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수집가 소성필 씨 “대중가요 심의, 국민이 해야 예술적 가치 돋보여”
박정희 군사독재 18년, 대중가요 수난사
예로부터 우리는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대장간에서 풀무질하면서도 불렀고,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닦으면서도 불렀다. 논에서 모를 심거나 김매기 할 때도 불렀고,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면서도 불렀다. 방아를 찧으면서도 불렀고, 부엌에서 음식 만들면서도 불렀다. 상여 나갈 때도 불렀는데 상두꾼들의 <상엿소리>가 그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의 애환이 담긴 노래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세월과 함께 변해온 것이 대중가요이다.
조선 시대 <농부가>에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승달이 반달이지··”라는 대목이 있다. 가사에 나타나듯 당시 백성들은 노래를 통해 여색에 빠진 헌종(1834~1849) 임금과 기첩 반월(半月)이를 풍자하고 있다. 헌종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밤마다 반월이와 밀월을 즐겼다고 한다. 시중에 ‘제가 무슨 반달이라고’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으나 임금을 비웃었다고 잡아들였다는 기록은 없다. -기자 말
억압과 통제로 권력 유지할 수 없다는 것 보여줘
희대의 국정농단 사태로 온 국민이 답답해하고 있는 요즘. 100년 시차를 두고 이 땅에서 일어난 두 대규모 시위가 만감을 교차하게 한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삼일독립만세운동과 최근(10월 29일~12월 24일) 전국에서 1000만 가까운 시민이 참여한 촛불집회다. 삼일독립만세운동이 빼앗긴 국권을 되찾는 단초가 됐다면 촛불집회는 촛불 혁명으로 거듭나면서 이 나라 주인은 대통령도, 정치인도 아닌 국민 모두임을 깨우쳐주는 계기가 됐다.
특히 전인권을 비롯해 DJ DOC, 이은미, 권진원, 이승환, 한영애 등 20여 명의 인기가수가 번갈아 출연, 분노한 민심을 달래고 시민들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마야는 <뱃놀이>를 부른 뒤 ‘2014년 4월 16일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고,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하야가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개사하여 분위기를 북돋웠다. 양희은은 1970년대 대표적 저항가요인 <아침이슬>로 촛불 시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박사모, 어버이연합 등 ‘친박 단체’는 유신 시절 내내 금지됐던 <아름다운 강산>(신중현 작사·작곡)을 부르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쳤다고 한다. 그 모습을 TV를 통해 본 기타리스트 신대철(신중현 아들)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래의 탄생 배경을 소개하면서 불쾌감을 드러냈다. 요지는 원작자 정신을 훼손하기 때문에 ‘친박 세력’이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 이에 대중가요 의미를 내세우며 신씨 주장을 반박하는 여론도 있다. 이 모두가 박정희 군사독재가 남긴 생채기가 아닐 수 없다.
유신 시절 불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저속하다는 이유로, 체제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딱지가 붙었던 주옥같은 노래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5월 반대 및 비방을 일절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하면서 예술 심의를 강화했고, 가요 222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그 노래들은 40년이 흐른 지금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촛불광장에서 불리고 있다. 억압과 통제로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음이다.
금지곡 원조는 일제강점기. 동요, 찬송가 등도 통제당해
노래는 널리 불리기 위해 만들어지고 또 존재한다. <아름다운 강산> 역시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이고, 원작자인 신중현이 민족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누가 부른들 어떠랴. 다만 아무리 명곡이라 해도 시기와 분위기에 따라 의미도 느낌도 달라질 수 있다. 노래도 때와 장소가 있다는 얘기다. 선곡도 필요하다. 문상객이 상가에서 <노래가락 차차차>를 부르면 안 되듯.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 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곳에 내가있고 네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 희망을/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마음”
<아름다운 강산> 1절 가사이다. 회심의 역작으로 시대적 아픔과 시련이 서린 노래이다. 신중현은 1970년대 초 청와대로부터 박정희 대통령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제의를 받지만 거절한다. 그 후 ‘만들지 않으면 다친다’는 협박까지 받았으나 재차 거절하고 권력자를 찬양하는 노래는 만들 수 없지만, 대한민국을 찬양하는 노래는 만들 수 있다는 의지로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 또한 금지곡이 되고 만다.
금지곡 원조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노래는 금지곡 딱지를 붙였다. 심지어 동요와 찬송가까지 통제했다.
민족 수난의 역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목포의 눈물>. 이 노래는 오케이 레코드사가 가사를 모집, 응모작 3000여 편 중 목포 출신 문일석 시(詩)에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문일석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사 300년을 맞아 1절에 목포의 낭만과 꿈을, 2절에 민족의 원한을, 3절에 이충무공 추모의 정을 담았다고 한다. 음반수집가 소성필(57) 씨 이야기를 들어본다.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원한과 슬픔을 달래줬던 노래죠. 1935년 이난영(1916~1965)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2절의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구절을 문제 삼습니다. 일본 경찰이 작곡자와 작사가를 불러 문초했는데 문일석이 기지를 발휘해 ‘원한’은 ‘원앙’의 잘못 표기라고 해서 위기를 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순신 장군이 노적가리로 속여 왜군을 물리쳤던 ‘노적봉’을 ‘임 자취’로 표현하는 등 원한과 추모의 노래를 낭만과 사랑의 노래로 위장했던 것이죠. 일본에서도 발매되는 등 음반이 3만 장 이상 팔렸다는 기록을 보면 금지곡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 집권 18년, 그 시절 대중가요 수난사
광복 후 권력의 대중가요 검열 및 규제는 5·16 군사쿠데타(1961) 이후 더욱 강화된다. 대중가요 변천사에서 박정희가 통치했던 18년(1961~1979)이 가장 혹독한 시련기로 알려진다. 건국 이후 최초 방송금지곡은 조명암(본명 조영출)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가 부른 <기로의 황혼>이었다. 방송금지 1호인 이 곡은 1962년 발족한 방송윤리위원회가 공식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사유는 조명암이 월북 작가라는 것.
1960년 6월, 당시 민주당 정부는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 <4월의 노래>를 공모한다. 당선작은 ‘눈부신 젊은 혼이 목숨을 바쳐’로 시작되는 강태욱 씨 작품이었다. 정부는 이 노래를 각 학교 교과서에 수록하는 한편 국가기념행사 제창곡으로 선정한다. 그러나 세상에 널리 불리기도 전에 5·16 쿠데타로 군가에 묻혀버리고 만다. 김주열 묘소 참배객들을 용공 분자로 몰아세웠던 쿠데타세력은 대학생들이 한일협정반대시위 때 <4월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자 아예 금지곡으로 묶어버린다.
1960년대 권력의 대중가요 검열은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그 시절 대표적인 금지 가요는 1964년 이미자가 불러 100만 장 넘는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던 <동백 아가씨>이었다. 금지 사유는 왜색가요라는 것. 한일회담 반대 여론이 높을 때여서 자신들이 민족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여론몰이였다는 게 중론이다. 1967년에는 음반법이 공포되고 이 법에 따라 108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된다.
<동백 아가씨>는 금지곡이 된 후에도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자를 청와대로 불러 이 노래를 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0·26 사태 1개월 전인 1979년 9월 박정희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이미자가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며 즐기는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1996년 2월 KBS 제1TV 일요스페셜을 통해 방영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정치 연설은 오늘이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온갖 부정선거로 3선 대통령이 된 그는 이듬해 유신 선포로 종신대통령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유신체제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헌법을 고치고 조선 시대에도 없던 제도를 만들어 사람들의 취향과 마음조차 통제하고 노래를 듣고 부를 자유마저 빼앗는다.
휴교와 계엄령이 반복되던 유신 시대.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박정희 체제에 저항하던 학생들이 가장 많이 불렀던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대학가에서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대목을 ‘한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꿔 부르자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유신 정부는 퇴폐적이라며 대학생들의 기타까지 압수하면서 수많은 노래에 족쇄를 채웠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시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장희의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이유로 금지곡 딱지가 붙는다.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킴>은 단신인 대통령 심기를 건드린다고 금지곡이 됐다고 한다. 정부는 건전한 대중문화 육성 명목으로 200곡이 넘는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는데 히트곡이 대부분이어서 충격은 더욱 컸다.
“문화공보부는 5일 대중가요를 비롯한 음반, 연극영화, 쇼 등 국민 생활과 밀착하고 있는 각종 공연활동의 정화 방안을 발표했다. 문공부는 이 방안이 아직까지 각종 공연활동의 질서가 문란했던 데 대한 과감한 조치라고 밝히고 건전한 국민 생활과 사회 기풍을 확립하기 위해 예술문화 윤리위의 사전공연 심의를 중심으로 대폭적으로 규제키로 했다고 밝혔다.” (아래 줄임) - 1975년 6월 5일 치 경향신문
위 기사는 고정간첩단 검거 관련 기사와 나란히 사회면 톱으로 실렸다. 당시 문공부가 밝힌 정화 방안은 ①국가의 안전 수호와 공공질서 확립에 반하는 공연물 ②국력배양과 건전한 국민 경제발전을 해치는 공연물 ③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공연물 ④ 사회 기강과 윤리를 해치는 퇴패적인 공연물 등으로 처벌 규정을 강화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가요는 눈물과 웃음으로 시대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 건국(1948) 전후에는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이 담긴 노래가 유행하였고, 70~80년대에는 암울한 시대를 표현한 노래들이 등장했으나 금지곡으로 묶인다. 고달픈 삶과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낸 노래들은 1990년대 들어 월북 작가 금지곡까지 해금되는 등 획기적으로 바뀐다. 10대 청소년들이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K-POP'으로 대표되는 대중음악은 한류 열풍을 불러오기에 이른다.
1980년부터 음반을 수집해왔다는 소성필 씨는 “가곡이나 팝송보다 대중가요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고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우리 고유의 정서가 깃들어 있고, 서민적인 애환을 공감할 수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며 광복 후 시인과 극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월북한 조명암(1913~1993)을 다시 언급했다.
“세광음악출판사가 1987년에 발행한 책 <풀려난 공연·방송 금지가요>를 보면 그해 500여 곡이 해금으로 빛을 보게 됩니다. 재심에서 보류된 금지곡 중에는 월북 작가 가요 88곡도 들어 있어요. 그 중 조명암 선생 곡이 60여 곡으로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광복 전 <서울노래> <알뜰한 당신> <추억의 소야곡> 등 500여 편 넘게 작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이러한 업적에도 친일파니 월북 작가니 해서 주옥같은 작품들이 가려져 안타깝습니다. 작품은 작품으로만 평가하고 감상해야 하는데...”
소 씨는 “저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대중가요 심의는 권력자가 아닌 국민이 해야 더욱 수준 높은 신곡이 발표되고, 작품의 예술적 가치도 돋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