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태권도 발상지에 빗돌이라도 세워야”
[인터뷰] 군산시태권도협회 김혁종 고문이 전하는 군산의 태권도 역사
제10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가 지난 7월(14~19) 전북 무주에서 성대하게 펼쳐졌다. 참가 선수는 육대주 34개국에서 1천700여 명, 역대 최대 규모였다 한다. 올해 엑스포는 태권도 경연대회 외에 아리울스토리, 코리아타이거즈 태권도 시범, 풍물놀이 등 다양한 공연과 문화 행사가 열렸다. 환희와 감동 열정으로 채워졌던 이번 엑스포는 ‘세계 태권도인이 하나 되는 EXPO’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는 국제행사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태권도 종주국으로 그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분 벽화나 불상, 서적 기록 등에서 확인된다. <일본 서기>에 백제 최고 벼슬인 대좌평 지적을 초청해 일본 건아들과 상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백제가 일본에 맨손 무예를 전수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구려가 무예의 기본, 그 중에도 택견(태권도)에 큰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은 고분 벽화에도 잘 나타난다. 경주 석굴암의 금강역사상 동작도 태권도 서식과 유사하다.
고려 시대에도 삼국시대 택견이 체계화된 무예로 무인들 사이에 활발히 행해졌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 시대와 비슷하게 무인들 사이에 성행하였다. 택견은 세월이 흐를수록 대중화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행해지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항쟁 수단이 되는 무예 수련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광복군 등 항일조직의 훈련이나 개인적인 무예 전승 의지에 따라 미미하게나마 민족의 숨결과 함께 이어질 수 있었다.
전라북도 최초 태권도 지도관, 군산에 설립
지난 9월 4일은 ‘태권도의 날’이었다. 세계 태권도인들의 단결과 태권도의 위상 강화를 위해 2006년 7월 25일 WTF(세계태권도연맹) 정기총회에서 정했다고 전한다. 한국의 태권도는 전북에서 꽃을 피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군산은 전북 최초로 태권도 지도관이 개설된 도시로 알려진다. 불모지였던 군산에 터를 닦은 태권도인은 김혁래(1928~1969) 사범, 그의 친동생이자 제자인 김혁종(75) 군산시태권도협회 고문을 지난 23일 시내 북-카페에서 만났다.
김 고문 증언에 따르면 조선연무관(한국체육관)은 1946년 6월 서울에서 태동했다. 하지만 체계적인 보급은 전북지역 지도관(支館)을 통해 이뤄졌다, 그 첫 번째 지도관이 1947년 5월 17일 김혁래, 전일섭 사범이 군산시 장미동에 개관한 군산체육관이었다. 그 후 전주, 이리(익산), 김제, 정읍, 남원 등 전북 전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당시 군산체육관은 태권도, 유도, 역도 권투부 등이 들어선 종합체육관이었다.
군산체육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2층 높이의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국내외에 이름을 떨친 선수와 지도자가 다수 배출되어 군산 체육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는 군산체육관 출신 태권도 사범만 10여 명. 특히 김혁래 사범이 군산비행장 체육관 사범으로 미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어 외국으로 진출한 전북 지역 태권도인 대부분이 군산을 거쳐 갔다고 한다.
형제가 미군비행장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
김 고문은 형님(김혁래 사범) 권유로 초등학교 5학년 때 태권도와 인연을 맺는다. 당시 군산체육관은 전일섭 관장, 김혁래 사범 체제였다. 김 고문은 고등학교 시절 서울과 지방에서 열리는 각종 대회에 출전한다. 전북 대표로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초에는 스승이자 형님인 김혁래 사범과 함께 군산비행장 미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다. 병역을 마친 후에는 군산시 장미동의 창고를 빌려 호남체육관을 개관한다.
1970년대에는 빈해원 건너편에 있는 호남제분 창고로 옮겨 종합체육관으로 거듭난다. 당시 체육관은 홍성훈(유도부), 조부연(태권도부), 최동영(역도부) 사범 체제였다. 김 고문은 관장으로 미군비행장 체육관 태권도부 사범을 겸하였다. 김 고문이 그동안 배출한 제자는 미군 포함해서 수천을 헤아린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 진출해서 도장을 운영하는 제자도 여럿 된다. 전영인, 이봉희, 최종현 사범은 미국 LA와 캘리포니아에서 지도자로 활동 중이란다.
그중 전영인 사범은 미국에서 Grand Master(총관장)로 통한다. 그는 미 대학대표팀 및 국가대표팀 헤드코치를 13년 역임하면서 미국에 올림픽 금메달을 몇 차례 안겨줬다. 최고 지도자 반열에 오른 그는 다양한 태권도 페스티벌을 추진하였고, 미 올림픽위원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코치 상’을 두 차례(1997년, 2000년) 받았다. 2012년에는 제6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 참가를 위해 주니어대표 40명을 이끌고 귀국, 군산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매년 5월 LA에서 국제태권도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전 사범은 시니어부는 전북 태권도 대부의 이름을 따 ‘전일섭 컵’으로, 주니어부는 자신의 스승인 ‘김혁종 컵’으로 이름 붙였다. 그는 영문 잡지
김혁래 사범은 한국 태권도의 세계화에 큰 공로자
-매년 9월 4일은 ‘태권도의 날’이다. 그 유래는?
“태권도는 알려져 있다시피 대한민국의 전통 무예이자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대중스포츠이다. 따라서 ‘태권도의 날’은 대한민국 국기인 태권도가 전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날을 기념하고,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정해졌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103차 총회에서 한국의 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할 것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전일섭, 김혁래 사범이 군산과 전북 태권도계에 끼친 영향은?
“전북이 태권도의 고장이 된 데에는 1947년 군산에 지도관을 개설한 전일섭, 김혁래 사범의 공이 크다. 두 분은 동토나 다름없는 척박한 땅을 기름진 옥토로 만든 개척자들이다. 해방정국의 혼란과 극심한 가난,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꾸준히 관원을 모으고 세를 확장해서 의미가 더욱 깊게 느껴진다.
전일섭 사범은 한국 태권도계의 대부 전상섭(한국전쟁 때 월북)씨 친동생이다. 당시 전 사범은 군산세관 직원으로 후배인 김혁래 사범 집에 거주하면서 직장과 체육관을 오갔다. 1950년대 중반에는 전주에 지도관을 개설하고 관원을 모아 지도했다. 전 사범 제자들이 다른 시군에도 보급했다. 전주, 군산, 이리(익산) 등에서 태권도 대회가 성황리에 열리면서 점차 뿌리를 내렸고, 그 저력(당시 개발된 기술과 경기 규칙 등)은 우리나라 태권도가 세계적인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김혁래 사범은 일찍 작고하는 바람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 태권도의 세계화에 숨은 공로자이다. 김 사범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외국인(미 공군)을 집단으로 교육, 태권도를 세계에 알리고 보급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게 수련을 쌓은 많은 제자들이 세계 각국으로 진출해서 도장을 차리고 대회를 유치하는 등 태권도 물결을 일으켰다.
전 사범이 전주에 도장을 차린 후 김 사범은 돌아가실 때까지 약 15년 동안 군산체육관 관장과 군산미군비행장 사범을 겸했다. 김 사범이 태권도를 가르친 미군 병사만 수천을 헤아린다. 장교도 많았다. 5~6년 전으로 기억한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독일 스포츠계 인사가 김혁래 사범에게 태권도를 배웠다며 추억이 담긴 유품을 가족에게 전해달라는 소식을 접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김혁래 사범은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고향이 군산이지만, 형님(김혁래)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태권도는 서울에서 배웠다고 한다. 형님은 160cm 남짓의 작은 키에 과묵하고 여린 분이었다. 그런데 도복만 입으면 눈에서 빛이 나면서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체격이 우람한 흑인병사들도 꼼짝 못 했다. 그래서 미군들이 태권도에 매력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내가 형님 도장의 헬퍼(helper·부사범) 역할을 하면서 도와드렸는데 안타깝게도 마흔을 막 넘긴 어느 날 고혈압으로 쓰러져 작고하셨다. 마음이 따뜻한 형님이자 존경하는 스승이었는데··· ”
태권도는 한국인의 얼과 정신 철학이 담긴 스포츠
-김 고문이 배우던 시절 태권도와 요즘 태권도의 다른 점은?
“옛날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예의를 무척 중시했다. 체육관 입관 선·후배 사이에는 나이와 관계없이 위계질서가 철저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고, 선배 앞에서는 감히 담배도 피울 수 없었다. 연습이 끝나고 샤워할 때도 입관 순서대로 샤워장에 들어갈 정도였다. 특히 신입 수련생은 도장 마루를 매일 닦아야 했다. 지금 그랬다가는 큰일 날 거다. (웃음)
그리고 옛날 태권도는 무척 과격했다. 병사들이 익히는 무예에 가까웠다. 그러나 요즘엔 부드럽고 유연해졌다. 예전에는 일회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타격 부위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포인트제를 채택하면서 달라졌다. 손기술의 경우 바른 주먹의 인지와 중지 앞부분을 이용해야 유효하고, 발기술 경우는 복사뼈 이하 부위를 이용한 공격이어야 포인트가 올라간다.”
-50~60년대에 유단자(초단)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나?
“그 옛날 초단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초기 수련생은 흰띠, 4급 이하는 청띠, 1급 이하는 밤띠, 초단은 검은띠를 착용했다. 초단 시험은 대련(겨루기)도 하고, 정권과 수도로 벽돌이나 기왓장을 깨는 격파 시범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4급까지는 수련생이 품세(태극 1장~태극 8장) 시범을 보이면 심사위원이 숙련도, 정확도 등을 고려해 점수를 줬다. 태극 품세는 진행선이 ‘임금 왕(王)’ 자로 되어 있어 태권도는 한국인의 얼과 정신 철학이 담긴 스포츠임을 보여주고 있다.”
-실력이 출중한 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중 전영인 사범의 수련생 시절이 궁금하다
“전영인 사범은 ‘청출어람’을 떠오르게 하는 제자다. 내가 운영하는 체육관 부근에 살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랐음에도 무척 착했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때는 겨울에도 체육관에 난로가 없었는데, 아무리 추워도 아침 일찍 나와서 청소도 하고 기구도 정리했다. 그처럼 체육관을 자기 집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수련생이었다.
영인이는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사판 일꾼 등 온갖 고생 끝에 1990년 미국대학대표팀 고치를 맡았다. 2000년에는 시드니올림픽 헤드코치를 지냈고, 미국에 금메달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LA 근교에 자기 소유 도장도 차리는 등 이역만리 타국에서 입지를 다졌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미국에 들어간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연락도 끊기고 소식을 몰라 궁금했는데 어느 날 유명 인사가 되어 찾아왔다. 얼마나 반갑고 놀랐는지, 너무도 감격적이었다.”
-침체에 빠진 군산의 태권도가 나아갈 방향은?
“방향 제시는 그렇고, 희망 사항을 말하고 싶다. 전라북도 태권도 1번지(태권도 발상지)가 군산인 것을 아는 시민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다. 태권도가 전북 최초로 둥지를 튼 장소(전 군산체육관 자리)에 자그만 기념 빗돌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시민과 청소년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고, 관광객이 많이 오가는 길목이어서 군산 홍보에도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태권도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
자료출처: 디지털군산문화대전 <군산의 체육>(작성자 조종안), 서성원 지음 <태권도 현대사와 길동무하다>(상아기획 2007), <전북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