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동. 그는 최초 해병대 장교출신 법조인
[인터뷰] 대한민국 해병 역사에서 ‘최초기록 세 개’ 보유한 김귀동 변호사
전북 군산은 대한민국 해병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항구도시다. 1949년 4월 부대 창설 이후 최초 상륙작전(1950년 7월, 군산·장항·이리지구 전투)을 승리로 이끌어 ‘무적해병’ 신화의 시발점이 됐던 것. 당시 해병(고길훈 부대)은 장항을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의 금강 진출을 저지하면서 정부미 1만 3000가마와 주요 군사 물자 반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군산-해병의 인연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병대 장교 출신 사법시험 합격자도, 판사 임명장도 군산 출신 법관 지망생이 첫 테이프를 끊는다. 1983년 10월의 일이니 해병 창설 34년 6개월 만에 예비역 중위(포병)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 해병대 70여 년 역사에서 ‘최초’ 기록을 세 개나 보유(해병 장교로 병역의무를 마친 최초 서울대 법대생 기록 포함)한 주인공은 군산에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김귀동(66) 변호사다.
대한민국 해병대 법조회장(해병 장교·사병 출신 법조인들 전국모임)도 겸하는 김 변호사. 지난 월요일(22일) 오전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아무리 지옥훈련이라 해도 사람을 죽이기까지야 하겠느냐는 절박한 심정으로 입대했지만, 실무에서 갈고닦은 지식과 경험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선택을 잘했던 것 같다.”라며 색바랜 흑백사진처럼 희미해진 추억들을 떠올렸다.
“전직 판사여서 그런지 저를 해병 법무관 출신으로 아는 분이 많은데요. 해병대에는 법무관 제도가 없습니다. 해군에서 파견되어 근무하죠. 개인적으로 한미합동훈련 연락장교로 선발되어 상륙훈련을 마칠 때까지 미 함대에서 미군과 근무한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요. 40년이 지난 지금도 해병대 정신인 ‘하면 된다’는 믿음이 삶에 활력소가 되고 있습니다.”
모교와 고향에도 의미 있는 기록 남겨
김 변호사는 율사 출신의 점잖은 이미지와 달리 태권도 유단자(초단)다. 익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과 전주의 명문고로 진학하는 급우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운동이라도 해야 울적해진 기분이 풀어질 것 같아 아버지를 졸라 지도관(태권도장)에 입관한 것. 입술이 터지고, 발목이 삐는 등 크고 작은 상처를 입으면서 승급과 승단시험을 통과, 10개월 만에 초단을 따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모교인 서울대 법대에도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다. 1974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4월 귀신도 잡아낸다는 해병 장교(해간 55기)로 자원입대한다. 이어 기초교육과 병과 교육(각각 4개월)을 빡세게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 첫 근무지는 포항 해병사단 포병연대. 그 후 최전방 연평도에서 2년을 복무하고, 사단 연락장교로 근무하다가 1977년 8월 중위로 만기 제대한다. 이로써 해병 장교로 병역의무를 마친 최초 서울대 법대생이 된다.
“저도 해병 장교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교련반대 데모에 참여한 전력 때문이었는지 1973년 말쯤 징집 영장이 나와 있었거든요. 그래도 연기신청을 내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고시준비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두 남동생이 대학을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죠. 부모에게 경제적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생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줘야겠기에 훈련이 고되기로 소문난 해병 장교 자원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장교 복무를 선택한 것은 동료 학우들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어요. 제 성격상 사병생활을 견디지 못할 거라는 게 이유였죠. 할 수 없이 장교로 가는 길을 알아보니 육군은 ROTC 외에는 없고, 공군은 복무 기간이 4년 4개월로 너무 길었습니다. 해군(당시 함정과와 해병과가 있었음)은 훈련포함 3년 4개월이었으나 함정과는 배를 타면 갑갑함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해병과를 택했지요.”
그의 ‘최초’ 기록은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자료에서도 발견된다. 광복 후 지금까지 군산 출신 사법고시 합격자는 30여 명. 그중 판검사 진출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특히 군산지원 제1호 판사는 1989년 3월에야 탄생한다. 그 주인공이 김 변호사인 것. 사법연수원 수료(1986) 후 전주지방법원과 군산지원에서 각각 3년씩 근무한 뒤 곧바로 변호사를 개업한 그는 향리(전북)에서 법관 생활을 시작, 향리에서 마무리한 법조인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김귀동(金貴童) 변호사는 군산시 회현면 소농가의 장남(3남 1녀)으로 태어났다. 부모 재산은 논 세 필지가 전부. 가족이 함께 농사를 지어 고생은 됐지만 끼니 걱정은 안 했다. 집에서 약 4km 떨어진 용화초등학교를 다녔다. 차분하고 논리적인 성격에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주워들은 실력으로 유행가도 곧잘 불렀다. 항상 교실 분위기를 리드했고, 초등학교 6년 내내 급장을 맡았다.
장래 희망은 전투기 조종사. 굉음과 함께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창공으로 치솟는 전투기를 볼 때마다 공군 파일럿이 된 자신의 멋진 모습을 상상했다. 존경하는 인물은 굳은 결의로 나라를 지키다가 전사한 계백 장군과 이순신 장군. 농번기에는 못줄도 잡고, 수차(무자위)도 돌리고, 만경강에서 친구들과 물장구도 치는 등 주어진 환경과 자연에 적응하면서 호연지기를 기른다.
서울대 진학이 모두의 로망이던 1960년대 초. 귀동의 집을 방문한 담임이 군산은 서울대 진학률이 낮으니 서울이나 전주, 아니면 이리(익산) 남성중은 가야 한다고 강력히 권유한다. 이에 아버지는 서울은 꿈도 꿀 수 없고, 전주는 하숙해야 하는데 하숙비 대줄 형편이 못 된다며 난감해한다. 그때 어머니가 타협안을 내놓는다. 기차통학을 한다면 남성중에 보내주겠다는 것. 귀동은 어머니의 합리적인 중개로 남성중고등학교 6년을 마칠 수 있었다.
“기차통학을 하면서 수업 시작 전 학교에 도착하려면 늦어도 새벽 4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허둥지둥 새벽밥을 먹고 5시쯤 집을 나섰어요. 집에서 대야 역까지 왕복 14km를 걸어서 다녔거든요. 집에 자명종 시계가 없었음에도 어머니는 6년 동안 한 번도 기차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여간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그 희생적인 정성과 사랑은 말로 표현되기 어렵죠.
시간이 빡빡하다 보니 실력이 쟁쟁한 급우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웠습니다. 고육책으로 집에서 대야 역까지 오가는 2시간 30분을 영어단어와 수학 공식 외우는 예습시간으로 정했죠. 기차 타는 시간도 활용했습니다. 일요일은 총 복습시간으로 이용했어요. 그때 우리 마을(증석리)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등잔불을 켜고 살았습니다. 졸면서 공부하다가 앞머리가 꼬실라져 급우들에게 놀림당하던 기억도 새롭네요. (웃음)”
서울대에 두 번 입학, 고시합격은 졸업 후로 미뤄
1969년 2월, 남성고를 졸업한 귀동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인 서울대 문리대에 당당히 합격한다. 그러나 기쁨보다 아쉬움이 밀려왔다. 슬그머니 속도 상했다. 서울대 입학 숫자로 명문고가 가려지던 시절. 자신은 법대를 지망했으나 담임선생님이 합격 성적이 되지 않는다며 원서를 써 주지 않았던 것. 최고 명문대에 합격하고도 등록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그는 결국 1학기만 다니고 휴학계를 제출한다.
귀동은 휴학한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리고 집에서 보내준 등록금으로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다는 대성학원에 등록한다. 당시 서울대 등록금은 학기당 2만 원 정도. 숙식과 학원비 충당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자구책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원비는 면제받고, 잠은 사설독서실 의자를 길게 붙여놓고 자고, 밥은 막일꾼들이 이용하는 야시장에서 해결한다. 눈물겨운 도전과 노력은 이듬해(1970) 서울대 법대 합격으로 결실을 본다.
“합격을 확인한 순간 뛸 듯이 기뻤어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유신 시절이어서 한일회담 반대데모, 교련 반대데모, 3선 개헌 반대데모, 유신헌법 철폐데모 등 데모의 연속이었죠. 휴업령, 휴교령, 경비계엄, 비상계엄 등 정부의 강경조치로 휴교가 이어졌습니다. 1년 수업일수가 3~4개월에 그쳐 부족한 공부는 교내 도서관에서 틈틈이 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학생도 5명 안팎에 불과했고요. 역부족이었던 저는 고시합격을 졸업 후로 미루고 군 복무를 택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 아내에게 한없는 고마움 느껴
군 복무를 마친 귀동은 고시원에 들어간다. 학창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능률은 오르지 않고 고시원에서 만난 동기들과의 담소 시간만 길어졌다. 술자리도 많아졌다. 집중력은 떨어지고, ‘때리고 부시고 마셔라’ 하던 해병대 시절 추억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면서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6개월쯤 지나자 이런 고시공부는 허송세월, 즉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취업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반거충이가 될지 모른다는 절박함에 직장을 물색하던 그는 대한투자신탁(주) 입사시험에 합격한다. 처음엔 기획부에서 기획업무를 봤다. 이후 노동조합 총무부장 겸 법규부장으로 직원들 근로조건 개선투쟁에 앞장선다. 대리로 승진도 하고, 노조 부위원장도 맡는다. 그러나 만족을 느끼진 못한다. 별다른 전망이 없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표를 던지고 자신의 좌우명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사법시험에 재도전한다.
“감사실 대리로 근무할 때였어요. 하루는 사장(차관 출신)이 부르더니 볼일이 있다며 재무부(재정경제부)에 들어가자고 하는 거예요. 재빨리 따라나섰죠. 그런데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어요. 사장이 사무관에게 꼼짝달싹 못 하는 겁니다. 저까지 초라하고 나약하게 만들더군요. 훗날 최고 경영자가 된다 해도 마음껏 소신을 펼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직서를 제출했죠.”
그는 고시원이나 사찰로 들어가는 다른 수험생들과 달리 시립도서관을 이용한다. 젖먹이를 키우며 출퇴근하는 아내를 돕기 위해서였다. 심기일전, 도시락을 싸 들고 도서관을 오간 귀동은 재도전 2년만인 1983년 10월 사법시험(제25회)에 합격한다. 그해 나이 서른넷. 법조인 지망생으로는 고령이었다. 그러나 성적은 합격자 300명 중 20위권. 해병 장교 출신으로 최상위권을 차지한 그는 사법연수원(15기) 성적도 우수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다.
김 변호사는 1981년 봄 친지 소개로 혼례를 치른 지금의 아내(당시 고등학교 국어교사)에게도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아내의 고마움은 크게 세 가지. 사시에 재도전하겠다고 상의했을 때 격려하면서 믿고 따라준 것. 단칸방에서 교사직을 유지하며 젖먹이를 키우면서도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것. 치매로 고생하는 시어머니 대소변을 불평 한마디 없이 3년 넘게 받아내며 모신 것 등이다.
고향 근무, 잡음 한 건 없었던 것에 자긍심 가져
예비 법조인 김귀동은 법무부로부터 수도권 검사 발령 제의도 받았으나 주저 없이 판사를 선택한다. 첫 발령도 자신의 희망지인 전주지방법원으로 받는다. 그는 초임 판사 시절을 거의 매일 밤 12시가 넘도록 사건기록을 검토하면서 판결문을 쓰고, 재판을 진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다. 판결문을 만년필로 작성하던 시절이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고, 고충도 컸다고 한다.
그는 전주지법 근무 3년(1986~1989) 동안 형사합의부, 민사합의부, 형사항소부에 있으면서 판사는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 일을 중점적으로 하는 직업으로 법률 분야 지식도 필요하지만, 경험과 경륜에 의한 판단력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김 변호사는 “군산지원(1989~1992) 근무는 무척 조심스럽고 걱정도 됐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부모를 뵐 수 있어 좋았고, 고향이라는 이점도 크게 작용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군산으로 발령받고 가장 큰 걱정은 주변의 ‘청탁’이었죠. 생각 끝에 친지와 학교 동문, 지인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상담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받아주겠다. 다만 판사가 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 그런 경우에는 변호사와 상의해서 해결책을 찾아라. 내가 선처해줬을 때 금품이 뒷거래로 오갔다거나 나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경우에는 법에 따라 엄단하겠다는 내용이었죠.
사건 뒷이야기(비하인드 스토리)를 대부분 감지할 수 있어 재판에 많은 도움이 됐고, 다양한 정보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어 브로커들의 협잡을 미리 방지, 척결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사건 당사자들이 한두 사람만 통하면 연결되는 좁은 군산에서 잡음 한 건 없이 근무한 것에 자긍심을 갖습니다. 제 뜻을 이해하고 협조해준 주변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죠.”
그는 군산 근무 3년째인 1992년 초 법관 인사이동을 앞두고 서울로 지망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몸져누워있고, 엄청나게 오른 수도권 전세금이 발목을 잡았다. 나이가 동료 판사들보다 7~8살 많은 것에도 부담을 느낀다. 그런 와중에 선배 판사가 고향에 남아 활동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권유한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서울 진출을 포기하고 변호사 개업을 결심하게 된다.
훌륭한 법조인 되려면, 수학·과학·논술 등에도 관심 가져야
군산에서 법률사무소를 25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김귀동 변호사. 그는 군산 관련 서적을 100~200권씩 사뒀다가 타지 손님에게 선물할 정도로 애향심이 깊다. 군산(익산) 변호사회장을 비롯해 군산경실련 공동대표도 지냈다. 군산문화원 이사, 군산국악원 자문위원장, 개항 100주년 시민장학회 부회장 등 활동 영역도 다양하다. 향토문화유적과 전통을 보존하고 홍보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왔다.
2006년에는 주위의 강력한 권유로 군산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경험도 있다.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오른 비응도 방폐장(방사선 폐기물 매립장) 유치를 시민의 85%가 찬성하고 다른 후보들은 침묵 및 동조하는데, 군산 발전과 후손을 위해 안 된다며 선거운동 기간 내내 환경운동 단체와 함께 반대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법조인 지망생들에게 전하는 조언 한마디를 부탁했다. 아래는 김 변호사가 장래 법조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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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이란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을 이르는 말입니다. 요즘 법조인이 되려면 로스쿨을 수료하고 변호사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로스쿨은 4년제 일반대학을 졸업해야 입학자격이 주어지고, 성적이 참조됩니다. 그러므로 법조인이 되려면 학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합니다. 그리고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한 수학, 과학, 논술 등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어야 훌륭한 법조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임: 김귀동 변호사 자료사진을 넉넉하게 보냅니다..적절한 위치에 배치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