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서구식 경마가 최초로 시작된 것은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 연합 운동회에서 육상 경기(1898년 5월 28일)의 한 종목으로 나귀 경주가 행해졌던 것이 그 시원이다. (김중규의 <군산역사 이야기> 331쪽)
일제는 소화 2년(1927년) 군산 경마구락부 소속 미와사키(宮崎) 농지 2만 1천 평(지금의 팔마광장 부근)에 경마장을 조성한다. 전국 최초 공식규격 경마장으로 주로(走路)는 1.2km. 소화 7년 (1932년)에는 주로를 1.6km로 늘리고, 부지도 7만 8천 평으로 확장한다. 경제가 좋아진 요즘도 조성 허가를 받기 어렵다는 경마장. 하물며 84년 전 지방의 작은 도시에 전국 최초로 경마장이 들어섰다는 것은 무모하기까지 한데, 당시 군산의 유동인구와 경제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마대회는 1년에 벚꽃 개화시기와 단풍철 두 차례 전국 순회로 열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대회 보름 전부터 거리 곳곳에 포스터가 나붙었고, 악대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벌이는 등 홍보도 다양해서 경마장 출입이 어려운 가난한 조선 백성들에게 대단한 볼거리였다고 한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참가할 말들이 기차로 군산역에 속속 도착했고, 외지와 군산 경마구락부 말 80여 마리가 거리를 누비며 경마장으로 향했다. 경마장에는 일급 가수와 무희들이 출연하여 춤과 노래로 관객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화 16년(1941년) 가을경마를 끝으로 중단된다.
새로운 불행의 시작 ‘광복절’과 군산 ‘경마장 폭발사건’
1945년 8월 15일은 치욕의 식민지 36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주권을 되찾은 날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전국의 하늘로 울려 퍼졌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민족의 가장 큰 염원이 일제로부터 독립이었으니 해방의 기쁨을 어찌 말로만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그해 8월 22일 평양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9월 7일에는 미국의 ‘군정’ 선포와 함께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 한반도를 무 자르듯 잘라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통치를 시작했던 것. 새로운 불행의 시작이었다. 전북 군산은 10월 9일을 기해 기계화 부대를 주축으로 한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정이 시작되었다. 초대 군정관은 마우츠(Mautz) 소령. 그는 동 연합회의 추천을 받아 초대 군산 부윤에 서천출신 김용철을 내정하고 도의 승인을 받아 임명한다.
마우츠 소령은 패전국 일본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군산경마장’에 남겨놓은 무기(포탄)와 비행조종사 양성을 위해 소화 9년(1934년)에 건설한 ‘마쓰하라(松原) 비행학교’를 접수한다. 비행학교는 오늘날 전투기 폭음과 오·폐수 무단 방류로 문제가 되고 있는 ‘군산 미 공군기지’(군산비행장). 군산은 군정이 시작되고 52일이 지난 11월 30일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 터진다. 이름 하여 ‘경마장폭발사건’. 그날은 안방 자리끼가 얼을 정도로 추웠는데, 경마장에서 보초를 서던 미군 헌병들이 모닥불을 피우다 다량의 포탄이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엔 경마장이 외곽지역이어서 그나마 인명 피해가 작았는데, 한 마장 정도 떨어진 경암동 길을 걸어가던 아기 엄마가 정신을 잃고 길바닥에 나자빠지는가 하면 가슴에 안고 가던 두 살짜리 아기는 10m 밖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다행히 생명은 무사했다고. 폭발사건은 대형화재로 이어졌고 인명과 재산피해도 엄청났다. <군산 시사>에 의하면 미군 헌병 23명, 한국 소방경찰 7명, 민간인 3명, 의용소방대원 9명 등 모두 42명이 숨지고, 부상 1천여 명, 건물전파 177동, 이재민 650여 명이 발생했다. 당시 폭발음은 60리 떨어진 이리(익산), 김제까지 들렸다고 한다. 피해 흔적은 197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반파된 가옥이 주로 경암동, 경장동, 중동 등 빈민촌에 몰려 있었으며 가난한 주민들이 뒤틀어진 집을 복구하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폭발사고로 폐허가 된 군산경마장은 마을 사람들이 개간하여 농사를 짓다가 1949년 토지개혁 때 개인소유로 불하된다. 그러나 농사도 잠시. 66년이 지난 지금은 부근 논까지 주택단지가 되어 경마장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경마교(競馬橋)’ 하나만 외롭게 남아 가슴 아픈 그날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월명공원 위령탑
▲월명공원 위령탑
군산 ‘해망굴’ 계단을 밟고 월명공원에 오르면 행서(行書)체로 ‘의용불멸’(義勇不滅)이 새겨진 탑이 보인다. 1961년 5월 5일 당시 강정준 의용 소방대장과 지종환 군산소방서장이 경마장폭발사건 때 산화한 아홉 의용소방대원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새기고자 세운 위령탑이다. “일본제국주의자 식민지 정책에 의한 노예에서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민생은 도탄에 헤매고 사회는 혼란하여 치안유지의 긴급성을 깨달은 청년들은 동지(120명)를 규합하여 군산 의용소방대를 조직하고 시민생명 자산보호와 사회 안녕 질서유지를 위하여 상부상조 정신으로 활약하던 중··.”(비문 중간 부분) 군산소방서는 해마다 11월 30일이면 유가족과 함께 순직대원 9인을 기리는 추모제를 지낸다. 위령탑은 백화양조(대표 강정준)를 비롯해서 고려제지, 한국주정, 호남제분 등 굵직한 향토기업 20여 개와 개인이 찬조하고 있어 건립 의미를 더한다.
비석에는 의용 소방대장 권영복, 부대장 김덕제, 반장 박기봉, 서정운, 이을문, 대원 이규철, 곽한수, 김남선, 김복득 등 당시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행정의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혼란 속에서 공무원도 아닌 민간대원들의 희생은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대원 대부분이 30대여서 더욱 안타깝게 하는데, 권영복 대장은 중앙로 2가에 있던 안동주조장 사장이었고, 이규철 대원이 운영하는 ‘조화(朝和) 자전거포’와 마주보고 있었다. 66년 전 상황을 현장감 넘치게 구술해준 이종남(77세) 어른은 이규철 대원의 큰아들.
이종남 어른이 전하는 ‘경마장폭발사건’ 그날
1945년 11월 30일 오전 10시 30분 군산시 중앙로 2가 ‘소화 공립소학교(현 중앙초등학교)’ 5학년 3반 교실. 청소당번 학생들은 교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종남 학생은 비번이어서 급우들과 1학년 교실 청소를 해주러 갔다. 청소가 끝나갈 무렵 천지가 진동하는 폭발음과 함께 교사(校舍)가 흔들렸다. 유리창이 깨지고 교실 벽에 걸어놓은 게첩물이 쏟아져 내렸다. 칠판이 떨어지면서 많은 학생이 다쳤다. 교실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영문을 모르는 학생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혼비백산. 울부짖기도 하고,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며 벌벌 떠는 학생도 있었다. 지진이 났으니 모두 엎드리라는 선생님 말씀에 서로 껴안고 뒹굴면서 몸을 피했다. 이종남 학생이 고개를 들어 창을 내다보니까 동쪽 하늘에서 검은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진짜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교사가 2층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와 이마를 다쳐 응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래도 수습이 빨리 되었다. 휴교령이 내려졌고, 선생님은 서둘러 종례를 마치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종남 학생은 등굣길(중앙로) 곳곳에 일제가 파놓은 방공호에서 재폭발에 대비한 훈련을 받으며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아이고, 내 새끼가 살아서 돌아왔구나!” 하고 껴안으면서 감격스러워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이종남 학생은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과 애틋한 사랑을 몸으로 느꼈다.
의롭게 죽어간 아버지, 30년 수절하며 5남매 키워낸 어머니
이종남 학생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자전거포로 나갔다. 그러나 의용소방대원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가게에서 일하다가 비상연락망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이내 폭발현장으로 출동했던 것. 이종남 학생은 뒷집에 전염병 환자만 발생해도 달려가던 아버지여서 그러려니 했다.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던 이종남 어른은 갑자기 침통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그날 등교할 때 했던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라고 했다. 철부지 열한 살이었지만, 아침을 함께한 아버지를 알아보기 어려운 시체로 만났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었겠는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가 소방서 연락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지. 그런데 의용소방대원 시신 아홉 구 모두 새카맣게 타버려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가 없었어. 이(齒)를 보고 겨우 찾았는데 입관을 못 할 정도로 팔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어.(한숨) 소방경찰이 ‘연쇄폭발을 막으려고 폭약 나르시다가 돌아가신 것 같다.’ 라고 하더라구. 어쩔 수 없이 화장(火葬)해서 해망동 넘어 공동묘지에 모셨다가 개정으로 이장했지.”
이규철 대원은 서른셋 나이에 아내(김복덕)와 2남 2녀를 남기고 의롭게 순직했다. 김복덕은 스물아홉에 혼자가 되었다. 당시 뱃속에는 임신 5개월 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다행히 이듬해 아이를 순산했고, 30년을 수절하며 5남매를 건강하고 훌륭하게 키워냈다. 남편이 하던 사업도 번창시키고, 1975년 한(恨) 많은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분위기는 다시 숙연해졌다. “60년이 넘었는데도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어. 어느 날 밤이었지. 한참 자다가 눈을 뜨니까 어머니가 잠들지 못하고···, (울먹임) 눈물바람을 하고 계시는 거야. 그때가 열두 살 때였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면서 가슴에 맺힌다니까. 무능하고 몸이 약한 나만 왜 그리도 예뻐하셨는지···.”
이종남 어른은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남편(아버지)과 자식만을 위해 살아오셨어.”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버지 장례식 때 어머니가 ‘나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요. 사랑하는 아이들의 어머니요!’라고 적어놓은 글귀를 지금도 기억한다니까.”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이종남 어른은 태평양전쟁(2차대전) 승전국으로 패전국 일본이 사용하던 군기지와 무기를 접수한 미국의 허술한 관리를 탓했다. 군산경마장 폭발사건은 미국에도 책임이 있음도 내비쳤다. “아무리 추워도 그렇지, 접수했으면 자기들 영역인데 포탄이 지하에 묻혀 있는지 창고에 쌓여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냐. 그것도 모르고 헌병들이 모닥불을 피우도록 내버려두다니. 원인제공은 일본이 했고, 잘못은 미국에 있는 것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