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
김장철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추억들···. 배추꼬랭이 먹어봤나? 맛이 죽인다~
시골집 대청에 걸어놓은 무가 김장철임을 실감나게 한다. 장아찌를 담그려고 널어놓은 모양이다. 보기만 해도 입맛이 당긴다. 풍요와 함께 고향의 향수가 느껴지면서 무서리를 하던 코흘리개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나게 한다.
하굣길에 밭에서 늘씬하게 올라온 무를 발견한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진다. 장난기도 발동하면서 보는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확인한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다가가 발로 툭 차면 윗부분이 저만치 굴러간다.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뻔뻔하게 다가가 무 대가리를 주워 껍질을 벗겨 먹으면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게 꿀맛이었다.
간을 죽이려고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아놓은 배추는 보기만 해도 고소한 맛이 감돈다. 개나리꽃을 연상시키는 노란 배춧속을 한 가닥 얻어먹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안집 아주머니가 까나리액젓으로 버무렸으니 맛이나 보라며 유리그릇에 가득 담아온 파김치와 옆집 '방울이 할머니'가 비닐봉지에 담아온 생굴을 넣은 시원한 겉절이가 김장철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지금도 입안에 남아 있는 배추꼬랑이 맛
기자가 철부지였을 때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어머니가 고생하면서 담근 김치나 깍두기보다 '배추꼬랑이'(배추 뿌리)가 더 좋았다. 배추꼬랑이는 볶은 참깨를 뿌린 노란 배춧속도 따라올 수 없는 고소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은 밭에서 배추를 뽑으면 윗부분은 김치를 담그고, 가느다란 '뿌리'는 버린다. 맛도 없고, 먹을 게 없으니까 버리겠지만, 배고픈 시절에도 양배추 뿌리는 먹지 않았다. 그러나 토종인 경종 '뿌리'는 씹을수록 단맛이 감돌고 고소해서 '배추꼬랑이'라는 애칭까지 얻었고,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군것질거리로 인기가 좋았다.
김장할 때 식구가 많은 집은 '배추꼬랑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큰 포대에 담아서 창고나 건넌방, 아니면 땅에 갈무리해놓고 쪄먹기도 하고 깎아 먹기도 했다. 팥 광주리에 쥐 드나들 듯 건넌방을 드나들며 꺼내 먹던 추억이 새롭다. 보리누룽지도 귀하던 시절, 고구마와 함께 겨우내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막걸리 안주로 인기가 좋았던 '배추꼬랑이'는 아무 때나 먹는 게 아니었다. 어른 주먹보다 큰 놈도 있었는데 초가을에 배추를 뽑아 잘라먹으면 입안이 아리고 비린내가 났다. 그러나 입동(立冬)이 지나고 김장철이 시작되면 물이 올라 제맛을 냈다.
붕어빵 하나만 사 먹으려 해도 어머니를 온종일 따라다니며 졸라야 했던 시절, 누님이랑 동생이랑 화롯가에 둘러앉아 깎아 먹는 '배추꼬랑이'는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배추꼬랑이 사냥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입을 즐겁게 해줄 일이 하나 늘었다. '배추꼬랑이' 사냥이었다. 달구지가 배추를 가득 싣고 지나가면 고삐를 쥔 농부 아저씨 눈치를 살피면서 기회를 잘 포착했다가 달려가 '배추꼬랑이'를 잘라 호주머니에 넣는 일이었다.
'배추꼬랑이' 사냥에는 칼이 있어야 했는데, 돈이 없는 아이들은 대못을 철로에 비스듬하게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납작해진 못을 갈고 다듬어 칼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달구지에 매달리는 재미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금은 배추를 트럭에 실어 나르고, 아이들도 학원에 다니느라 배추꼬랑이 사냥을 할 시간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참외서리만큼이나 스릴이 있었고, 성공했을 때는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누가 큰놈을 잘랐는지 겨루기도 했다.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가 자기보다 몸집이 큰 물소 목을 물고 늘어지듯 달구지에 찰싹 달라붙어 '떼끼칼'(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작은 칼)로 '배추꼬랑이'를 잘랐다. 그러나 칼이 작아 아무리 능숙한 아이도 한 번에 성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절반 정도 칼질을 해놓고 따라가며 손으로 때리면 땅에 떨어질 때 줍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썰매를 타다가 배가 출출해진 누군가가 "배추꼬랭이 캐먹으러 가자!"라고 하면 모두 따라나섰다. 그리고 누런 시래기가 널브러져 있는 배추밭을 헤매고 다녔다. 대부분 사람들은 통째로 뽑아가지만, 윗부분만 가져가는 집도 있기 때문이었다. '배추꼬랑이'를 발견한 사람은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탄성을 질러댔다. 찬바람에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깎아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았던 '배추꼬랑이', 요즘 아이들이 즐겨 먹는다는 피자 맛에 비하랴.
소달구지의 추억
지금도 한 폭의 소도시 풍경화처럼 눈앞에 그려지는 추억이 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오는 말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입에서 하얀 거품을 내뿜는 게 불쌍하게 보였던 소에 대한 얘기이다.
고향동네 골목 앞 신작로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이었다. 이 길은 구시장과 청과시장을 끼고 있어 항상 붐볐다. 특히 가을이 되면 말 구루마와 소달구지가 많이 오갔다.
지금은 차에서 나는 소리가 소음공해라고 한다. 그러나 차가 귀하던 시절에는 자갈을 짓이기고 지나가는 달구지 바퀴 소리가 소음공해였다. 동이 트기 전부터 시골에서 추수한 나락과 채소를 가득가득 싣고 나오는 달구지들이 새벽잠을 방해했기 때문.
가을이 무르익으면 무와 배추를 싣고 나오는 달구지 행렬이 장대 열차처럼 이어졌다. 청과시장에 퍼 놓을 자리가 없으면 공설운동장 담벼락을 따라 세워놓고 기다렸다. 무거운 짐을 끌고 오느라 지친 소와 말들에게는 여물을 먹으면서 한가로이 쉬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루는 동네 친구들과 쉬고 있는 말에게 우르르 몰려가 둘러앉았다. 말이 콩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말의 성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콩 볶아 주께····."를 주문 외우듯 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말의 성기가 아래로 내려왔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나타난 농부 아저씨 고함에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일이다.
또 하나는 소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는 배추를 가득 싣고 오던 소달구지가 웅덩이에 빠졌다. 농부 아저씨가 고삐를 잡아끌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을 쓰다듬으며 어르고 달래도 움직이지 못하자 인상이 찌그러들면서 "야 이놈아, 이~르~아!"를 외치더니 잔꾀를 부린다며 채찍으로 소를 때렸다. 그래도 소는 앞발만 힘들게 내놓았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들 도움으로 빠져나오긴 했는데,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도 물기서린 눈망울로 하늘을 바라보며 버둥대던 소의 애처로운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곤 한다. 비록 철부지였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소가 눈물이 날 정도로 불쌍했고, 농부 아저씨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김장철이면 흔히 보던 가슴 아픈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