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시작할 때 빚이 3천만 원,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죠”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46] 군산의료원 응급실 간호사 김선진
“얼마 전에, 고등학교 때 같이 방송부 했던 친구를 만났어요. 제가 총연출이었고, 친구는 FD(연출 보조)였어요. 지금 그 친구는 방송대 졸업하고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거든요. 한 달 월급이 100만 원이 안 된대요. 현장에서 일 하는데 먹고 사느라 저금도 전혀 못 하고요.
근데 그 친구가 웃으면서 너무 재미있다고 하는데, 뭐라고 해야지? 진짜 부러웠죠. 저도 하고 싶던 일이니까요. 누가 저보고 8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선택을 해보라고 하잖아요? 저는 여전히 간호대 갈 것 같아요.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밥을 먹고 사니까요.”
선진씨의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학생, 부모님한테 받은 용돈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좋았다. 집안 살림살이에 압류딱지가 붙은 게 고3, 선진씨는 처음으로 장남이라는 책임감을 느꼈다. 부모님이 고단하게 사는 모습을 보았다. 빨리 학교 졸업하고, 빨리 취업해서, 빨리 집안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2008년 여름, 수능 3개월 앞둔 어느 날. 선진씨는 전망이 밝다는 남자 간호사 세계를 알았다. 갈 곳은 간호대학뿐인 것 같았다. 문제는 성적, 그는 학교 공부에 소홀했다. 친구들과 노는 게 먼저였으니까.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어느 간호대학에 지원하든, 그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일단, 수능시험에 매달렸다.
“모르니까 책을 다 외웠어요. 각 대학마다 보는 점수가 있거든요. 군산간호대학은 국어, 영어, 수학 중에서 잘 본 과목 두 개를 합산했어요. 사회탐구영역도 네 과목에서 잘 나온 두 과목만 선택해서 평가하고요. 모의고사 보면, 항상 6등급 정도 나왔어요. 근데 수능시험은 운이 따랐어요. 국어 3등급, 영어 4등급, 사회탐구는 두 과목에서 1등급이 나왔어요.”
선진씨는 군산간호대학 추가합격순위 200번이었다. 합격생 중에서는 다른 대학으로 진학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덕분에 그는 대학에 입학했다. “학교 문 닫고 들어왔다”, “꼴등으로 들어왔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했다. 시험 점수가 평소처럼 나왔다면, 분명히 떨어졌을 터였다. 선전씨는 자신의 합격비결을 ‘운’이라고 했다.
대학 합격의 기쁨 뒤에 따라온 학비 걱정. 입학까지 남은 3개월, 선진씨는 한 횟집의 주방보조로 일했다. 밑반찬을 접시에 놓고, 매운탕 끓이는 것을 돕고, 잡일을 했다. 시급 3500원씩 받아서는 400여만 원(책 값 포함)인 대학 입학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첫 학기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간호대는 일반 대학이랑 일정 자체가 달라요. 강의 시간표가 아예 짜서 나와요. 처음에는 어려웠어요. 간호학은 기초적으로 미생물학, 생리학, 양리학, 해부학 등 8가지 과목을 배워요. 기본간호학도 배우고요. 엉덩이 주사도 그냥 놓는 게 아니에요. 근육을 분할해서 놓는 거거든요. 2학년 올라가야 호흡기, 순환기, 내분비계 같은 수많은 전문 과목을 배워요.”
선진씨는 공부할 때 어려웠다.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서 따라만 갔다. 1학년 마치고는 휴학, 돈 벌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보탬이 되는 아들이 되고 싶었으니까. 핸드폰 매장에서 영업 일도 하고, 예식장의 식당에서 서빙 일도 했다. 어느 날은 결혼식 사회도 봤다. 하루 12시간씩 근무하고 일당 5만 원을 받았다.
하루살이 같은 알바보다는 매일 출근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는 익산에 있는 한 과자 공장의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다. 기계가 과자를 만들고 포장을 하면, 상자에 넣어서 나르는 노동. 1일 2교대,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텃새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선진씨는 20kg 짜리 상자를 쉴 새 없이 날라야 했다. 허리가 끊어질듯 아팠다.
“너무 힘들어서 구인광고를 자주 봤어요. 원광대병원 차트실에서 사람을 구하더라고요. 지금은 병원에서 전자 차트를 쓰지만 그때는 종이 차트를 갖고 가야 환자가 진료를 받을 수 있었어요. 의무기록실에 번호 별로 정리된 차트가 500만 개였어요. 저는 그걸 찾아서 각 부서에 넘겨줬어요. 주말에는 쉬고, 내 시간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죠. 10개월간 일했어요. 어차피 간호대학 졸업하면 병원에서 일할 거니까, 도움 되는 일자리였어요.”
2011년, 2학년으로 복학해야 하는 선진씨는 어머니한테 “등록금 내야 해요. 제가 알바해서 드린 돈 있지요?”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했다. 형편이 어려워서 생활비로 썼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 청년은 불평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이해하니까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주중에는 간호대학에 다니고, 주말에는 알바를 하면서 생활했다.
간호대 학생들은 2학년 때부터 병원 실습을 나간다. 혈압 재고, 병실 침상정리 하면서 병원 돌아가는 시스템을 익힌다. 1주일에 한 번씩은 담당 교수와 실습에 대한 공부를 하는 ‘컴퍼런스’를 한다. 환자 한 명을 따로 정해서는 의학서적에서 병의 원인을 찾아보고 배우는 ‘케인스’도 한다. 3학년 때도 학교 공부와 실습은 맞물려 돌아간다.
“간호사 면허가 나오는 국가고시를 앞두고는 아예 학교 기숙사에서 합숙도 해요. 합격률이 99%예요. 시험이 절대 쉬운 게 아니거든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학문이라 진짜 어려워요. 대다수의 학생들이 합격한다는 건 그만큼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뜻이에요. 학교 다니면서도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두는 비율이 10% 정도는 되고요.”
2014년 3월, 선진씨는 군산의료원 응급실 간호사가 되었다. 활동적인 그는 응급실 일이 잘 맞았다. 학생 때도 응급실 실습을 선호했다. 아파도 참고 참다가 견딜 수 없어서 오는 응급실. 치료 받고 나가는 환자들이 “고맙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해도 힘이 났다. 병원에서 가장 바쁘고 힘든 응급실에서 일 잘한다는 인정도 받고 싶었다.
응급실에는 술 취한 환자도 온다. 간호사 얼굴과 가슴을 서슴없이 폭행하는 환자도 있었다. 그래도 선진씨는 응급실에서 일하는 게 좋다. 다양한 증상을 가진 환자들이 오고, 그에 대한 대처를 알아갈 수 있다. ‘이 환자는 어디가 아프니까 이런 혈액 검사를 하면 되겠구나’라고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 일한다. 성취감을 느낀다.
“응급실은 야전병원이라고 생각해요. 응급실 간호사들은 손이 빨라야 해요. 정확해야 하고요. 긴장을 풀면 안 되죠. 어떤 환자가 구급차를 타고 올지 모르니까요. 응급환자한테 쓰는 약물도, 주사 놓는 간호사가 실수하면 독이 될 수가 있어요. 그만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곳이 응급실이에요. 산재사고도 많고요. 피 보는 게 일상이에요.
갑작스러운 죽음도 많아요. 처음에 환자가 죽는 거를 봤을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의료진이 무슨 수를 써도 못 살리는 사람이 있죠. 그 사람도 누군가의 소중한 어머니거나 아버지거나 아들이잖아요. 유가족들이 울면 감정이입이 돼요. 계속 마음에 두고 있으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날 때는 운동을 하거나 다른 뭔가를 하면서 이겨내요.”
사람의 생명과 맞닿아 있는 일,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종합병원의 간호사 세계에는 '활활 태워서 괴롭힌다'는 '태움'이 있다. 퇴근하려고 옷 갈아입는데 신발이 날아온 적도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나는 3년 차 간호사인 선진씨에게 ‘태움’을 겪은 적 있냐고 물었다. 선진씨는 “응급실은 꼬투리 잡아서 태우지 않아요”라고 했다.
선배들이 ‘태우지’ 않아도, 간호사 일은 힘들다. 데이, 이브닝, 나이트 근무를 돌아가면서 한다. 어느 날은 오전 6시 반에 출근해서 오후 4시쯤에 퇴근한다. 오후 2시에 출근해서 3시에 인수인계를 받고, 오후 11시에 퇴근하는 날도 있다. 오후 9시에 출근해서 다음 날 오전 6시 정도에 퇴근한다. 공장처럼 주간, 야간이 딱딱 정해진 건 아니다.
“퇴근 하려는데 응급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갑자기 환자가 몰려도 제 시간에 퇴근 못 하죠. 나이트 근무하고 아침에 자야 하는데 못 잘 때가 있어요. 신경이 예민해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