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은파호수공원,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국내 최초 수리조합 탄생시킨 미제지, 개발 시기 입증해줄 문서 발견
군산(群山)은 지명에 나타나듯 나지막한 산들이 곳곳에 무리를 이루고 있는 항구도시다. 산과 바다, 하천과 들녘이 어우러지면서 보여주는 자연의 풍치도 뛰어나다. ‘뜰’로 불리는 충적평야와 해발 100m 안팎의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아담하고 고즈넉한 마을과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해주는 저수지도 만난다.
군산지역 평야는 20세기 이전부터 농사를 짓던 묵은 논(숙답)과 일제강점기 대규모 간척사업과 배수 개선 사업으로 만들어진 새 논(신개척답)으로 나뉜다. 그중 서수들, 임피들, 둔덕들, 개정들, 선제들은 묵은 숙답 평야이고 나포면의 십자들, 대야들, 수산 이곡들, 미성들, 옥구 간척지(어은리, 옥봉리, 선연리) 등은 신개척답 평야이다.
군산은 금강, 만경강 하구에 위치해서 지류(하천) 또한 많다. 대표적인 하천으로 탑천, 미제천, 어은천, 둔덕천, 경포천 등을 꼽는다. 그중 탑천, 미제천, 어은천은 만경강 수계에, 둔덕천과 경포천은 금강 수계에 속한다. 째보선창(죽성포구)으로 유입되는 샛강(일명 세느강)은 아예 이름이 없었고, 구암천은 도시개발로 물줄기가 중간에 끊겼다. 개항(1899) 이후 일제에 의해 복개되어 도심권의 중심 도로가 된 하천도 있다. 지금의 대학로이다.
하천의 발원지 및 집수역(集水域)을 살펴보면 탑천은 함라산과 취성산지, 미제천은 지곡동의 미제지(지금의 은파호수공원), 어은천은 옥구저수지(마산방죽), 둔덕천은 오성산과 고봉산 기슭, 경포천은 옥산의 금성산 기슭으로 전해진다. 그중 둔덕천은 군산에서 유일한 자연 하천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 하천은 20세기 들어 개발과 간척사업 등으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 수리조합 설립 근거가 됐던 미제지
미제지(米堤池)란 지명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제작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이 문헌의 옥구현 산천조는 ‘米堤池는 옥구현 북서쪽 10리에 있으며 둘레가 1만 910尺(약 3,3km)에 달한다.’라고 간략하게 기록해 놓았다. 광복 후에는 선제들 관개용 저수지로 사용됐고, 50~60년대에 제방을 높이는 확장공사로 둘레가 6.9km로 늘어난다.
미제지 축성 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시기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 축조됐을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팔도지지>, <전국지지> 등을 근거로 백제 시대까지 소급하는 향토사학자도 있다.
미제지 용수는 우리나라 최초 수리조합 설립의 근거가 됐다. 미제(米堤)와 선제(船堤)를 관개에 이용하기 위해 1908년 12월 8일 탁지부(지금의 재경부에 해당)로부터 허가받아 설립된 ‘옥구서부수리조합’이다. 이 수리조합은 조선인이 주도했고, 조합원 다수가 조선인이었으며, 몽리(蒙利) 구역의 70%가 조선인 소유였다는 점에서 다른 수리조합들과 사뭇 구별된다.
미제지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설화(세 바위 전설, 애기장수 서울터 만들기, 금도구통 금도구때 등)가 전해진다. 이름도 미제저수지, 미제방죽, 쌀뭍방죽, 절메방죽, 아흔아홉귀 방죽, 미룡저수지, 은파 뽀드장, 은파유원지, 은파관광지 등 다양하게 불렸다. 이곳은 1969년 이후 관광유원지로 개발되고,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다. 이어 전국 100대 관광명소로 선정되면서 ‘은파호수공원’이란 새 이름을 얻는다.
개발 시기 확인해줄 문서와 사진 발견
“전라북도 군산시 은파호수공원에 ‘은파’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미제저수지에 유원지 영업을 구상한 사업가 류 모 씨가 영업 허가 원서에 자신의 아버지의 호인 ‘은파’를 붙여 1975년 허가 받았기 때문이다. 은파호수공원은 군산시의 허가에 따라 1976년 유원지로 결정되었고, 1985년 8월 26일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출처: 디지털군산문화대전)에 실린 군산 은파호수공원 건립 경위이다. 이러한 내용은 사업을 처음 구상한 사람의 신분과 개발 시기 등 근거가 확실치 않음에도 정설로 굳어져 왔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1993년 군산문화원이 발행한 <군산풍물지>를 비롯해 다양한 책자와 논문, 해설 등에 인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아버지 호를 붙였다는 대목은 국민 관광지 위상에도 걸맞지 않다. 은파(銀波)는 예로부터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이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운 금강(錦江)을 의미했다. 금강은 군산 시민의 혼이 담긴 강으로 낯에는 은비늘처럼 눈부시게 반짝여 은파라 하였고, 동틀 무렵과 해질 무렵엔 황금빛으로 변해 금파(金波)라 표현하였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금강의 뛰어난 경관을 표현한 노래(1960년대 취입) 가사에도 금파와 은파가 등장한다.
기자는 미제지를 관광단지로 처음 개발한 사람과 그 시기를 입증해줄 문서와 신문 기사, 사진 등을 입수했다. 제공자는 이순석(84) 할머니. 그는 1971년 설립된 주식회사 군산유원지 신지철(1927~1994) 대표 아내이다. 이 할머니가 건네준 서류봉투에는 임대계약서, 회사 연혁, 개발 계획서, 옥구군수와 군산경찰서장 의견서, 신문광고 등이 들어 있어 신뢰감을 더욱 높여준다.
이 할머니 전언에 따르면 1969년 12월 당시 신지철 동인제약(주) 전무와 백락환 군산경찰서 보안과장은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옥구군 미면 미룡저수지(미제지)를 관광단지로 개발할 것을 착안, 계획을 세운다. 당시 군산에는 외국인 상대 휴양 시설이 전무했고, 오락시설은 미군 전용 바(서양식 술집)가 영화동에 몇 곳 있었으며, 옥구군에 아메리카타운이 있을 뿐이었다
“미제지 개발 사업은 백락환 과장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남편(신지철)이 자본금 일체를 대면서 추진했어요. 두 분은 틈만 나면 전국의 보트장을 찾아다니며 사업을 구상했죠. 그때 저는 교직을 그만두고 군산 영동에서 금방을 운영하고 있었죠.
그때 작성한 서류를 보면 사정(정자가 설치된 활터)과 어린이 놀이터 조성이 계획에 들어있고,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지금의 물빛다리(길이 370m 현수교)에 케이블카 설치도 계획하고 있어요. 선착장 건너편 산들은 원예단지와 휴양단지 예정지고요. 저수지 순환도로 개설 계획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매입한 땅(3600평)에는 멋진 육상방갈로와 관광호텔 등을 계획하고 있었죠.
미제지는 한가로운 시골 낚시터였죠. 길도 소형차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고, 수돗물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깜깜한 시골에 전화와 전기를 끌어들이고, 도로를 확장했지요. 도로변에는 7년생 왕벚나무를 200주 심었습니다. 저수지가 전북농지개량조합 관할이어서 허가를 받아야 했죠. 주변 산소(묘지)와 산주인 스물여덟 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용 승낙을 얻어냈어요. 돈도 돈이지만 마음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미제지 인근의 신생농원 이영수(70) 대표는 “농원은 아버지가 1960년대에 조성하셨고, 나는 1973년에 들어가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때는 밥도 우물물로 해먹었고, 전기는 이듬해(1974)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라며 “한때는 미제지를 군산동고 조정부 훈련장으로 사용했고, 학생들 부탁으로 농원 안집에 딸린 방이 조정선수들 숙소가 되기도 했다.”라고 덧붙인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70년 10월 2일 전북농지개량조합 문종열 대표와 주식회사 군산유원지 신지철 대표 사이에 임대계약서가 체결된다. 임대물은 유선장(유람선, 보트, 요트 등을 타는 곳)을 비롯해 저수지 및 부대용지 등. 이때를 전후해서 서비스 매점(30평), 반도매점(20평), 육상방갈로 4동(8평), 진주매점(8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