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김기창 (1913. 2.18 ~ 2001. 1. 23)
02 십자가를 지고 [김기창 作]
03 승천 [김기창 作]
04 세종 영정 [김기창 作] 비단에 채색 153x211cm 1973년 제작 영릉 세종전 봉안
05 박래현 (1920. 4.13 ~ 1976. 1. 2)
06 노점 [박래현 作] 종이에 수묵담채, 1956
07 이조 여인상 [박래현 作] 종이에 수묵담채, 1959
운보 김기창 화백은 근 현대 한국 미술사에서 구상과 비구상 미술 영역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바보 산수화 작가로 잘 알려진 한국의 대표 화가이다. 하지만 그는 귀머거리이다. 그의 삶에 영향을 키친 중요한 세 명의 여인이 있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와 전쟁 중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그리고 아내 우향 박래현 이다. 그중 운보의 장애의 삶에 미술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던 이는 바로 그의 아내 박래현 이다. 운보 김기창 에겐 박래현은 단순히 아내만이 아닌 그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준 어머니와 그를 키운 외할머니와 같이 중요한 존재였다. 이들이 6.25 전쟁을 피해 군산에오게 된다. 박래현 선생의 고향이기도 했던 당시 군산은 많은 예술인들이 전쟁을 피해 모여 들었고, 이 부부도 4년 동안 군산에 머물게 되는데, 생활고를 이기기 위해 그들은 당시 군산 비행장(1945년 10월 5일 미군 기계화 부대가 함정을 타고 군산항에 입항, 일본군의 군용비행장이었던옥서면 선연리 일대에 주둔하면서 시작)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군산에서 제작한 작품 중 예술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크리스천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김기창은 1951년(당시38세) 작품을 제작하며 붓을 잡고 잠시 조는 사이에 문득 고난의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꿈을 꾸게 되는데, 이것을 계기로 예수의 일대기가 당시 한반도의 민족적인 비극과 유사함을 깨닫고 회화로 승화시키려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수와 등장인물 등을 한국인과 당시의 복식 및 배경으로 하여 총 29점의 작품을 제작한다. 결국 1954년 4월 그는 그의 성화 작품 중 몇 편으로 서울에 임시로 꾸민 화신백화점 5층 화랑에서 성화(聖畵)전을 열어 작품들을 선보이게 되는데 당시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들은 한국 화단의 신선한 화제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훗날 예수의 부활장면을 그림 그림을 추가하여 총30작품이 되었다.
화가 김기창은 이러한 시대적 아픔과 육체적 고통에 대해 작품으로 표현하려 노력했고, 결국 그는 전통적이며 평면적인
표현 방법에서 벗어나 입체파 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이른다. 이는 유럽의 입체파(1900초 시작, 대표작가 피카소)보다 50년이 뒤졌지만 그와 박래현의 미술적 실험 시도는 결국 한국에서는 초창기 입체파의 시작 이였으며, 군산이 그러한 중심에 서 있었다. 김기창 선생에게 있어 군산에서의 삶은 격동기를 사는 인간의 고뇌와 미술인으로써 창작 열정을 표출했던 곳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 그의 군산에서의 행적과 관련된 작품을 더 찾아 정리되어져야 할 것이다.