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히로쓰가옥’, 이걸 알면 더 잘 보인다.
김옥분 군산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전하는 일본식가옥 구조와 기능
군산시 명산동 사거리에서 월명터널(월명공원) 방향으로 걷는다. 양반걸음으로 몇 발짝 떼니 군산항쟁관이다. 길 건너는 동국사(東國寺) 입구다. 봄기운을 만끽하며 잠시 눈요기를 한다. 조금 더 걸으니 월명성당이다. 그리고 그 뒤가 현대오솔 아파트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주조 공장, 광복 후에는 청주(淸酒)로 명성을 떨쳤던 백화양조가 있던 자리다.
고개를 돌리니 군산여고다. 도로를 등지고 구영1길로 들어선다. 다양한 형태의 가옥이 밀집된 고즈넉한 골목이 시작된다. 1~2분 걸었을까. 붉은색 담장과 푸른 대문이 이색적인 히로쓰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이 얼굴을 내민다. 색 바랜 벽돌담과 낡은 서양식 목조주택이 조화를 이룬다. 일제 잔재인 허름한 나가야(長屋) 건물도 끼어든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골목길, 과연 시간여행 으뜸 코스답다.
신흥동 일대는 부유층 거주 지역, 정말일까
“군산 신흥동 일본식가옥(구 히로쓰가옥)은 부 협의회 의원이며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게이샤브로’가 지은 주택으로 이 주택이 위치한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군산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부유층 거주 지역이었다.” (히로쓰가옥 안내문 옮김)
안내문이 말하듯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부유층 거주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제작된 지도에도 잘 나타난다. 지금의 구영1길을 경계로 신흥동은 신흥정(新興町)이었고, 월명동은 천대전정(千代田町) 거리였다. 그중 신흥정은 지도에 구릉지로 표기되어 있다. 주요 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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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흥동은 으슥한 산동네였다. 차독산과 이웃해 있었으며 ‘절골’로 불리기도 하였다. 자그만 절(寺)이 있었고 암자 비슷한 신당과 점집이 여러 곳 있었다. ‘절골’이란 지명도 그래서 생겨났다.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골로 불리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도 가난뱅이들이 사는 달동네였다. 한국전쟁(1950~1953) 때는 주변에 피난민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반면 천대전정은 평지에 조성된 주상복합단지인 것에서도 신흥정과 구별된다.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현 월명동사무소) 앞길을 경계로 1정목(丁目) 2정목(丁目)으로 나뉜다. 이곳에는 재향군인회 군산 분회를 비롯해 우편소(우체국), 신문사, 변호사 사무실, 토목회사, 병원, 약국, 잡화점, 양복점, 음식점 등이 들어서 있다. 이렇듯 히로쓰가옥은 부자 동네(일본인 거리)와 가난한 산동네(조선인 마을) 사이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히로쓰가옥 건물주, 건축 시기 등에서 오류 발견
“군산 신흥동 일본식가옥(구 히로쓰가옥): 이 가옥은 일본점령기에 군산 영화동에서 포목상을 하던 일본인 廣津繼伊三郞(히로쓰 게이사브로)이 지은 가옥이다. 히로쓰는 대지주가 많았던 군산에서는 드물게 상업으로 부를 일구고 임피 인근에 작은 농장을 경영하면서 부협의회 의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 가옥은 일본식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후지이 가즈코 교수 연구서에서. 2012년 이전 안내문으로 추정됨)
이에 후지이 가즈코(藤井和子) 교수는 구 히로쓰가옥에서 태어나 소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던 히로쓰(廣津) 손자(廣津昌平) 증언과 자신이 조사한 결과물을 정리한 연구서 <식민지 도시 군산의 사회사-신흥동 일본식가옥(구 히로쓰가옥)과 히로쓰 家의 역사>(2012년 10월)를 통해 오류 몇 곳을 지적하였다. 그 내용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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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쓰가옥을 지은 사람(건물주)은 히로쓰 게이사브로(廣津繼伊三郞)가 아니고 히로쓰 기치사브로(廣津吉三朗·1878~1949)이다. 기치사브로는 일본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신치(히라오쵸)에서 태어났다. 청일전쟁(1894~1895) 때 조선어 통역관으로 평양에서 근무하였다. 러일전쟁(1904~1905) 때는 첩보원으로 징병되어 만주와 북한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 기치사브로는 군산에서 포목상을 한 일이 없다. 미곡상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군산에 정착하여 무엇을 할까 궁리할 때 조선인 대지주 김(金)씨가 쌀 중매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해서 미곡무역업을 시작했다. 상호는 <길·廣津吉三朗商店>이었고 점포와 자택은 전주통(현 영화동)에 있었다.
▲ 히로쓰가옥은 1925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다. 1931년 대도(大島) 은행장의 간절한 부탁으로 토지(현 히로쓰가옥 자리)를 매입 3년 남짓 공사 끝에 1935년 완공됐다. 이때 전주통(영화동)에서 신흥정(히로쓰가옥)으로 이사하였다.
▲ 농장이 있던 곳은 임피 인근이 아니고 성산면이다. 현재도 성산면에는 히로쓰 가(家)에서 경영하던 농장사무소 건물이 남아 있다. 그리고 작은 농장이 아니라 큰 농장이었다. 농장 경영은 1934년경 시작하였다.
후지이 교수는 “한국에는 광복(1945) 이전 히로쓰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설명문에 이런 오류가 생긴 것”이라며 “월명회(군산에서 태어나 학교도 다니고 직장에도 다녔던 일본인들 모임) 회원들의 증언으로도 히로쓰 家의 농장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고 부연한다.
연구서에 따르면 히로쓰가옥은 처음 건축 당시 방 한 칸에 한국식 온돌을 설치했다. 전기도 최신식 설비를 갖췄다. 2층에 올라갈 때 계단 아래에서 전등 스위치를 켜고 2층에서 끄는 방식이었다. 자녀들이 결혼하면 별채를 중축하고자 공간을 많이 확보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10년밖에 살지 못했다. 가방 하나만 들고 돌아갔는데 그마저도 부산항에서 승선수속을 밟다가 도둑맞는다. 빈손으로 힘들게 귀환한 기치사브로는 1949년 1월 고향에서 병사한다.
기치사브로 딸과 손자가 10여 년 전 군산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신흥정 집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놀랐고, 너무도 변해버린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정원에 있던 돌다리, 소나무 등이 없어지고, 흰색 담장이 붉은색으로 변했으며 대문도 나무 본래 색이었는데 파란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인력거를 이용하던 집 앞 도로도 무척 좁게 느껴졌다 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본 히로쓰가옥
김옥분(59) 군산시 문화관광해설사(아래 해설사)를 만났다. ‘희망 틔움 대안학교 일어 강사’이기도 한 김 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히로쓰가옥 정원과 실내 구조, 기능 등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봤다. 아래는 그의 해설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히로쓰가옥은 여섯 개 방과 부엌, 화장실 등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헤이안(平安) 시대 신덴츠쿠리(寢殿造) 주택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오시이레(붙박이장), 도코노마(장식대), 고타츠(脚爐), 가미다나(神壇) 와시츠(和室) 등은 막부(幕府) 시대 쇼인츠쿠리(書院造) 양식이 복합된 구조이다. 비스듬한 객실, 현관, 아마도(雨戶) 덧문 특히 일본인이 건축주임에도 방에 한국식 온돌이 설치된 게 이 건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다미(疊) 일본 전통 주거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일본에 다다미 문화가 정착된 이유는 겨울에 냉기를 막아주고 여름에 습기를 빨아들이는 조절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태풍, 지진 등에 대비해서 다다미와 탄성이 강한 나무를 바닥에 사용했는데 화재에 취약성이 문제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도코노마(床間) ‘바닥에서 한 단 높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막부시대(16세기), 불교의 한 종파로 참선을 통해 불도를 터득하려는 선종, 종교문화의 세속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정원이나 비대칭 선반 문화도 이와 동일하다.
오시이레(押入) 실내가 비좁고 지진이 발생했을 때 안전을 고려한 수납공간이다. 이불과 옷가지 등을 압축하여 접어서 보관하는 곳이다.
이로리(囲爐裏) 취사용 도구이다. 나무틀에 화로를 밑에 넣고 이불을 덮어 발과 손을 넣어 몸을 녹이는 고다츠(脚爐)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현대에는 적외선 램프가 달린 전기 고타츠를 일반 주택에서 난방기구로 사용한다. 우리 집 거실 탁자에도 30년 전 일본에서 쓰다가 가져온 고타츠가 놓여있다.
가미다나(神壇) 불상과 신단을 모시고 참배와 예불을 올리는 공간이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남쪽이나 북쪽의 밝고 높은 조용한 곳에 설치한다. 참배는 손과 입을 헹구고 재물을 올린 후 신전에 앉아 인사하고 손바닥을 두 번치고 묵례하고 물러선다.
츠쿠바이(蹲踞) 다실(茶室) 입구에 놓인 손 씻는 그릇을 말한다. 차도에 초대받은 손님이 이곳에서 손과 입을 헹구고 마음을 정돈한 뒤 징검돌(飛石)을 밟고 좁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일본의 차 문화에서 예를 갖추는 도구라 할 수 있겠다. 동국사 종탑 앞에 놓인 수수발(水手鉢)과는 그 용도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수목(樹木)과 괴석, 인공 연못, 일본식 석탑 등으로 조성된 정원에서도 일본 문화의 독특한 발상이 엿보인다. 자연을 압축하여 인간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관이 빼어난 월명산(105m)을 배경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 토속 신앙과 불교의 상징을 정원 원리에 접목하고 구체적으로 조형화한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