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없는 ‘파워 블로거’, 옷 가게만 해도 두 번 망했지만...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41 차근차근 세 번째 가게를 준비할 거라는 윤형호
“몇 년 전 일인데요. 일찍 결혼한 친구가 ‘카스’에다가 남이섬에 놀러간 사진을 올렸어요. 저는 남이섬이 해외인 줄 알았어요. 진짜 몰랐어요. 제가 열여덟 살 가을(또래보다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음)부터 일만 하고 살았거든요. 어디로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요.”
배우 현빈 같은 목소리를 가진 형호씨가 말했다. 중3 때, 그는 담임선생님한테 빗자루로 맞았다. 공고 진학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주공고 성적장학생이 되었다. 고3 가을에는 친구들과 단체로 취업 나갔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 공장, 그는 핸드폰의 기판 만드는 일을 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고는 열 명이서 방을 쓰는 기숙사로 퇴근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걸 찾자.’
그는 공장에 다니는 석 달간 생각했다. 그동안은 남들이 하는 대로만 살아왔다. 이제는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나고 자란 전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동네에서 오토바이 가게를 했다. 잘 되지는 않았다. 도로가 나면서 가게까지 비워줘야 할 처지, 형호씨는 우선 돈을 벌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기로 했다.
갓 열아홉 살 된 소년이 처음 구한 일은 레스토랑 서빙. 해보고 싶었다. 그런 식당에서 음식을 먹어본 적 없으니까 호기심이 있었다. 오전에는 음식점마다 들러서 식재료를 납품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녔다. 오후에는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밤에는 동네 호프집에서 알바를 했다. 그렇게 잠 못 자고 일하니까 몸부터 축났다.
“6개월간 번 돈을 부모님한테 드렸어요. 멋 부리고 싶어서 저한테도 썼고요. 그러고 나서 보세 옷 파는 가게에 취직했어요. 하루 12시간씩 일했거든요. 저는 손님들한테 진심으로 물건을 권하는데 사장님은 많이 팔기만을 바랐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평일에 쉬는 날을 줬어요. 근데 저는 잘 안 쉬었어요. 쉬면 돈 쓰니까요.”
형호씨는 군대 가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차피 갈 거, 빨리 해치우자’는 마음으로 입영신청서를 냈다. 스무 살, 그는 경기 고양에 있는 56사단으로 갔다. 자신보다 한두 살 많은 고향 후임이 올 때는, ‘형’이라고 불러야 하나 갈등한 적도 있다. 그것 말고는 자대생활 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나가면 뭐 할까?’는 자연스런 고민이었다.
그는 제대하고서 아는 사람이 개업한 옷 가게에 스카우트 되어 갔다. 사장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 형호씨는 주인보다 더 뜨겁게 일했다. 안 해도 될 일을 찾아냈다. 새 옷이 들어오면, 손님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권하는 문자를 보냈다. 단골손님이 많이 늘었다. 따로 수당을 받는 게 아닌데도 스스로 했다. 재미있어서 그랬다.
“너도 알아야 돼.”
가게 사장은 형호씨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게 문을 일찍 닫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동대문 시장으로 갔다. 수많은 옷가게들, 두 사람은 돌아다녔다. 청년부터 중년 남성들까지 입을 수 있는 옷을 샀다. 구입한 옷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면서 고생하다가, 물건을 한데 모아서 가져다주는 ‘대행 삼촌’들의 존재도 알았다.
옷 살 때 기준은 촉! 패션잡지에 나온 스타일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전주에 있는 가게와 맞는 스타일과 대중성의 조화를 생각하며 샀다. 도매로 사온 옷은 브랜드 매장에서 파는 옷처럼 반품되지 않는다. 10만 원 어치 물건을 반품하려면, 그 가격 이상의 물건을 사야 한다. 제때 반품 못한 옷 가게에는 재고가 쌓이고 빚이 는다.
“서비스업에서 일하잖아요? 자기 가게를 갖는 꿈을 갖게 돼요. 저도 돈을 차곡차곡 모았어요. 1년쯤 일했을 때, 사장님이 군산에 2호점을 냈어요. 제가 매니저로 왔죠. 그때는 군산 상권이 다 나운동에 몰려있었어요. ‘야, 나와!’ 하면 만나는 곳이 거기였어요. 근데 술집 거리잖아요. 사람들이 그랬대요. 장사가 되겠느냐고요. 옷 가게는, 생뚱맞잖아요.”
붙임성이 좋은 형호씨는 낯선 도시에서 적응기간을 오래 갖지 않았다. 순식간에 아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형호씨의 옷 가게는 작은 소도시에서 유행을 주도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드러내려고 항상 재킷을 입었다. 행커치프를 꽂고, 모자를 쓰고, 눈에 띄는 바지를 입었다.
남자들은 보통 옷 살 때에 한 곳의 가게에서 몰아서 산다. 이곳저곳 둘러보지 않는다. 그래서 형호씨는 손님들의 스타일을 찾아주는 것에 주력했다. 취향이나 신체 특징을 따로 메모했다. 서울 가서 옷을 사오면, 각자 단골손님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마네킹에 입혀서 사진을 찍었다. 그걸 손님들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대학을 나온 게 아니에요. 디자인 공부를 한 적도 없고요. 어디까지나 실전 경험에서 생긴 감이에요. 이 손님이 이걸 입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저만의 느낌이 있었어요.”
그는 옷 가게 매니저 3년 차에 일하던 가게를 인수했다. 마침 가을, 성수기였다. 겨울과 봄 장사도 순조로웠다. 그런데 영원한 것은 없다. 거짓말처럼 상권이 다른 동네로 쓸려가 버렸다. 그 많던 단골손님들도 뜸해졌다. 이십대 청년인 그는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 내리라고 낙관하며 몇 개월을 버텼다.
100만 원이 넘는 월세, 세금, 방값, 생활비, 부모님 용돈. 고정 지출은 그대로였다. 버틸수록 상황은 악화, 라면만 먹고 살 정도였다. 결국, 형호씨는 빚을 안고서 가게를 정리했다. 전주로 가서는 지인들의 일을 도왔다. 그때, 동갑내기 여자 친구인 은선씨를 만났다. 사회복지사로 5년간 일했던 그녀는, 새로 미용 일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아는 사람이랑 동업 준비 하다가 잘 안 돼서 이 친구(은선씨)랑 둘이 군산으로 돌아왔어요. 어느 날은 돈이 천 원밖에 없는 거예요. 길에서 파는 핫도그를 사니까 제로예요. 둘이 그걸 나눠먹으면서 걸어왔거든요. 근데 되게 많이 웃었어요. 2년 전이니까, 스물아홉 살이었어요. 추운 날이었거든요. (웃음)보일러를 못 돌리니까 집도 추웠어요.”
은선씨는 미용실, 형호씨는 패스트 패션 매장에서 일했다. 그곳에서는 손님들한테 칭찬 스티커를 많이 받을수록 진급이 빠르고 월급이 오른다. 원래 형호씨는 손님들한테 온힘을 다하는 타입. 손님이 탈의실에 들어가면 문을 닫아주었다. 옷을 입으면 잘 어울리는지 봐주었다. 매장에 존재하지 않던 매뉴얼. 형호씨의 행동은 직원들 사이에서 튀었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둔 형호씨는 친구를 통해서 블로그를 알았다. 파워 블로거가 되면 광고를 받을 수가 있다고 했다. 자본금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데서 어마어마한 매력을 느꼈다. 그는 ‘군산지기 써니윤’이라는 패션여행맛집 블로그를 열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는 계절에 맞는 옷을 선보이고, 직접 가본 곳들만을 소개했다.
“블로그에 군산의 모든 것을 담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도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고 있어요. 틈틈이 블로그 홍보 전단지도 돌리고요. 옛날식으로 보면, 교차로 광고인 거죠.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모바일 광고예요. 과대포장은 안 해요. 저희는 카메라도 없어요. 핸드폰으로 찍어요. 진정성 있는 글이 먼저죠. ‘군산 여행은 이 블로그 하나면 다 해결 돼’라는 평을 듣고 싶어요. 그랬더니 자영업 하시는 분들한테 광고의뢰가 들어오고 있어요.”
형호씨와 은선씨는 ‘끈을 놓지는 말자. 옷 가게는 제일 잘하는 일이니까’라는 생각을 갖고 지냈다. 그래서일까. 권리금 안 내고도 할 수 있는 옷 가게를 인수받았다. 마침 성수기, 옛 단골들이 찾아왔다. 살맛이 났다. 그렇지만 폭설이 내리고,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가게의 활력은 시들었다. 손님들은 군대 가거나 타지로 직장을 잡아서 갔다.
2016년 5월 31일, 형호씨가 연 두 번째 옷 가게는 문을 닫는다. 그는 ‘두 번 문 닫지만 진짜로 실패하는 건 아니야’라는 위안을 하며 이겨내고 있다. 형호씨처럼, 은선씨도 계속 버텨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하다.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돈도 아까워서 그 돈으로 장 봐서 음식을 해먹는 두 사람. 그가 돈 벌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결혼이니까.
“제가 옷 가게를 오래 했잖아요. 좋아해서 열심히 했으니까, 내 가게를 성공했어야 맞겠죠. 아니면 다른 일을 찾든가요.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기회라는 게 오잖아요.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서 기회 보는 눈을 기를 거예요. 포부는 여전히 커요. 군산을 대표하는 블로거가 되고 싶어요. 더 고생해서 옷 가게도 다시 열어야죠&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