바리바리 실려 나갔다.
사진 전시는 6월 23일까지
관람 시간은 10시~18시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입니다.
사진제공: 동국사, 차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