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는 뜨거운 물로 목욕시켜 먹는 거여!"
조종안 기자의 째보선창 생선 이야기
"내가 늙어서 할머니 되믄 어디로 가겄냐, 우리 '종아니'하고 살어야지."
"하이고 엄니도, 나는 커서 돈 벌면 아무도 모르게 부산으로 도망가서 살라고 허는디요."
"부산이라니···. 그럼 어머니 아버지 제사도 거기(부산)서 지낼라고?"
"그러믄요. 나는 편하게 중국집에 가서 지낼라요. 짜장면이랑 탕수육이랑 시켜놓고 절허믄 되니까."
철부지 시절. 50대 초반이었던 어머니와 나눈 대화이다. 겨울철만 되면 동상(凍傷)으로 시달리던 참에 "부산은 겨울이 없는 따뜻한 도시"라는 아버지 얘기를 듣고 농을 섞어 했던 대답이었다. 그런데 스물이 넘도록 놀림을 당하면서 마음고생을 했다. '크면 부산으로 도망갈 놈'이 나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왜 부산이냐?"라며 한숨짓는 어머니를 보며 후회됐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제사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가 조상 모시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명절날 차례(茶禮)와 집안 제사를 정성껏 모셨다. 가족들의 안녕과 소원성취를 위해 해마다 음력정월에 독경(讀經)을 했다. 그래서일까. 음력 10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는 "요새는 손발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라고 푸념할 정도로 바빴다. 설날은 물론 어머니 아버지 생일, 할머니·할아버지 제사, 매월 초사흘 고사(告祀), 독경, 대보름 등이 모두 겨울에 들어 있어서였다.
어머니가 꼭 챙겼던 생선 조기, 홍어, 상어
동네에서 음식솜씨 좋기로 소문났던 어머니는 제사나 명절 때 조기, 홍어, 상어는 꼭 챙겼다.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 우물가에 가마니 넓이의 홍어 밑자리(大)나 내 키보다 큰 상어가 엎어져 있는 것으로 제삿날과 독경하는 날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다.
홍어와 상어는 항상 어머니가 다뤘고, 바쁠 때는 단골 식객이던 '난순네 엄니'가 대신했다. 홍어 다룰 때 옆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가 코끝 물렁살 한 점 얻어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내장에서 박대, 우럭 등 생선 새끼들이 나올 때는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옛날 어른들은 홍어를 바닷물이나 샘물로 씻었다. 수돗물로 씻으면 홍어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맛이 감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겨울철 생선이어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독에서 금방 꺼낸 김장김치에 홍어를 싸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았다.
전라도를 상징하는 생선 홍어는 양념 무침, 홍탁, 탕, 찌개, 포 등 먹는 방법도 다양했다. 그래도 제사상에는 꼭 찜을 해서 올렸다. 홍어찜은 양쪽 몸체에 그어진 결을 따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채반에 가지런히 놓고 가마솥에 쪄냈다.
홍어는 살코기에 유장(양념장)을 발라 쪄먹기도 했는데 맛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제사음식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 맛있는 음식을 왜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지 궁금했으나 어른이 되니 이해가 되었다. 제사음식은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양념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
겉은 무서워도 속은 부드러운, 상어
생선을 물로 씻어내고 적당하게 자르는 과정을 '손본다', 혹은 '다룬다'고 했다. 그러나 뜨거운 물에 담가 껍질을 벗겨내는 상어는 '튀긴다'고 했다. 그래서 상어를 가져오면 가마솥에 물부터 끓였다. 왜 뜨거운 물로 씻느냐고 묻는 나에게 "야야, 상어는 뜨건 물로 목욕시켜서 먹는 거여!"라고 했던 어머니 말이 귓가에 맴돈다.
날이 어스름해지는 오후 4시만 돼도 혼자는 뒷간에 못 가던 나였다. 그렇게 겁이 많았음에도 괴물처럼 무섭게 생긴 상어 튀기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봤다. 넓은 주둥이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 뱀눈을 떠오르게 하는 눈, 낭자한 선혈 등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상어는 우리나라 근해에 40여 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몸통이 원추형이고, 가시가 없으며 연골로 이루어진 어류이다. 특히 부레가 없고 청각과 후각이 발달해 4km 밖의 피 냄새도 맡는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배 뒷부분에 달린 수컷의 성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 홍어 수컷의 성기와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상어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다른 생선과 함께 가마솥에 찌거나 부침개를 만들어 제사상에 올렸다. 겉모양은 흉측스럽게 생겼으나 찜을 해놓으면 살코기가 목화솜처럼 뽀얗고 부드러우며 생태 부침개보다 담백하고 고소하다.
선조들이 상어 고기를 제사상에 올리게 된 연유는 첫째,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것. 둘째, 쪄놓으면 '백의민족(白衣民族)'이 즐겨 입는 옷과 살코기 색깔이 비슷하다는 것. 셋째, 맛이 좋고 영양가가 높으면서도 기름기가 없고 담백하다는 것 등으로 생각된다.
제사상에 올리지 않았던 생선으로는 '치' 자로 끝나는 꽁치, 갈치, 준치, 멸치 그리고 등 푸른 생선인 고등어, 정어리 등이었다. 이유는 비린내가 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붕장어, 장어 등 가시와 기름기가 많은 생선도 올리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 생선' 조기
머리 부분에 큰 귀돌(耳石)이 있어 석수어(石首魚)로도 불리는 조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다만, '동지나 어장' 개발(1969년)과 해수 온도 변화로 1년 내내 싱싱한 조기를 먹을 수 있게 됐지만, 1960년대만 해도 그렇지 못했음을 말하고 싶다.
서해안을 끼고 있는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서부지역 주민은 제수용 생선으로 '조기'를 으뜸으로 쳤다.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성장하여 아버지를 만나 군산 째보선창에서 뱃사람들을 상대로 쌀가게와 물장수를 했던 어머니도 조기를 최고로 여겼다.
냉동기술이 빈약했던 1950~1960년대. 어머니는 곡우(穀雨) 때 잡히는 1등품 조기 무더기에서 큰놈을 골라 살짝 얼간을 해서 해풍에 꾸둑꾸둑하게 말려 통풍이 잘되는 곳간이나 대청에 보관해두었다가 제삿날이나 명절 때 사용하였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해마다 음력 3월이 되면 흑산도 근해에 2000척이 넘는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 만선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조기떼가 조류를 따라 북상하여 5월 중순쯤에는 연평도에 파시가 서는데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해역은 예로부터 황금어장의 보고였다.
5월 초쯤 되면 군산의 금암동, 해망동 부둣가에도 조기 파시가 섰다. '째보선창에 가면 강아지들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소문도 그때 나온 유행어이다.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조기는 한국의 미각(味覺)으로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국민적 생선으로 사랑받고 있다.
'상어' 경매가, 경상도 높고 전라도 낮은 이유
엊그제였다. 혹시 상어가 나왔는지 알아보려고 해망동 수산물센터에 다녀왔다. 마침 고깃배들이 들어오는 음력 조금 때여서 싱싱한 생선이 가게마다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매장을 찾는 발길은 뜸했다.
작년 가을 대하(大蝦)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준 홍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는 반갑게 인사 하면서도 장사가 시원치 않다며 울상을 지었다. 상어에 대해 묻자 배들이 많이 잡아왔지만, 팔리지 않아서 들여놓지도 않았단다.
군산수협 소속 고깃배들이 잡아온 상어는 모두 200여 상자. 최근 몇 년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어획량이란다. 어군(魚群)을 따라다니다 보니 많이 잡게 되었는데 경매가격은 생각보다 낮았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였다. 전·남북 지역에서는 상어 고기 맛을 알거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조금씩 구매할 뿐 제수용으로는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상어가 제사용으로 인기가 좋은 경상도 부산, 마산, 대구, 울산 지역은 경매가가 항상 군산보다 높다고 한다.
한때는 한국의 10대 어업에 들었던 '상어'
요즘은 상어를 얘기하면 거대한 '식인 백상아리'나 상어지느러미 요리(샥스핀)를 먼저 말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예전에는 부둣가에 나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생선이었다. 다만, 다루기가 어렵고 복잡해서 대중음식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군산수협 50년사>(1984년 발행)에서도 상어가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생선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무동력선(風船)에 어법·어구가 부실했던 1954년~1961년까지 군산 '동부공판장'(째보선창)의 연도별 어가와 어획량에서 상어가 고급 어종과 어깨를 겨루고 있어서다.
1954년 군산 동부공판장에 위탁 판매된 조기는 1720톤, 상어 570톤, 홍어는 585톤이었다. 1958년에는 조기 998톤, 상어 104톤, 홍어는 625톤이었다. 들쑥날쑥하면서 해마다 차이는 보였으나 다른 생선에 비해 꾸준히 어획량을 올리고 있었다.
1954년~1970년까지 고깃배들이 째보선창에 쏟아놓는 어류, 즉 군산 동부 공판장에서 경매된 생선은 40종이 넘었다. 1973년을 기준으로 고등어, 정어리, 명태, 조기, 대구(大口), 청어, 삼치, 도미, 갈치, 상어 등은 한국의 10대 어업(漁業)으로 꼽았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 애주가들에게 인기 상한가인 '아귀'와 '물메기'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 당시 아귀, 물메기는 뱃사람들의 천덕꾸러기. 즉 생선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에도 상어가 10위권에 들어 있어 놀라웠고, 홍어가 빠져 섭섭하기도 했다.
덧붙임: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