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니의 발길 닿는 대로>
우리 마을 이름,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마을(洞, 里)의 생성 배경과 전설, 생활상 등이 오롯이 느껴지는 군산의 지명 유래와 변천 과정을 알아본다.
자녀들의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소망하던 우리네 부모들은 예로부터 이름과 인간의 운명은 관계가 깊은 것으로 믿어왔다. 그래서 이름을 허투루 짓지 않았다. ‘개똥이’이란 성함도 이름을 천하게 지어야 오래오래 무병장수한다고 해서 탄생했다 한다.
선조들은 마을의 번창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명(地名)에도 적잖게 신경을 써왔다. 따라서 군산 지역의 마을 이름은 자연환경, 즉 산천초목(山川草木) 암석(巖石) 고개 등에서 비롯된 것과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만든 것(시장, 주막 등), 신앙생활 관련(유·불·도·선), 유적과 위치 물형(物形)에 따라 정한 것(풍수지리설), 마을 사람들 직업과 촌락 발생의 신구(新舊)에 따라 정한 것, 전설이나 설화에 나오는 것 등 다양하다.
전통은 오랜 생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역사가 있는 곳이면 반드시 문화가 있고, 문화가 있는 곳에 전통이 있게 마련이다. 현재 호칭 되는 마을의 유래를 분석해보면 이름의 뜻은 물론 지역의 문화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적(遺跡)과 관련된 마을
이름에 둔(屯), 역(驛), 원(院), 관원(官院), 서원(書院), 진(鎭), 성(城), 창(倉) 또는 사창(司倉) 등이 들어가면 선조들의 발자취, 즉 남아 있는 건축물이나 싸움터,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 등 유적(遺跡)과 관련이 깊다.
조선 시대에는 군대가 주둔하는 군사기지를 '둔영'(屯營)이라 하였다. 이처럼 군산에서 '모을 屯'과 관련된 마을은 나포면 둔터(둔기)와 군둔리, 성산면 둔덕리, 옥구읍 둔산리 등이다,
역마를 갈아타는 곳으로 일컫는 ‘역’(驛) 관련 마을은 나포면 '구역리', 옥구읍 '순연리(순역동)', '내역' 등이다. 관원을 위한 '국영 여관'을 일컫는 '원' 관련 마을로는 회현면 '원우리'와 임피면 '이원리', 서수면 '관원리' 등이 꼽힌다. 서원과 관련된 마을도 있었다. 임피면의 '서원리', 회현면 '학당리' 등이 그것이다.
조선 시대 지방방위 조직체인 '진'(鎭)에서 유래한 마을로는 미성읍 선유도의 '진멀'과 오식도 '진터멀' 나포면 '진장' 등이다. 옥구읍의 '동문안', '서문안', '동문밖'과 옥구읍 옥봉리의 '성남동', '내성산', '외성산', '신성산', 옥산면의 '구성', '금성', 임피면 '성내' 등 '성'(城) 관련 마을이 10개나 되어 군산이 오래전부터 군사요충지로 산성(山城)이 많았던 지역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외에도 곰, 송아지, 강아지, 쥐, 말(馬) 등 동물에서 유래한 마을과 촌(村), 전답(田畓), 용(龍), 산(山), 다리(橋), 나무(木), 마을의 형태, 조류(鳥類), 전설 등과 관련된 마을도 많아 흥미를 끈다. 구암천, 둔덕천, 경포천, 탑천, 미제천 등 금강 지류가 많아서 그런지 칠다리(옥산면), 석교리(옥산면), 복교리(대야면), 광교리(대야면) 등 다리(橋) 관련 마을도 많다.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일본식 지명(地名)
지금의 원도심권은 본래 옥구현 북면(北面)에 속했으나 갑오개혁(1894~1896) 때 부, 목, 군, 현을 모두 군으로 고치면서 옥구현도 옥구군이 된다. 옥구군은 1906년 옥구부가 된다. 경술국치(1910) 이후 다시 옥구군으로, 군산은 군산부(府)로 개칭된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시(市)로 승격되고, 1995년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 오늘에 이른다.
1915년 발행된 <群山案內>(군산안내)는 갈대밭을 매워 평지(시가지)로 만들고 서부, 동부, 중부로 나누었으며 옥구지역 일부를 군산부로 편입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시가지 이름은 정(町)과 동(洞)으로 구분한다. 그중 마치(町)는 일본식, 동은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름으로 리(里)와 같은 뜻이다.
일제는 강화도조약(1876) 이후 조선 땅을 조사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토지조사에 착수하였다. 경술국치(1910) 후에는 우리의 혼과 정신이 깃든 지명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새로 만든다. 조선의 수도 한성(漢城)을 일본 동경(東京)의 다음 도시처럼 느껴지는 경성(京城)으로 고친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의 전통문화와 민족혼 말살정책은 일제가 탐내던 도시답게 군산에서 절정에 달한다. 금광동, 중동, 천대전정, 횡전정, 강호정 등 일본식 동명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 명치정, 소화통은 일본의 연호를 기념하는 이름이고, 옥구저수지 인근의 팔목촌, 중야, 전중, 열대자 등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지명으로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나포면 ‘등동마을’과 ‘만호뜰’ 유래
나포면의 ‘등동마을’ 내력도 재미있다. 등동(燈洞), 등골(꼴) 등으로 불리는 등동마을은 등잔 모양의 지형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밤늦게까지 주경야독하는 '서당골'을 뜻하며 '등골' 한자어 표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내려온다.
등동마을로 들어가는 주변에는 들녘(만호뜰)이 펼쳐진다. '만호(萬戶)'뜰 유래는 해마다 가을에 1만 가호 양식을 수확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노인들 전언에 따르면 ‘만조’ 때는 망해산 아래까지 금강물이 들어왔는데, 군산 개항(1899) 이후 일제가 둑을 쌓으면서 십자들녘(십자뜰)과 함께 논이 됐다는 것. 결국 십자뜰과 만호뜰은 ‘신개척답’이 되겠다.
어느 지방이고 그 지역만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이 전해진다. 선조들이 태어나 자란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음은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