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만들기에 앞장서겠습니다!”
[인터뷰] 가정법률상담소 조미영 소장. 그는 군산 최초 플로리스트(Florist)
지난 월요일.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군산지부(소장 조미영)를 찾았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다. 온화한 모습의 故 이태영(1914~1998) 박사 사진이 객을 반긴다. 궁서체 글씨가 눈길을 끈다. ‘결혼은 성인 남녀의 사랑과 존경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며, 두 사람의 행복과 인격적 성숙을 위해 협동하는 관계로 이어져가야 한다.’는 글귀로 시작하는 <가정헌장>이다.
부부 금실과 가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가정헌장>.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한 글자, 한 글자 진지함이 묻어난다. 1986년 10월 당시 이태영(李兌榮) 박사가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창립 30주년을 맞아 제정 선포한 것으로 전해진다.
총 4개 항으로 된 <가정헌장>은 결혼의 참뜻을 규정하고, 동등한 권리, 동등한 재산권 등 주로 여권(女權) 차원에서 보편적이고 바람직한 가정상을 제시한다. 특히, 결혼은 혈통 계승이나 가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결혼 요건도 당사자 선택이 우선돼야 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이는 피폐한 1980년대 당시 결혼 풍조에 대한 경종이자 신성한 남녀관계의 정립을 의미한다.
이태영의 판사 탈락은 불우한 여성들에게 크나큰 축복
조미영(66) 소장과 인사를 나눈다. 해학이 번득이는 토속적인 말씨, 구수한 입담 등 영락없는 이웃집 아주머니다. 상대를 편하게 하는 푸근함과 여성 NGO(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독특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는 “이태영 박사는 양성평등 이념에 어긋나는 가족법 개정과 여성인권 향상에 평생을 바친 한국 여성운동의 어머니”라며 “사랑과 열정으로 세상을 바꾼,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라고 부연한다. 이어 상담소에서 하는 일을 소개한다.
“우리 상담소(한국가정법률상담소 군산지부)는 인간의 존엄성과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가난한 자, 억울한 자, 불행한 자 등 번민하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인권 옹호에 필요한 모든 법률적 구조사업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힘없는 이웃들의 인권 회복과 가정의 평화를 목표로 가정폭력 상담도 병행하고 있지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법조인이자 인권운동가인 이태영 박사가 1956년 여름에 창설했죠. 오는 8월 25일 회갑연(창립 60주년)을 맞이합니다. 군산 지부는 1988년 7월 전국 31개 지부 중 11번째로 개소했어요. 업무를 개시한 지 30년 가까이 지났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음에도 많은 분이 위치는 물론 이용 방법조차 모르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이태영 박사는 1948년 주부의 몸으로 서울대 법대에 최초 여학생으로 입학한다. 1952년에는 한국 최초로 고등고시 사법과 여성 합격자가 된다. 판검사 실무 교육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으니 마땅히 검사나 판사로 임용됐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정일형) 마누라를 판사로 임용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자서전 <동행>(2008년 펴냄)에서 “당시(1950년대 초) 여성들은 법으로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외자이자 약자였다”라며 “이태영 변호사가 이끈 가정법률상담소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암흑을 가르는 등대의 불빛 같은 존재였다. 역설적으로 이태영이 판사로 임용되지 않은 것은 이들 기댈 곳 없는 불우한 여성들에게는 크나큰 축복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여고시절 꿈은 ‘섬마을 선생’
조미영(趙美英) 소장은 전북 군산 출신이다. 초중고 대학도 군산에서 다녔다. 남편(이영수 신생농원 대표)도 군산 남자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적잖은 학부모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타 도시로 이주하던 80~90년대, 그는 고집스럽게 고향을 지켰다. 이렇듯 그의 애향심은 남다르다. A4용지 네 장을 빼곡히 채운 NGO 이력과 지역 사투리를 고집스럽게 구사하면서 “나는 군산의 올~맨!”이라고 내세우는 것에서도 자부심과 애향심이 느껴진다.
그의 여고시절 꿈은 육지 문명과 동떨어진 외로운 낙도(落島) 분교 교사. 그는 “인간에게 맑은 공기와 쉼터를 제공하는 한 그루의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나무가 못되면 줄기라도, 줄기가 못되면 나뭇가지, 나뭇가지가 못되면 나뭇잎, 나뭇잎도 못되면 푸른 잔디가 되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즐겁고 편하게 하는 그러한 삶을 살고 싶었다는 것. 그 마음은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단다.
여고생 조미영은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군산 교육대학에 진학한다. 섬마을 선생이 되어 까까머리 섬개구리들과 수업하는 모습을 늘 가슴에 담고 지내던 그가 대학졸업 후 첫 발령을 받은 곳은 전북 정읍의 신태인초등학교. 그때만 해도 신태인은 산간벽지였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을 잊지 못하던 애송이 교사 조미영. 그는 1974년 집안 어른의 소개로 천생배필이 될 이영수 신생농원 대표를 만난다.
“남편은 군 제대를 앞두고 있었죠. 몇 개월 후 혼례를 올리고 남편은 시아버지가 군산 외곽지역의 산과 밭을 개척해서 마련한 농원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평생 흙냄새를 맡으며 나무와 함께 살아온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죠.(웃음) 사람들은 사회활동이 활발한 제가 가정경제도 쥐락펴락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입금 모두를 꼼꼼한 남편에게 맡기고 용돈은 필요할 때마다 타서 쓰고 있어요.
꽃꽂이는 시어머니 권유로 배우게 됐습니다. 결혼 후에도 교직을 고집했지만, 시어머니의 완고함에 섬마을 교사 꿈을 접어야 했죠. 신생그릴(양식을 취급하는 레스토랑)과 꽃가게(신생화원)를 운영하던 시어머니가 모두 물려주겠다고 하시는데 사양했죠. 시부모들이 해방 후 군산에서 처음 창업한 그릴이라서 호기심이 동했으나 대학 때부터 관심 있던 꽃꽂이(꽃가게)를 택했습니다.
처음 꽃꽂이를 배우러 다닌 해가 1975년, 그때만 해도 꽃꽂이는 귀족적 취미로 인정받던 시대였죠. 하지만 사명의식 때문이었는지 저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어요. 만삭의 몸으로 서울(윤선꽃꽂이회)로 배우러 다녔고, 산후 몸조리할 틈도 없이 바빴거든요. 그렇게 바쁜 중에도 조선호텔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하루점드락(온종일) 쪼그리고 앉아 신부 부케를 43개나 만든 날도 있었죠.
둘째 낳고는 아예 젖 짜는 기계를 가지고 다녔어요. 젖가슴이 탱탱 부풀어 오르면 유명 백화점이나 은행 화장실에 살짝 숨어들어가 젖을 짜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의도 받고, 실습도 했으니까요. 꽃꽂이에 미쳐있었던 거죠.(웃음) 시어머니를 30년 넘게 모시면서 배운 것도 많아요. 1960년대에 농원을 개발하고 며느리에게 꽃꽂이를 권하는 등 지금 생각하면 시부모들의 선지자적인 통찰력과 도전정신이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군산 최초 ‘플로리스트’에서 NGO로
신발이 닳도록 군산-서울을 오간 애기엄마 조미영은 1980년 (사)꽃꽂이작가협회 1급 사범 자격증을 따낸다. 군산 최초로 자격증을 갖춘 전문 플로리스트(화훼장식가)가 된 것. 땀과 열정으로 이뤄낸 값진 쾌거였다. 그는 꽃꽂이 예술작가협회 및 개인전(12회)을 통해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선다. 특히 첫 개인전으로 섬개구리 도서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를 열어 수입금을 전하는 것으로 여고시절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달랜다.
그 후 KBS 군산방송국 여성취미코너(3년), 군산 여성회관(15년), 군산공단 입주 기업들, 군산대, 서해대, 군산간호대 등으로 강의를 나갔다. 그에게 꽃꽂이 강의를 수강한 사람은 군산비행장 미군들에게 버림받은 양공주를 비롯해 직장인, 공무원, 가정주부까지 다양하다. 그중에는 꽃꽂이 강사 자격증을 취득해 미국과 국내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제자도 있다. 아예 직업을 바꾼 회사원, 인생행로가 바뀐 주부도 있단다.
그의 NGO 활동은 2006년 4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더욱 두드러진다. 이곳저곳에서 회장 및 위원장 수락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 그는 군산여고 총동문회장을 맡아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 기반을 다지고 후배에게 물려준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여성단체연합회, 한국부인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단체로 가정법률상담소를 꼽는다.
“군산지부 출범 때(1988) 평생회원으로 가입하고, 벽돌 한 장 쌓는 심정으로 초대 소장(백은기)을 도왔어요. 그 후 10년 동안 이사(理事)를 지냈습니다. 그래도 유달리 애착이 가는 이유는 내 인생의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소장에 취임했기 때문일 겁니다. 작년 4월 8일 취임하는 날부터 주요 일정과 느낌 등을 노트에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됐어요. 그거 하나로도 얼마나 변했는지 스스로 놀랍니다. 다른 단체 회원들이 들으면 서운하다고 할지 모르겠네···. (웃음)”
이태영, 이희호는 한국 여성계의 큰 별
조 소장은 꽃을 통해 역대 대통령들과도 인연을 맺는다. 박정희 대통령 급서(1979) 때 군산시청 분향소 조화와 영정바구니가 그의 손을 거쳤다. 그 후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역대 대통령 군산 방문 때도 어김없이 그가 만든 수반과 꽃다발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