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출연 ‘인증 현수막’을 걸지 않는 그 여자의 포부!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43] ‘제비공방’ 이영선
“우리 학교 다닐 때, 영선이는 자기가 입은 옷이 최고라면서 미친×처럼 당당했잖아. 어쩌다 그때 사진을 보잖아. 그럼 영선이만 현대인이야. (웃음) 우리는 완전 할머니야.”
학교 친구들이랑 모이면 나오는 말이다. 어린 영선은 사람들한테 “보는 눈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친구들이랑 문구류나 옷을 사러 가면, 가게 주인은 영선을 가리키며 “학생이 가장 좋은 걸 골랐네”라고 했다. 그러나 영선의 안목이 절대 안 통하는 장르가 있었다. 책만 펴면 잠이 쏟아졌다. 교과서를 앞에 두면, 증세가 더 심해졌다.
영선은 딸 일곱 명에 아들 하나인 집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카센터와 유통업을 하는 부모님은 아이들이 하고 싶다는 건 다 시켜줬다. 손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영선은 미술학원에 다녔다. 데생을 위한 기초 작업 선긋기. 틀로 찍어내듯 따라하는 것에는 싫증을 냈다. 피아노도 배우고, 가야금도 배워봤다. 얼마 못 가서 다 그만두었다.
김제 덕암정보고등학교에 들어간 영선은 즐겁게만 지냈다. 예쁜 옷을 입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놀았다. 언니들처럼 공부를 잘 해서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취업에 대한 절실함이 없어서 자격증도 따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학원 다닌다고 둘러댔다. 서울에 살고 있는 언니한테 가서 재미있게 지냈다.
“스무 살 여름에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아빠는 엄한 면도 있지만 기둥처럼 든든해서 너무 좋았거든요. 딸이 많으니까 유머도 많으셨고요. 아빠 돌아가시고는 친구들도 잘 안 만났어요. 언니네 집하고 전주 고모네 집을 다니면서 방황하다가 오빠(최낙경씨, 남편)를 만났어요. 엄마는 돌아가신 아빠가 떠올라서 좋다며 결혼을 허락했어요.”
영선씨는 스물네 살에 장민의 엄마가 되었다. 스물여섯 살에는 장민과 유준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어려서 아직 모를 거야”라는 태도를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이 못 알아들을 때도, 모든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아이들이 삐치고 떼를 써도 다그치지 않았다. “엄마는 진짜 궁금해. 나중에라도 왜 그런지 말해 줘”라고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고, 대규모 농사를 짓는 남편이 들에 나간 아침. 집안은 고요했다. 영선씨는 가끔 부모님한테 묻고 싶었다. 그렇게 사랑을 주고 키웠으면서도, 왜 구체적인 꿈을 갖게 이끌어주지 않았는지를. “싫다고요”라고 몸부림을 치던 그녀의 친구는, 엄마가 때려서라도 바이올린을 시켰는데.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는데.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3년 전이에요. 전주 갔다 오면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었거든요. 에미넴의 노래를 틀어주면서, ‘여러분 앞에 기회가 온다면 어떡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운전하면서도 ‘잡아야지’라고 생각했죠. 근데 배철수씨가 아니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고 만대요.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요. 저는 뭐에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영선씨는 불타올랐다. ‘당장 뭐라도 하자’는 자세로 자신을 돌아봤다. 큰애를 낳기 전에 제과제빵 학원을 다닌 적 있다. 프랜차이즈 빵집에 밀리지 않는 동네 빵집을 꾸려갈 자신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꽃 케이크(버터 플라워)를 보고는 ‘해볼까?’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게 먼저였다. 한쪽으로 치워놓았던 욕망은 몇 년 만에 그녀를 흔들었다.
2013년 3월, 그녀는 떡 케이크와 그 위에 앙금으로 꽃을 만들어 장식하는 것을 배우러 갔다. 익산, 김제와 가까운 곳이었다. 4주 동안 앙금에 색을 입혀서 짤 주머니에 넣고 갖가지 꽃을 만드는 걸 익혔다. 영선씨는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만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저런 꽃들을 마음껏 변형하면서 새로운 꽃을 창조했다.
“멥쌀을 물에 8시간 담가서 빻고, 물을 주고, 설탕을 넣어 채에 쳐서 20분간 찌거든요. 그걸 틀에 담아서 앙금 꽃을 올려요. 꽃은 자신 있었어요. 백설기 위에 꽃을 배열하잖아요. 스케치를 해서 구도를 잡고 한 게 아니에요. 저절로 됐어요. 되게 어울리게 잘 하니까 스스로도 놀랐죠. 만날 잠도 자지 않고 만들었어요. 친구들이랑 언니들한테 선물로도 주고요.”
약 2시간. ‘앙금 플라워 케이크’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영선씨는 너무 재미있어서 잠자는 것도 아까웠다. 만든 작품을 사진 찍어서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다. 파동이 일었다. 모르는 사람들도 “이렇게 예쁜 떡 케이크는 처음 봐요”라면서 연락을 해왔다. 홈쇼핑 채널에서 대박상품의 마감이 임박한 것처럼 주문이 몰려들었다.
처음에 앙금 케이크를 만들 때는 흐뭇했다.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 완전한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돈을 받고서, 잠 못 자며 만들 때는 육체의 고통이 다가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울면서 떡을 찌고 짤 주머니를 짜서 앙금 꽃을 만든 날도 있다. 하루에 12개를 만든 날, 영선씨는 “돈이 다가 아니야. 즐기면서 하자”고 결심했다.
한동안 영선씨는 돈 받고 파는 앙금 케이크는 만들지 않았다. 처음 배울 때처럼, 만들면 작품 사진을 찍고 지인들이랑 나눠먹었다. 몸을 추스르고 나서는 하루에 한두 개만 예약 받았다. 그녀는 떡을 만들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서울 방산시장에 가서 인테리어 자재를 직접 사 와서는 동생이랑 친구들이랑 공사를 했다. 아버지의 카센터 자리에다가.
“2014년 7월에 ‘제비공방’을 열었어요. 대량 주문은 안 받아도 몇 개씩은 팔잖아요. 식파라치에 걸리면 벌금이 진짜 세요. 그래서 아예 전기배관을 해서 즉석판매제공업으로 영업신고를 했어요. 사실 공방은 제 작업실 겸 강의실로 쓰고 싶었거든요. 간판을 안 건 이유가 그거예요.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배우러 오세요. 말레이시아나 뉴욕에서도 오시고요.
판매 철칙은 두 가지예요. 첫째, 배달은 안 해요. 둘째, 당일 먹을 사람한테만 팔아요. 일요일에 쓸 건데 토요일에 가지러 온다는 사람들은 거절해요. 대신에 필요하다고 하면, 새벽 3시에도 일어나서 떡을 해요. 그날 드셔야 가장 맛있거든요. 저도 능수능란해져서 만드는 속도도 빨라졌고요. 앙금 케이크는 지름 21cm, 높이는 7cm 짜리가 가장 잘 나가요.”
그게 어떤 것이든, 영선씨는 앙금 플라워 케이크는 자신 있었다. 정점에 선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더 높은 봉우리를 보았다. 앙금 꽃은 이목을 끌기 위한 수단일 뿐, 본디 바탕은 맛있는 떡이다. 영선씨는 떡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승으로 불리는 서명환 선생님을 찾아갔다. ‘연희 떡사랑’ 운영과 강의를 겸하는 서명환 선생님은 영선씨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것, 전부 다 가르쳐줄 거야.”
“선생님,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요. 친한 사람들은 저한테 ‘중요한 거 하나는 빼 놓고 가르쳐라. 네 거 하나는 남겨놔야지’라고 하거든요.”
“영선아, 그럼 수업은 안 하고 장사해야지. 다 가르쳐 줘. 너는 새로운 걸 만들면 되잖아.”
서명환 선생님은 영선씨에게 레시피만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떡을 개발할 수 있도록 자극과 영감을 주었다. 배운 대로만 하지 않고, 새롭게 자기 길을 내게 했다. 영선씨도 그랬다. 김제 ‘제비공방’에서 사람들에게 앙금 플라워 강의를 할 때, 무조건 자기처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자신만의 것을 담은 작품을 만드세요”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봄. 서명환 선생님과 영선씨, 동생 영경씨와 동료들은 ‘대한민국 국제요리경연대회’ 병과 부문에 출전했다. 대회 15일 전부터는 초집중해서 준비했다. 그렇게 연구해서 만든 작품을 경연장에서 선보였다. 조리과 학생들이 “대박! 매작과(한과 종류, 매화나무에 참새가 앉은 모습과 비슷해서 붙은 이름) 기계로 찍었어? 장난 아니다”라고 했다.
“저는 매작과랑 고임을 맡아 했어요. 선생님이 저보고 ‘전생에 소주방(궁궐의 부엌)에 있었느냐’고 할 정도로 잘 해요. 그날 저희 팀은 대상을 받았어요. 그래도 서명환 선생님의 주도 하에 한 거니까, 완전히 제 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선씨에게 “왜 김&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