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다 해방(1945)되던 해 금강 상공에서 촬영한 군산시가지 사진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상전벽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군산의 중심지로 부상한 문화, 수송, 나운동 지역이 황량한 벌판이었기 때문.
승강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1930년대 시간여행’이라는 주제로 1930년대 군산 원도심권에 실존했던 건물 11채를 복원해 놓았다. 유리병에 담긴 눈깔사탕과 선반위의 성냥, 등잔, 유기그릇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타임캡슐을 타고 추억여행을 떠나게 한다.
특히 ‘兄弟 고무신房’에 진열된 각종 고무신이 소꿉친구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처럼, 고무신이 군산의 상징이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인 이만수(1891~1964)가 일본인 공장을 인수하여 1932년에 설립한 <경성고무>의 만월(滿月)표 고무신이 그 주인공.
고무신이 생활필수품이던 1960년대 <경성고무>는 여종업원 3천여 명이 밤일을 해가며 하루 3만족을 생산해낼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동그라미 안에 ‘滿月’이 새겨진 신발은 군산은 물론 전국 각지에 대리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10대 여종업원이 대부분이었으며, 그들에게는 ‘고무공장 큰애기’라는 애칭이 따라다녔다. 작사자가 불분명한 노래 ‘고무공장 처녀’가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경성고무 월급날이 째보선창에 고깃배가 들어오는 음력 ‘조금’하고 겹치면 군산 시내가 흥청거렸다. 극장들은 프로와 관계없이 연일 만원을 이루었고, 재래시장은 물론 양키시장, 빵집, 양장점, 이발소, 미용실, 동네 구멍가게까지 명절 대목 이상으로 호황을 누렸다.
몇 번씩 깁고 때워 신다가 엿과 바꿔먹었던 고무신
모두가 가난했던 1950~1960년대, 명절을 앞두고 어머니를 따라 신발가게에 가면 운동화나 흰 고무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언감생심, 감히 사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재생고무로 만든 검정고무신도 사주면 감사했다.
낮에 흙을 밟고 다녔던 고무신을 저녁에 수세미로 닦아 마루에 가지런히 엎어놓았다가 아침에 일어나 뽀송뽀송해진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고무신 얘기를 하다 보니 코흘리개 시절 추억들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땀이 차면 미끄러지고, 뛰어가다 보면 훌떡 벗겨지는 검정고무신. 그러나 편리한 점도 많았다. 때가 묻어도 표시가 안 나고, 오물이 묻으면 수세미로 닦아내고 물로 헹구면 그만이었다. 고무신은 만능 장난감이 되어주었고, 무기로도 사용했다.
고무신은 구멍이 나거나 찢어져도 그냥 버리는 경우가 없었다. 몇 번씩 깁고 때워 신다가 회생불능이면 엿이나 강냉이와 바꿔먹었다. 가위질만 ‘엿장수 맘대로’가 아니었다. 엿도 ‘엿장수 맘대로’여서 마음 좋은 아저씨는 꿀보다 맛있는 엿을 한주먹씩 쥐어주었다.
질퍽거리는 길을 가다가 신발에 진흙과 물이 들어와 자꾸 미끄러지면 아예 벗어서 손에 쥐고 학교를 오갔다. 싸우다가 밀리면 꼬나 들고 무기로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바닷가 갯벌에서 놀다가 짱뚱어를 잡아 담아오기도 했다. 개울에서 배로 띄우고 놀다가 한 짝을 잃어버려 어머니에게 된통 혼났던 기억도 새롭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고무신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비가 오면 버릴까 봐 신고 나가지 못했으며, 잠을 자면서도 가슴에 품고 잘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헌 신발과 바뀌지 않도록 표시해서 신고 다녔으니 무슨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일제와 함께 들어온 고무신은 근대 문명의 산물로 ‘신발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 생활을 변화시켰다. 사람의 발이 대중교통수단이었던 시절에는 군산에서 전주만 가려 해도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10켤레 이상 준비해야 했으니 신발의 혁명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