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밥하고 설거지하고, 시어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22] 할아버지 할머니 점심상 차리기
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말
“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지. 나이 들어서 딸 없으면 불쌍해져. 지금이라도 하나 낳아.”
어떤 사람들은 아들만 둘인 내게 말한다. 나는 일관성을 강조한다. 제규와 꽃차남은 열 살 터울, ‘10년 주기 출산설’을 내세운다. “꽃차남 초등학교 4학년 되면 낳을 거예요. 그래야 딱 열 살 차이 나거든요”라고 성실하게 대답한다. 진짜로 그때 셋째를 낳을 거냐고? 내 진심은 “아니올시다”이다.
그런데 올해 4월에는 흔들렸다. 셋째를 낳고 싶었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 때문이다. 그는 수도권과 부산, 경남 지역에 지원유세를 다녔다. 나중에는 광주에도 오고, 심지어 우리 옆 동네인 익산까지 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진취적이면서, 애정을 숨기지 못 하는 사람들은 그와 사진을 찍는 것에 성공했다.
인터넷을 통해 그 감격의 순간을 본 적도 있다. 아기 데리고 간 사람들은 그와 사진 찍는 게 더 수월해 보였다. 아휴, 우리 꽃차남도 아기였는데 어느새 여덟 살. ‘소년미’만 폴폴 풍긴다. 그 순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꽃차남이 초등학교 들어갔다고 자랑했던 나는 “애가 왜 이렇게 빨리 크냐”고 한탄했다. 나도 모르게 원치 않는 욕망을 품고 말았다.
‘1년 8개월 뒤에 대선이니까 얼른 셋째를 낳아야겠어. 통통하고 방글방글 웃는 아기를 데리고 가서 기필코 그분이랑 사진 찍고 말 거야.’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4월 14일 새벽, 우리 집안에는 경사가 났다. 우리 부부의 여섯 번째 손주(큰 시누이 둘째 아들의 둘째 아기)가 태어났다. 신기하게도 우리 꽃차남이랑 많이 닮은 아기. 셋째 낳을까 말까 고민하던 마음은 싹 사라졌다. 내가 지지하는 그가 우리 동네에 온다면, 손주를 데리고 가 보리라(조카 부부에게는 양해를 구해놨음).
그동안 바빴던 남편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쇠고기 무국을 끓이고, 두부김치를 만들고, 나물을 하고, 생선을 구웠다. 아이들이 밤에 “아빠, 언제 들어와요?”라고 전화를 하면, “곧 들어갈 거야”라고 했다. 남편에게 ‘곧’은 오후 11시쯤, 집에 온 남편은 손도 안 씻고 잠든 꽃차남을 보러 방으로 갔다. 제규한테는 늦었다고 얼른 자라고 했다.
일요일(4월 17일)에 우리 식구는 수산리(시가)에 갔다. 부모님이 건강했을 때는 “저희 갈게요”라고 전화만 하면 끝! 아버지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건강이 나빠진 뒤로는 “저희 갈게요. 나갈 준비 하고 계세요”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에 갔다. 지나고 보니 그때도 좋았다. 지금은 부모님 모두 거동이 불편하시다.
성당 갔다가 장 봐서 수산리에 가니까 정오가 넘어 버렸다. 아버지는 <전국노래자랑>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막둥이 손주 꽃차남도 <전국노래자랑>은 못 이긴다. 아무리 만화영화를 보고 싶어도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안다. 남편과 제규는 음식을 하러 부엌으로 가고, 꽃차남은 앉지도 않고 거실에 서서 말했다.
“엄마, 그러면 자전거라도 태워 줘.”
나는 꽃차남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웠다. 큰길로 나왔더니 맞바람이 불었다. 온힘을 다해서 페달을 밟았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헉! 헉! 하지만 내 허리를 꽉 잡고 있는 꽃차남은 콧노래를 불렀다. 할 수 없이 나는 예전에 염전이었던 곳까지 갔다. 새만금 방조제가 생기면서 도둑게도, 쫑찡이(도요새)떼도 사라진 지 오래. 우리는 그저 그런 곳이 된 자리에서 머물지 않았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전국노래자랑>은 끝나가는 중. 아버지는 초대가수가 부르는 마지막 노래를 듣고 있었다. 어머니는 식탁에서 제규가 음식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는 “이 음식 텔레비에서 본 적 있다”하면서 웃었다. 어머니는 제규 손을 봤다가 얼굴을 봤다가를 반복했다. 남편은 나보고 “숟가락 좀 놔 줘”라고 했다.
“제규야, 학교에서 음식 하는 거 배우냐?”
아버지는 밥상 앞에서 제규에게 물었다. 제규는 아니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다시 “학원에서 배우냐”고 물었다. 제규는 “그냥 집에서 혼자 해요”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규가 닭 가슴살을 삶아서 만든 무쌈을 드셨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어머니는 남편이 한 버섯볶음과 호박볶음을 먹고, 아버지는 사골국물을 갖다 달라고 해서 밥을 말았다.
제규가 만든 음식이 놓인 접시만 깨끗해졌다. 아버지 어머니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드시는 게 내 눈에 보였다. 그래서 나도 옆에서 열심히 무쌈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누웠다. 나는 상을 걷고, 남편은 설거지를 했다. 어머니는 벽과 식탁을 짚고 부엌으로 와서 바닥을 닦았다. 나랑 눈이 마주친 어머니는 말했다.
“지영아, 너는 좋겠다. 아들이 밥 해줘서.”
“어머니도 좋겠네요. 막내아들이 밥 해주잖아요.”
나는 부엌을 정리하고 거실로 갔다. 남편은 어머니가 버려달라는 쓰레기를 치우러 갔다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당신의 막내아들에게 “느 아버지 발톱 좀 깎아주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요양보호사한테 부탁할 거라고 마다했다. 그러니까 남편이 선뜻 나서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를 봤다. 발톱만 깎으면 엄청 시원해질 표정이었다.
“아버지, 제가 깎아드릴게요.”
“아, 싫어~”
“저 아직 노안 안 왔어요. 진짜 잘 깎을 수 있어요.”
아버지의 발등은 퉁퉁 부어 있었다. 발톱은 부슬부슬 힘이 없었다. 어느 지점까지 깎아야 할지 모르겠다. 손톱깎이를 발톱에 댔더니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다. 바짝 깎아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발톱 끄트머리만 살살 깎았다. 아버지는 그 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 발에 다시 양말을 신겨드렸다.
우리 식구는 집으로 돌아왔다. 대청소를 한 남편은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봤다.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난 꽃차남이 “간식으로 라면 먹고 싶어”라고 했다. 제규는 못 들은 척 했다. 남편은 오이무침과 버섯구이를 하고, 라면은 두 개만 끓였다. 식구 넷인데 이게 뭔가. 저녁밥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날 밤, 꽃차남을 재운 나는 제규 방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스마트폰으로 게임 중. 상냥하게 말하겠다고 대결심을 한 건 도로아미타불, 나는 “요리하겠다는 애가 연구는 안 하고 만날 게임이냐”고 따졌다. 제규는 방금 전까지 할아버지한테 해 드릴 음식을 고민했단다. 소화 잘 되게 전복죽을 해야겠다고. 나는 그래서 남편이 한 말을 전했다.
“아빠가 오늘 수산리에서 한 메뉴는 실패래. 원래 할아버지는 다 잘 드셨잖아. 육식, 한식, 일식, 퓨전 음식도. 그래서 할머니 중심으로 한 거래. 할머니는 고기랑 매운 거를 안 드시니까. 할아버지는 고기를 좋아하지만 기름기 많이 드시면 안 되니까 수육을 한 거고. 근데 할아버지가 식사를 못 하셨어. 나중에는 사골 국에 밥 말아서 드셨잖아. 아빠는 기분이 좀 그런가 봐.”
제규는 한참 만에 말했다.
“엄마, 시간이 여기서 평생 안 지났으면 좋겠어요. (울컥) 엄마 아빠가 늙는 게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