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봤을 때 유가족 된 것처럼 마음 아파"
이사준 군산문화원 이사가 전하는 64년 전 행운환 침몰사고
천 리를 에두르고 휘돌아 군산에서 탁류가 된 비단 물길 금강(錦江). 그 금강이 군산에서 처음 만나는 마을은 원나포이다. 이곳은 임피군에 속한 포구였다. 조선 경종 2년(1722) 공주·연기 입구에 있던 나리촌 임무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나리포(나시포)라 부르게 된다. 1914년 옥구군에 속하면서 '나포'라 하였고, 광복 후 현 나포면 소재지(옥곤리)가 중심지 기능을 하게 되자 나리포는 본래 나포라는 뜻의 원나포가 된다.
조선 시대 나리포는 제주도를 비롯한 도서 지역 해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내륙의 곡식과 교환하는 일종의 관영시장이었다. 도서 지역에 흉년이 들면 구휼미를 보냈던 것. 나리포 덕에 제주도를 비롯한 섬 주민들이 기근을 이겨낼 수 있었다. 또한, 불공정한 물물교환 폐해를 줄임으로써 균형 잡힌 시장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번성하던 나리포는 조창제도 폐지와 육로교통 발달, 산업의 변화 등으로 포구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파시 때면 문전성시 이뤘던 원나포
기록에 따르면 공주산(65m) 아래 나리포는 수십 척의 어선과 조운선이 출입하였고, 포구에만 100여 호의 민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해마다 5월에는 조기 파시가 섰다. 보부상도 드나들었고 선주들을 상대하는 객주도 여럿 있었다. 주막들도 호경기를 누렸다.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공주산(관련 기사 : "발견한 유물, 내꺼다 하면 감옥갑니다")에 '영신당'이라는 당집이 있어 주민들이 해마다 당산제를 지냈다.
금강은 서해와 전라·충청 내륙을 하나로 이어주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금강변 포구들은 군산항과 더불어 일제 수탈의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가 어선을 비롯해 여객선, 물자 수송선 등의 안전 운항을 위해 강경 황산 포구와 군산 째보선창에 등대를 설치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금도 충남의 논산, 강경, 전북의 웅포, 나포 등에는 포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나포면 장상리 서지마을에서 500여 년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사준(83) 군산문화원 이사를 만났다. 그는 "원나포 입구에 있는 수문 아래에 군산~강경을 오가던 여객선 선착장이 있었고, 그 옆에는 장꾼들이 쉬어가는 주막도 있었다"고 귀띔한다.
"저쪽 수문 아래에 여객선, 중선(안강망), 소금배, 장작배 등이 드나드는 선착장이 있었지. 그때는 '나포 나루'라고 불렀는데, 객선이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어. 간만(干滿)의 차를 극복할 수 있는 잔교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었거든. 그래서 입출항을 물때(밀물과 썰물)에 맞춰서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배를 놓쳤다는 사람은 없었어. 그 시절에는 젊은이들도 물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거든.
나포는 논산, 강경, 임피, 서수, 군산, 익산 등으로 나가는 길목이라서 국밥이랑 막걸리랑 파는 주막이 여기저기 많았어. 선착장 옆에도 보부상과 장꾼들이 쉬면서 허기도 달래는 주막이 있었지. 일하는 사람은 주모(酒母) 한 사람이었고, 마당은 넓지 않았지만, 방이 세 개나 됐다고. 주막은 봄이 약동하는 2월부터 바빠지기 시작했지. 조기 파시가 끝나면 뱅어잡이, 우여잡이, 몰치(숭어 새끼) 잡이가 시작됐으니까."
그랬다. 소금배와 함께 중선들이 만선을 알리는 오색기를 펄럭이며 들어오는 날이면 객주와 보부상, 조기를 엮는 아낙들로 포구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낙들의 수다는 신나는 추임새가 되어 주었다. 조기와 소금은 현금과 물물거래 방식이 병행됐다. 농민들이 수확한 곡식과 시골 농가에서 필요한 물건을 어림해서 교환했던 것. 흥정을 마치면 소금과 엮은 조기는 보부상에 의해 순남미재 넘어 서수, 임피, 함열, 익산 등지로 공급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는 64년 전 행운환 침몰 사고
금강은 지역 문물이 왕래하면서 다양한 역사를 만들어낸 시대의 젖줄이었다. 출퇴근길이자 학업의 길이기도 했다. 충남 부여, 논산, 강경, 한산, 화양, 서천, 대천 등지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다수가 군산으로 유학을 왔다. 도선장(군산-장항)은 직장인과 통학생으로 매일 붐볐고, 방학이나 개학 시즌에는 군산-강경 여객선 승객의 절반 이상이 학생이었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강변 마을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과 끈적끈적한 삶의 체취가 깃든 금강. 1953년 겨울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아래 미창) 군산지점 소속 여객선 행운환(幸運丸·40톤급)이 그해 1월 25일(일요일) 오후 3시 30분경 금강 하류 10km 지점(충남 화양면 와초리 앞)에서 침몰, 100여 명이 익사하거나 행방불명 됐던 것.
당시 군산-강경 간 정기여객선은 세 척.(행운환 2척, 금강환 1척) 금강환이 오전 운항을 결항하는 바람에 불어난 승객과 짐을 싣고 강경을 출발한 행운환은 성당, 칠산, 입포(갓게) 내성, 웅포, 나포 등을 지나면서 손님과 짐은 더욱 늘어났다. 정원 90명인 배에 250여 명을 태웠고, 쌀도 50가마를 선적한 상태였다. 대부분 희생자가 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등교를 위해 군산으로 향하던 여학생과 유아, 임산부 등이어서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행운환 침몰사건 엿새 전 부산~여수 여객선 창경호가 다대포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280여 명이 참사를 당했는데, 금강 하류에서 또다시 침몰사고가 발생하자 정부를 피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민심도 흉흉했다. 선장을 비롯해 미창 군산지점 과장, 계장이 줄줄이 구속됐다. 교통부장관이 성명을 발표하고 미창은 사과문과 함께 위령제, 피해자 보상 등을 약속했다.
그해 2월 2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침몰 3일 만에 선체를 인양하고 익사자 54명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날까지 확인된 군산지역 희생자는 총 21명(60대 1명, 50대 2명, 40대 2명, 30대 3명, 20대 1명, 9~18세 10명, 2세 2명)으로 학생 및 유아가 절반을 넘었다. 희생자 중 가장 연장자인 60대는 나포면 장상리 수지마을에 사는 이기용(61)씨. 이사준 이사의 친할아버지로 군산에 사는 딸 집에 가다가 변을 당했다 한다. 아래는 이 이사가 전하는 당시 상황이다.
"선체 인양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지. 기다리는 것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참상뿐···. (한숨) 개흙으로 뒤범벅되어 누가 누군지 확인할 수 없더라고. 그래도 할아버지는 긴 턱수염을 보고 쉽게 찾을 수 있었어. 훼손된 시신을 목선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개흙을 씻어내고 힘들게 장례를 치렀지. 나포에만 희생자가 10명이 넘어 마을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였지. 제사도 한날한시에 지내고···. 참담했던 그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죽은 남녀학생들은 대부분 자취생이었지. 모두가 고달프고 가난했던 전쟁 시절 학생들은 하숙비 아끼려고 학교 근처나 선창가에 셋방을 얻어 밥을 해 먹고 학교에 다녔거든. 배에 싣고 있던 쌀 50가마도 학생들이 먹을 식량이었지. 현금이 귀한 시절이어서 나무(장작)도 집에서 가져다 불을 지펴 밥을 해 먹었으니까. 그래서 침몰한 행운환에 장작도 실려 있었지. 배에 풍구도 싣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 풍구를 잡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학생도 있었거든.
행운환 침몰 사고 후 군산 째보선창에서 강경 다니는 배는 끊겨버렸지. 나포 사람들도 일절 배를 안 타고 군산까지 걸어 다니거나 미군들이 사용하던 쓰리쿼터를 개조한 합승을 이용했어. 그 합승은 트럭처럼 지붕도 없었어. 그때는 그것도 감지 덕지혔지. 나포나 서포에서 군산으로 땔 나무를 실은 장작배가 오갔는데 그것도 점차 끊겼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길도 참 좁았어. 소구루마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으니까. 참, 모두 옛날 얘기네···."
이사준 이사는 "행운환 침몰 사고 때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양부모를 삼기도 하고, 먼저 탈출한 남학생이 강가로 떠밀려온 여학생을 구출해 훗날 부부가 된 경우도 있었다"며 "3년 전 세월호 참사 때도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최근 세월호가 물위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내가 유가족이 된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